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ntists의 종말 신앙 자세
시간의 에스카톤
시간에는 시작이 있고 종말(eschaton)이 있다. 불교적인 윤회사상이나 희랍적인 무시간성이란 비성서적이다. 성서적 시간은 선적(線的)이다. 역사의 시작이 있으면 그 마침이 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1-2).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이상적 낙원을 추구하여 갖가지 운동을 전개하여 왔지만, 그런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오늘날 인간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차있다. 미래학은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예측기법을 개발하여 다가오는 앞날(10년 후, 100년 후 등)에는 어떤 일(사건)이 일어날 것인지를 예상/예측한다. 그러나 미래학이 얻어낸 것은 미래에 대한 심각한 비관적, 부정적인 문제의식을 예측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 종말론은 성경 예언을 연구하며 희망의 미래를 투시케 한다.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구속사적인 섭리 중에 정하신 이 세상이 종결되는 시간대에 초점을 둔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계시에 토대를 둔 성경 종말론은 역사의 끝에 오실 분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의 오심(Advent)은 헬라어 파루시아(parousia)의 번역어다. 파루시아 개념은 인격의 오심이나 도착을 뜻하고 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두고 사용한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 개념이 아닌 미래 영광중에 오시는 임재를 뜻한다. 종말론의 포커스는 예수 그리스도 “샛별”(벧후 1:19)의 나타나심에 집중된다. 시간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역사의 초점이며 목표가 된다.
재림신도들과 종말론
종말론은 신학의 관석(冠石)이 된다. 종말론은 신학의 척추와 완성(consummation)의 교리이다. 다른 영역의 교리가 갖추어져 있다 하여도 종말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리스도교 진리는 불완전하게 된다. 성경 신학은 종말론으로 마친다. 구원론과 종말론은 분리될 수 없는 상관성을 지녔다. 구원론이 구원의 요구조건을 연구한다면, 종말론은 그 구원이 완성되는 자리매김을 연구한다. 그리하여 신학의 생명을 공급하는 구원론은 종말론에서 완성된다. 종말론은 신학 전체의 버팀목이며 등뼈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 중심이 되는 성서적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버팀목이다.
재림신도들(Adventists)은 성경에 나온 희망을 역사의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애드벤트(Advent)에 두고 그것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애드벤트개념은 성서 종말의 지평을 열어주고 그 범주를 한정시킨다. 재림교회! 이는 성경의 근본 사상과 역사 철학을 응집시킨 명칭이고 성경이 추구하는 목표를 꿰뚫고 있는 정곡을 찌르는 명칭이다. 재림신도들은 종말론 기별에서 희망의 아침과 절망의 밤을 전파하는 파숫군(사 21:11-12) 메신저들이다. 재림교회는 성경의 종말론 분야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받은 남은 교회이다.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종말론적 예언에서 찾았다. 그들의 역사철학은 묵시문학적 예언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경에는 종말의 메시지가 너무나 확연하다.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는 복음서 연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의 핵심이 종말론에 있음을 밝혀 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이끌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모호하게 하거나, 역사적 끝을 탈색 내지 거세시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 메시지를 윤리종교 내지 사회개혁운동으로 전락시켜왔다. 20세기 이래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마지막’을 ‘궁극적(ultimate)’이라는 의미로 전환시켜버렸다. 그들은 역사적 마지막을 의미의 마지막으로 바꾸어 사용한다. 불트만의 종말론의 비신화화 주장이나,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이르러서는 종말론의 의미가 다변화되어버렸다. 이같이 성경의 진정한 파루시아 사상은 증발되어졌다. 말세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조롱하는 자들이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면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 3:4)고 조롱한다는 메시지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있어서 더욱 더 그렇다.
종말론적 신앙 자세는 여러 가지로 풀 수 있겠지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 4:7-10).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1. 재림 박두의식
지구문명은 급작스런 멸망의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 세계 각지에는 심상치 않는 기상 이변, 지진, 살육 및 생태계 파괴가 지구적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급속한 기술문명의 발전이 충격적인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져 기존 질서 붕괴를 재촉하고 있다. 더구나 대량 살상 핵무기의 범람, 기승을 부리는 패권적 국가주의, 자원의 고갈과 오염된 환경 및 도덕의 실종이 인류를 고통으로 내 몰고 있다. 정보화 사회라는 지구촌의 복지 문명시대의 꿈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세계와 역사 속에 잠식해 들어온 악의 세력과 불의한 힘들을 심판하고 새로운 생명 세계를 회복할 새 시대의 도래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우주적 종말론은 꺼버릴 수 없는 희망과 기대를 안겨준다. 이런 때 일수록 재림신도들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재림신도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까지 종말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재림, 역사의 종말, 우주적 종말을 내다보면서 살아간다. 신약성경은 그 어느 책도 종말을 다루고 있지 않은 책이 없으리만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된 표현을 빈번하게 나타내고 있다. 마태복음 24장은 통째로 한 장 모두가 종말을 다루고 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성경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요한계시록 같은 책은 그 주제가 종말에 집중되어 있다. 성경에 종말이나 재림과도 같은 단어는 사랑과도 같은 단어의 빈도 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박두 의식은 성경에 꽉 차 있다. 초기교회의 활발한 신앙의 엔진은 부활과 이 재림신앙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까이 임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날마다 살아가는 신앙이야 말로 신앙인의 순수성을 보전한다. 그들의 암호나 신앙 인사가 마라나타(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이었다.
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걸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래 로마교회와 중세 암흑시대에는 종말의식이나 박두의식이 증발되어 버렸다. 그러나 오늘날은 종말론에 향한 심각한 의식의 팽배가 시대의 공통적인 현상이 되어 있다. 오늘 날 온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깝다고 증거하고 있다. 종말 박두 의식은 묵시적 종말 예언의 성취로 인하여 그 확실성이 더욱 뚜렷하여져 가고 있다.
성경에는 재림의 임박성을 말하는 기별이 자주 나온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롬 13:11). 사도적 신앙은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종말적 신앙이다. 그러나 시한부종말론 같은 광기적 종말론이나 종말기피증이나 종말공포증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하여야 한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2. 재림 신앙 자세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1-13). 이 말씀은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재림신앙의 자세를 일깨우는 말이다. 무엇이 삶의 우선권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를 시사하고 있는 표현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의 흐름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재림신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1) 여기서 “사모하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날을 재촉하는 선교적 삶, 즉 영원한 복음을 신속하게 전파하라는 사명에 매진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또 (2)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은 기도 생활로부터이다. 기도는 나로 하여금 깨어 있게 한다. 내가 기도하고 있을 동안에는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기도생활은 늦은비 성령을 받는 길이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며, 모든 일들을 기도로 운영하는 삶이다. 기도하는 만큼 영혼은 깨끗하여 지고,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여진다. 기도하는 자는 능력을 받아 일한다. (3)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라. 열심이란 힘을 다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 힘을 다하여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 주면서,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는다. (4)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주인의 오심을 기다리는 충성된 종을 청지기로 묘사하고 있다(마 24:43-51).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마 25장)를 통하여 헌신 봉사하는 삶을 재림 준비로 말씀하셨다. 재물과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선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재림신도들은 현재 일에 열심히 봉사하며 살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다. 주님 앞에 무슨 일 하였는지 셈할 때가 다가온다. 지역 교회가 한 마음으로 연합하여 그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주의 재림을 촉진하는 권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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