사의재(四宜齋)여유당(與猶堂)

 

(어제 (2016515) 대학교회 다산생가 효도관광길에서 느낀 한 토막 글)

 

다산 정약용의 <牧民心書>에서 공직자들이 갖추어야 될 자질로 淸心항목이 나오는데 그 한 대목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 조선에 청백리로 뽑힌 자가 모두 110명인데, 태조 이후에 45, 중종 이후에 37, 인조 이후에 28명이 있다. 경종 이후로는 청백리 선발이 마침내 끊어지고, 나라는 가난해 지고 백성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400년 동안에 벼슬한 자가 수천 수만명인데, 그중에서 청백리로 뽑힌 자가 겨우 이 숫자에 그쳤으니 진실로 사대부의 수치이다.”(참고, 박석무 역, 마음으로 쓰는 목민심서, 30-31).

 

지난 2월 전남 강진에 갔을 때 다산이 강진 유배 생활 18년의 첫 거처 주막집 자기 거처를 四宜齋라고 명명하였다. 자기의 삶의 자리 네 가지를 마땅히 지켜야 될 로 보고 그 의가 자기 삶의 자리를 제어해야 한다는 것을 사의재로 표기한 것이다. 사의재란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단정히 해야) 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된다는 것이다.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있는 생가의 서재 칭호를 이 사의재와 상통하는 與猶堂이라고 칭하였다. <여유당> 칭호에서 與猶는 노자 도덕경 제15장에서 빌려 온 말이다. ‘! 머뭇거림은 마치 살얼음 겨울 냇가를 건너는 것 같고, ! 신중함은 마치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경계하는 것 같도다 與呵其若冬涉水 猶呵其若畏四隣라고 말하였다. 그는 與猶이 두 글자를 두고 안타까워라. 이 두 마디 말이 내 약점의 치료제가 아니겠는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의재와 여유당 칭호들은 모두가 경건하고 올곧은 삶을 느끼게 하는 칭호들이다. 언행심사를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이 경구 같은 칭호들에 비추어 보아 다산은 평생을 황야의 구도자 내지 수련하는 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천진암에서 배운 그리스도교 진리에 향한 신심이 이렇게 이어졌는가. 삶의 끝자락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분석하고 정리한 46경들에서 배어나온 교훈들을 추구한 모습인가.

다산은 이렇듯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살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실제로 그런 삶을 이어갔지만 무고 내지 모함한 자들이나 정적들이 억지로 뒤집어 씌워 고난의 순례자로 살아가야 했다. 더구나 대역죄로 순교당한 형 정약종의 가문에 속한다는 시대의 구조악 제도로 인해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것이다.

다산 당시의 하급관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牧民心書> 束吏에 보면 쥐꼬리 같은 아전 무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전들은 위로는 수령을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착취하는 무리들로 묘사되고 있다. 암행어사 시절 부패한 관리들과 서민들의 참상을 시로 엮은 내용을 보면 (박석무 역, 90-91) 기가 막힐 지경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직자들의 부패하고 탈선한 추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는 것으로 인해 국민들은 공직자들에 대하여 불신하고 있는 때에 다산의 삶의 자리 사의재나 여유당 칭호는 더욱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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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