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vicarius filii dei(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

드 콕(Edwin de Kock)666 해석과 반응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13:18)에서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비추어주심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인 것이다. 이 지혜는 예언 풀이를 성서적-문법적-역사적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서 풀어 나갈 것이다. 특히 철저한 역사주의 해석 원칙에 입각하여 예언을 풀어가야 한다. 요한계시록 13:18666 연구에서 이 지혜를 올바로 활용한 분은 에드윈 드 콕(Edwin de Kock) 교수로 평생 묵시적 예언과 연관된 역사 연구를 해 온 분이다. 그는 재림교회 여러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평생을 가르쳤으며 중세사, 교회사, 재림교회 역사에 조예가 깊다.

드 콕 교수는 10여 년 이상을 이 주제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하여 학술적 대작으로 3, 거의 850여 쪽짜리 <666의 진실과 대 배도 이야기>(The Truth about 666 and the Story of the Great Apostasy) (Edinburg, TX, 2011)를 출간 (Vol. 1-대 배도의 이야기, vol. 2-역사적 증거들, vol. 3-재림교회의 연관성), 666vicarious filii dei 사이의 연계성을 명료하게 밝혀냈다. 스미스(Uriah Smith)가 재림교회의 묵시문학 해석에 있어서 666=Vicarius filii dei 등식을 도입하여 크게 기여하였지만, 후대 성서학도들이 이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주의적인 해석에다가 상징주의 내지 이상주의적 해석을 혼합시킨 이해가 교회 안에 머리를 들고 있다. 666이 불완전한 인간성이나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죄성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는 연구가 발호하는 시점에 드 콕 교수의 연구는 재림교회 신학마당에 그 동안 연구해 온 것들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는 폭탄 투하와도 같아 보인다. 드 콕 교수의 예언 해석을 재림교회의 기라성과도 같은 인사들, 예컨대, 앤드루스 신학대학원 교수 및 대총회성경연구위원을 역임한 쉐이(Wm. Shea) 박사, 재림교회의 저명한 전도자 마크 핀리(Mark A. Finley) 목사, 앤드루스 신학대학원의 담스틱(P. Gerard Damsteegt) 박사, 국제창조학회 강사 파이트(Walter J. Veith) 박사, Southwestern 연합회장을 역임한 무어(Larry R. Moore) 목사, Southern Adventist University 명예교수 블랭코(Jack J. Blanco) 박사 등 저명한 분들이 적극적으로 드 콕 교수의 연구를 격찬하고 그 독서를 권장하고 있다.

 

666=Vicarius filii dei 등식이 선포된 문서

Vicarius filii dei(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 이하 VFD로 표기) 라는 교황의 칭호는 847-853년 경 발견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寄進狀) 또는 증여서(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 또는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라는 유명한 위조문서에 처음 나온다. 이 문서는 752-774년 경 작성된 것으로, 778년 교황 하디리아노가 샤를레망에게 보낸 글에도 인용되었다. 동 문서의 요지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로마 도시와 서방 제국을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이 문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권이 교회의 총수일 뿐만 아니라 세속 정치의 총수도 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전가의 보도격 문서로 간주되어 왔다.

동 문서는 844-850년 경 작성된 위조 교령집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더 나아가서 동 문서는 1148년 경 그레시아노의 법령집(Gratianus’s Decretum)에 편제되었으며, 그 후 이 법령은 1500년에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식 교본인 <교회법대전>(Corpus Juris Canonici)에 편입되어 1879년까지 출판되어 왔다. 이로서 동 문서는 가톨릭교회 공식 문서의 일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셈이다.교회의 신품 위계와 교황의 수장권(首長權)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법 학자들, 교회 변증가들, 주교들, 교황들, 대학들과 모든 사제들이 동 기진장을 교령집->법령집->교회법대전으로 (발전시켜) 활용하여 왔음이 밝혀졌다. 한 가톨릭교회의 변증가인 마드리드(Patrick Madrid)“VFD 의 다양한 변형이 교황 바오로 6세의 1968년 교황령인 Apostolic Constitutions Bafianae 같은 교회의 공식 문서에 사용되어 왔음을 인정했다. 교황령(Apostolic Constitutions)은 교황이 교의나 가르침에 관하여 보편 교회에 제시하는 가장 장엄한 문헌이다. 전후 역사적 맥락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의 VFD 반대자들은 이 칭호가 교황이나 가톨릭교회의 공식 문서에 사용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여 왔다. 또한 일부 재림교도 중에서도 위와 같은 역사적 맥락 정보를 간과한 채 지난 수 십 년 동안 가톨릭교회 반대자들의 논조에 동조하여 온 것이다.

 

666VFD로 보는 해석 등장

VFD를 라틴어 숫자와 처음 연계시켜 계산한 사람은 1600년 베를린의 신학교장(rector)이었던 헬비히(Andreas Helwig) (Helwich라고도 함) 였다. 재림교회가 그 짐승의 이름의 수를 666으로 계산한 첫 번째 무리가 아니다. 그는 이후 개정판과 제3판을 발간하였는데 최근 드 콕 교수와 그의 연구원들이 이 제3판을 입수하게 되어 VFD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제3판은 프룸(Le Roy Froom)이 아쉽게도 활용치 못한 출판물이었다. 프룸은 헬비히의 후기 사상에 관련된 정보의 결여와 그의 라틴어 한 단락에 대한 오역으로 인하여 헬비히가 실제 사용하지 않은 가상의 칭호를 창조해 냈다는 인상을 남겼다. 바끼오끼(S. Bacchiocchi) (1938-2008)도 프룸의 이해 방식에 입각, 이 칭호가 실제의 것이 아닌 헬비히가 부연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림교회 학자 드 콕 (2011) 및 샤이플러(M. Scheifler) VFD를 두고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여 온 직함 칭호로 실재하였으며, 특히 교황의 수위권을 고양시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명쾌하게 정립해 낸 것이다. 그들의 이같은 학문적 발견은 재림교회의 묵시문학적 예언 연구에 전환점을 마련하리만큼 크게 기여하였다. VFD=666 등식은 재림 교회 초기부터 밀접한 연계성을 지녔다.

 

수비학(數秘學)적 풀이와 그 한계

히브리어나 헬라어 알파벳에 특정 수자를 부여하는 소위 게마트리아(gematria) 방식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체계였다. 고대 유대인 랍비들이나 초기 신자들이 수비학 체계를 차용, 히브리어나 헬라어 알파벳을 수자로 치환 표기하여 단어나 구의 의미를 향상시키거나 특정인에게 적용, 전달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그 전형적인 예를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sulam, !L;su)’라는 단어의 각 자음을 수치로 환산하여 시내산에서 주신 토라로 풀이하거나, ‘아브라함808 수치로 환산, 믿음(he pistis)의 수치와 일치시키기도 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헬라어 표기 예수(Iesous, !Ihsou'")’888로 환산, 끝없는 승리로, ‘십자가(staurov")777로 환산, 영원한 완전으로 이해하였다. 재림교회 일부 인사들조차도 이를 제한적으로 원용하여 왔다.

왜 요한계시록 13:18을 이해하는데 게마트리아 방법을 사용하는가?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성경이 그렇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13:17절에 그 짐승의 이름의 수가 등장하며, 13:18에서는 그 수를 세어보라고 하신다. , 첫째 짐승의 신원을 뚜렷이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이 계시에 따라 당대 사용되고 있는 문자-숫자에 관련된 문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에 따라 당연히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이레네우스(Irenaeus) (c. 120- c. 200)이단 논박 (Against Heresies)’ (c. 180)에서 666Euanthas, Teitan, Lateinos로 풀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신중하게 제안하였지만 독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대 영지주의 이단 사상의 발호를 경계하면서 적그리스도가 로마의 멸망 후에 일어날 것이고 그 때에 가서야 666의 의미가 들어날 것으로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 요한계시록 13:18짐승의 수를 수비학적으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치환 풀이하는 방식이 봇물 터지듯 난무하고 있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666 해석을 하는 일에 있어서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도외시 하는 경향은 이레네우스 이래 창궐하여 왔다. 문제는 소위 게마트리아 방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 예언 구도와 연계된 요한계시록 13장 전체 그림을 무시한 마구잡이식 해석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한계시록 13:18에 나오는 666 풀이에서 첫 짐승인 로마가톨릭 교황권이 VFD를 자기에게 역사적으로 적용시켜 왔다면 예언적 문맥에 입각하여 이른바 게마트리아 방식을 배척할 이유가 없다. 로마에서 발행된 가톨릭교회 성경 연구소의 한 헬라어 문법 해설집조차도 요한계시록 13:18을 해설함에 있어 그 이름의 수, 즉 그 이름의 문자에 해당하는 숫자의 합계 (sum of the numbers corresponding to the letters of his name”)라고 하여 게마트리아 방식의 풀이를 유도하고 있다. 게마트리아라는 방법론의 거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황권 칭호 VFD를 사용한 역사적인 사실로 논증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예언적 맥락에서 등장한 666의 사례는 요한계시록 13:18에만 나와 있기에 그 풀이가 쉽지 않지만 철저한 역사적 검증을 거친 지혜 있는 성경학도라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식을 겸허하게 수용해 나갈 것이다.

존 폴린은 VFD666에 관한 한 최선의 게마트리아라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이 방법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재림교회 내 전통주의적 학자 뿐 아니라 진보적 학자들도 VFD 자체에 대하여는 큰 견해차를 보이지 않는다. 이 두 그룹을 가르는 요소는 라틴어 vicarius filii dei를 헬비히가 게마트리아 방식을 사용하여 666을 산출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질문이다. 헬비히를 비롯하여 스코틀랜드 목사인 플레밍 (Robert Fleming, 1660-1721) 등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한다. 헬비히는 요한계시록 13:18의 칭호에 대한 게마트리아 방식 적용에 있어서 몇 조건을 충족시켜야 된다고 보았다. 프룸이 인용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이 신비한 이름이 (1) 요구하는 숫자에 달해야 하며, (2) 교황권과 일치하고, (3) 교황권의 원수들이 붙인 나쁜 의미의 이름이 아니라 적그리스도 자신이 받아들이는 이름이어야 하며, (4) 그 자신이 자랑하는 칭호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네로나 엘렌 G. 화잇의 이름도 666이 된다는 비평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141115일자 Our Sunday Visitor 의 편집자는 자신의 이름을 대입해 보니 역시 666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없이 나올 수 있는 이런 환치 방식은 요한계시록 13:8에 나타나는 첫째 짐승의 후보자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짐승이 538-1798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 하여 참람된 말을 하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며 성도들을 대적한 그런 존재이어야만 짐승의 이름에 대입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Anti-Christ)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를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대 전제인 예언적 맥락을 벗어나 소위 게마트리아 방법을 적용한 사례라면 그것들에 눈길을 줄 필요가 없다.

게마트리아 방법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지닌 재림교회 몇 학자들은 예언 해석에 있어서 역사주의적 해석 모델에 이상주의적 해석 모델 시스템을 도입, 혼합시키는 길로 나갔다. 드 콕은 이를 두고 두 개의 학위 논문, 1977년 포드(Desmond Ford)의 논문이 과거주의를 불러들였고, 1983년 닐(Beatrice S. Neall)의 논문은 이상주의적 해석 기류을 불러들였다고 본다. 그리고 이 두 논문은 장차 수많은 이견을 산출해 내는 학자들의 샘터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라론델(H. LaRondelle) 또한 VFD에 관한 견해를 닐(Neall)을 인용하여 펼쳤다. ‘VFD=라틴어 666’ 등식을 부정한 학자로는 1933년 프레스콧(W. Prescott), 2001년 스테파노비치(Stefanović), 2004년 질(Diestre Gil), 2005년 바끼오끼(Bacchiocchi) 등을 들 수 있다. 프레스콧은 Our Sunday Visitor 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반대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데이스만(A. Deismann)과 사이스(J. A. Seiss) 및 가톨릭 학자 J. 쉐이(John Dawson Gilmary Shea, 1892-1987) 등의 이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기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J. 쉐이와 마찬가지로 프레스콧 역시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의 게마트리아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라틴어를 계시록 13:18에 적용하는 것을 반대한 모든 이들이 헬라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왜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아닌 라틴어 칭호의 수를 세는가? 이 또한 무척 당연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중세 1,260년 기간 동안 큰 말과 참람된 말을 하고 성도를 핍박한 그 세력이 사용한 언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머리 위에 붙인 죄패에 사용된 세 언어 중 하나가 라틴어였다. 이는 그 때가 다니엘의 예언에 등장한 넷째 짐승, 즉 로마 제국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이교 로마나 신성 로마 제국 모두 그들의 언어는 라틴어였다.

대총회에서 VFD의 이 논제에 관하여 이들 글자들이 가지는 수치가 정확히 666이라는 합계에 이르는 것을 계산해 보일 당당한 권리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반면, 무슨 이유로든 이 결론을 허물어 내리려는 사람들은 게마트리아 방식을 배척하여 왔다. 요한계시록 13:18의 역사주의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재림교회 학자들은 닐의 학위 논문을 인용하였다. 맥스웰(Mervyn Maxwell) (1985) 역시 Neall을 인용하면서 VFD를 첫째 짐승에 적용해야 할지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게마트리아를 사용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13:18에서는 독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청하고 있지만, 신구약 성경 다른 어느 곳에도 그러한 요청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삼층 면류관 칭호 Vicarius filii dei의 신학적 우산

Vicarius filii dei 이슈는 교황의 수위권 및 베드로 반석설 같은 큰 신학적 주제라는 우산 아래서 보아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 주장하며 천국의 열쇠 전권을 그에게 위탁한 것에 역점을 두고 후대 교황들을 모든 교회의 머리로 보며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보게 하는 일에 전력투구를 해 왔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일치운동에 있어서도 전 그리스도교회들에게 교황을 교회의 수장으로 수용하라는 주장을 펼쳐 오고 있는 것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VFD에 그토록 집착해 온 것이다.

대관 의식에서 삼중 면류관이 새 교황의 머리에 씌워질 때 의식 집행 추기경이 "세 가지 왕관으로 장식된 삼중관을 받으라, 그대는 군왕들의 아버지, 세계의 통치자,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알라고 선포한다(National Catholic Almanac). 이런 사상은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The Reunion of Christendom(1885)에서 교황은 "지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자리를 장악한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시각에서 교황의 삼층 면류관이나 주교관에 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칭호만 나오고 vicarius filii dei라는 칭호가 않는다고 하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혹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여왔지 ’VFD‘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치켜세운다. 그러나 교황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는 것이다. 칭호 그리스도의 대리자’VFD‘가 역사적으로 등식적 내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매우 풍부하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Triumphus)1320년 교회 권위의 요약 이라는 작품의 어떤 질의에서는 vicarius filii dei, 다른 질의에서는 vicarius christi를 사용하였다. 또한 194335일 쿠아스텐(J. Quasten) 이라는 가톨릭교회의 역사학자가 직접 서명한 글의 원본을 인터넷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와 마찬가지로 VFD 역시 교황의 칭호로써 널리 사용된다고 인정하였다.

그리스도의 대리자‘VFD’라는 칭호가 동의어로 사용된 역사적 기록들은 동 칭호의 존재와 활용의 광범위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교황의 삼층관이나 주교관에서 이 VFD 칭호 표기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 여러 인사들 및 드 콕과 그의 팀원들은 이러한 삼층관이나 주교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1798년 프랑스가 바티칸을 침공하여 교황을 포로로 잡아가는 바티칸의 정치적 격변이 소용돌이치는 혼란기에 그것을 도둑맞았거나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대 전제 아래에서 콘스탄티누스 증여서 같은 조작도 서슴지 않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살해한 로마가톨릭교회가 예언 풀이에서 자기네들에게 직격탄과도 같은 칭호를 그대로 방치, 전시할 것이라는 판단은 너무 나이브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VFD”라는 칭호가 삼층관에 새겨져 있었느냐 여부는 실상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수많은 가톨릭교회의 공식 문서에서 이 칭호가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2005년 바끼오끼 역시 오늘날은 현존하는 삼층관의 증거를 찾을 수 없지만 과거에 이러한 삼층관이나 주교관이 있었을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1890년의 벨기에 삼층관에 ‘vicarius christi’라는 글귀가 새겨진 것은 wikipedia에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바티간의 한 건물에서도 vicarius christi가 새겨진 삼층관을 쓴 교황이 그리스도의 오른 편에 서 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드 콕의 책 부록 문서에는 스미스(U. Smith) 이전 비 재림교회 학자들 80여명 이상이 VFD가 교황의 칭호이었다고 주장한 것을 인용하고 있다.

 

성경의 문맥

666에 관하여 1983년 닐(Neall)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주장하였다: “(666) 의미는 6이라는 숫자 자체에서 찾는 편이 낫겠다.” 그 결과로 6은 불완전수인 반면 7은 완전수이며, 따라서 666은 불완전을 나타내고 777은 완전을 나타낸다고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바끼오끼는 요한계시록의 모든 수는 영적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런 접근방식은 18세기 스웨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의 영적 해석의 견해를 공유하는 모양새를 띤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이상주의적 해석이 교회 내에 침투함에 따라 종말론적 이해가 존재론적 이해로 탈바꿈하게 된다. 판넨베르그(W. Pannenberg) 역시 종말론을 존재론으로 바꾸었는데, 2001년 스테파노비치의 666에 대한 이해도 그 한 예에 해당된다. 그는 “6이라는 수는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신성의 수인 7에 못 미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삼중의 6은 인간의 또는 인본적인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신성한 삼위일체의 모조품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모조품이 수반할 수 있는 모든 지상권과 권위를 요구하게 된다. 이 사단의 삼위일체는 문맥상 아마도 사단()과 적그리스도(첫째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둘째 짐승)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는데, 이들은 창조주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피조물을 대신 앉게 하며 인간 속의 하나님의 형상을 짐승의 형상으로 바꾸려는 그들의 악마적 목적으로 연합하게 된다.” 라고 하였다. 그 역시 닐(Beatrice S. Neall)이 제안한 대로, 666이라는 수는 인간이 7로 발전하여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거절한 것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바끼오끼 역시 판넨베르그가 종말론을 존재론으로 바꾸었듯이 요한계시록의 모든 수를 인간적인 유추(analogy)를 함의한 것으로 보았다. “나의 연구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숫자는 독자들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진리를 파악하도록 돕는 인간적인 유추로써 사용된 것이다,” “마지막 때의 최종적 결말은 이름이나 숫자 자체, 즉 일요일대 안식일, 첫째 날 대 일곱째 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날들이 대표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자아 중심의 경배와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짐승의 표와 수가 이해되어야 한다.”

로드리게즈(A. Rodriguez)200266일 목요일의 안교 교과에서 성경에는 이 수가 이름의 글자가 가지는 수치를 더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666이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인간이 여섯째 날에 창조 되었으며 이 수는 신성한 쉼 (일곱째 날)이 없는 인간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드 콕은 역사주의적 해석에 이상주의적 해석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은 마치 천연두나 나병과도 같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조금만 몸속으로 들어 와도 몸 전체를 심한 질병으로 위협하거나 심지어 죽음을 초래한다. 이와 같은 침투로 바람직한 성경 해석에서 역사주의 해석이 이상주의적 해석으로 변환함에 따라 역사를 상징으로 대체하고 역사적 사실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조류에 편승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앤드루스 스터디 바이블(Andrews Study Bible)666을 삼위일체 패러디로 보고 있다. 이는 Our Sunday Visitor를 창간한 놀(Francis Noll)1930년에 말한 바와 유사하다. “요한계시록 12장과 17장의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악마의 삼위일체를 형성한다.” 동 스터디 바이블은 666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666. 계시록의 하나님의 수는 7이다. 따라서 6이 거듭된 이 수는 모조품이나 모자라는 것을 나타내거나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4년 올리버레스(Carlos Olivares)는 재림교회의 이런 현상을 잘못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오늘날 재림 교회의 역사와 공문서에 비추어 볼 때 이 칭호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며, 상징적 해석이 선호되고 있다.” 세속주의의 영향이 강한 곳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성경을 기초로한 신앙을 하는 재림교인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면 성경의 문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 기본적인 점 두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1) --육인가, 육백-육십-육인가?

계시록 13장을 연구함에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은 13:18666이 헬라어 원문으로 6이 세 번 겹쳐진 ξ ξ ξ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 본문 표기는 육육육이 아니라 ξακόσιοι

ξκοντα ξ,” 육백 육십 육이다. ‘6’ 세 개를 병렬한 것으로 보는 이해는 짐승의 신원을 증명하려는 본문 맥락을 흐리게 하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해석을 배척케 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 성경의 육백-육십-육 대신에 6-6-6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성경 본문 이해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자 하는 길을 터놓았다. 죄르겐슨(Kenneth Jørgensen)200689일 미시건주 야영회장(Camp Au Sable)의 한 집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어떤 헬라어 사본에는 이 수가 약자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χξζ (cxz, chi xi zeta)로 쓰였으며 아니면 신약성경에서 보듯이 숫자를 풀어서 다 썼다고 제시하였다. 그러나 ζζζ(6-6-6)로 된 사본은 없다. 이와 같이 숫자를 분리하여 겹쳐 쓰는 것은 힌두-아랍의 숫자 체계였지 고대 지중해 연안 지역에는 없던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수 7에서 하나가 모자란 6, 즉 불완전을 나타내는 인본주의적인 수가 세 번 겹쳐서 온전히 인본주의적 권세를 표상한다고 하는 것은 그 것 만으로는 너무나 막연하여 육백육십육이라는 이름의 수를 통해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 번째 짐승의 정체를 밝히려는 성경의 의도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6을 인간의 수로 보는 이러한 시각은 지나친 확대해석을 한 것이다. 이사야가 계시에서 본 스랍 천사들도 여섯 날개를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스랍들이 불완전하게 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6을 인간의 수로 본다면 창조 여섯째 날에 창조된 인간이 불완전하였다는 것인가?

(2) “짐승의 표=짐승의 이름의 수인가?

재림교회 선구자인 조셉 베이츠, 홀트(1844년 이후), 그리고 제임스 화잇 (18503현대진리에서), 우라이어 스미스 (1865) 등은 짐승의 표를 일요일 준수라고 보았으며 엘렌 G. 화잇도 대쟁투(1888)에서 그와 같이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분들은 요한계시록 13:17-18의 짐승의 표와 수와 이름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01년 스테파노비치는 짐승의 표를 짐승의 이름과 동일한 것이라고 본다. 1933년 프레스코트, 2004년 질(Diestre Gil), 2005년 바끼오끼 및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짐승의 표와, 이름과, 수를 뒤섞어 사용함으로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견해를 일축하였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13:17, 즉 짐승의 이름, 또는 그 이름의 수라 하여 (that is)”을 동격으로 읽는다. 바끼오끼는 짐승의 표와 수, 이름을 통합적으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전통적으로 재림교회에서는 짐승의 표가 일요일 준수를 강요하는 것으로, 666이라는 짐승의 수가 교황의 삼층관에 새겨져 있다고 전해지는 VICARIUS FILII DEI라는 교황의 칭호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여 왔다. 이런 해석에는 짐승의 표와 짐승의 수를 다른 것으로 보는 문제점이 있어... 이런 해석은 본문 해석 상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본문에 따라 표와 이름과 그리고 수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승의 표와 짐승의 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어 원문에 나오지 않는 에 방점을 찍어 이름가 동격이 되어 같은 실체로 보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화잇 여사는 KJV에 나오는 “and that no man might buy or sell, save he that had the mark, or the name of the beast, or the number of his name.”를 인용하고 있다 (대쟁투 445). 이를 한글 킹제임스는 그 표나(or) 그 짐승의 이름이나(or)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 나오는 “or(이나, 또는)”이라는 접속사를 분리적인 독법으로 보고 번역하여야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다. 가장 오래된 요한계시록의 헬라어 사본의 하나인 p47 (Papyrus 47)에도 다음에 or (이나, 또는)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Codex Alexandrinus와 동시대 사본인 Codex Sinaiticus에도 역시 또는(이나)”이 포함되어 나타난다. “이 없고 “or(이나, 또는)”이 사용된 원문에 따르면 짐승의 표가 짐승의 이름과 분리되는 것을 시사하는 KJV이 번역에 따른 이해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된다. 화잇 여사가 KJV을 인용한 것에는 하나님의 인도와 예언적 통찰이 배어 있다 하겠다. 따라서 짐승의 표짐승의 이름,’ 사람의 수를 동격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짐승의 이름이 를 만드는 주체가 된다. 이 주체와 주체가 만든 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짐승의 표는 짐승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짐승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가 된다는 의도이지 짐승의 표가 곧 짐승의 이름 및 수와 동일한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표와 이름과 그리고 수가 동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교황권이 만들어 낸 짐승의 표를 일요일 준수라고 설명한 엘렌 화잇 여사나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견해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명인 안식일과 사람의 계명인 일요일 준수의 이슈가 대쟁투의 마지막 계쟁점이 될 것이라는 기별의 동력을 약화시켜 주님의 오심을 위한 준비에 마이너스가 되게 할 것이다. 짐승의 이름의 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짐승과 짐승의 표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오도하여 마지막 때의 이슈를 흐리게 하는 길로 이끌 위험이 있다. 요컨대, 짐승의 이름이나 이름의 수를 짐승의 표를 만든 존재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외면하는 것이 되어 다니엘 7-8장의 작은뿔 및 요한계시록 13장 첫 머리에 나오는 짐승의 하는 일이 오리무중이 될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엘렌 화잇 여사는 요한계시록 13:17을 교황권 중심으로 보도록 시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교황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고 한다. 신대륙과 구대륙 모두에서 교황권은 오로지 로마교회의 권위로 세워진 일요일 제도의 존중을 통하여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쟁투, 579). 그렇다면 이어지는 13:18의 문맥도 교황권과 그 칭호를 중심으로 풀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맺는 말

666 그 이름의 수를 세어보라고 하신 기별을 따른다면 요한계시록 13장의 첫째 짐승의 정체성 (identity)과 그의 하는 일을 뚜렷하게 밝히는 열쇠가 VFD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VFD의 예언적 정체성이 명료해지면 하나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짐승이 마지막 때 역사의 마지막 골목에 설치한 짐승의 표라는 덫을 피하여 자유스럽게 될 길을 마련하신 자비의 기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때가 급박할수록 나팔 소리를 분명하게 내어 세상에 경고의 기별을 전하라는 예언자의 권고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재림교회에 위탁하신 사명을 기억하며 역사적-성서적-문법적 예언해석 원칙에 더욱 충실하게 요한계시록 13:18을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