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n G. Harmon의 회심 3단계
Ellen G. Harmon의 회심 3단계
가족 신앙
Ellen의 부(Robert Harmon)모(Eunice Harmon)는 경건한 감리교회의 헌신적 신도들이었다. 엘렌의 할아버지는 회중교회 신자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청년 시절에 감독감리교회로 나갔다. 19세기 초엽 미국에서 가장 크고 인기 있는 교회는 감리교회였다. 이 감리교회에서 아버지는 40여 년간 헌신적 활동을 하였다. 1831년-33 사이에 Ellen의 부모는 Portland로 이사하였다. 어머니 Eunice는 Portland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부모가 다니던 교회는 Maine 주 Portland에 소재한 Chestnut Street Methodist Episcopal Church였다. 이 교회에서 Ellen의 언니 Sarah, Mary가 입교하였고 오빠 Robert가 침례 받았다. 오빠가 침례 받은 다음 날부터 아버지 Robert는 동 교회에서 평신도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사고
엘렌의 생애의 3대 사건은 9세 때의 사고, 밀러의 설교를 듣고 결심한 일,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일(?)이었다.
1836년 당시 미국 경제는 경기 후퇴로 사람들이 고생하던 때 이었다. 아버지 Robert는 긴 겨울 동안 만들어 온 모자를 멀리 Georgia주로 팔기 위하여 여러 달 여행 중이었다.
1836년(1837년?) 가을 9세 때 어느 날 오후 (3시경) 학교로부터 쌍둥이 동생 Elizabeth과 다른 급우와 함께 귀가하는 길목(집에서 800m 정도 된 광장에서)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화를 내면서 뒤에서 소리를 치는 아이가 있었다. 부모가 늘 누가 시비 걸면 빨리 집으로 오라고 한 말씀에 따라 엘렌과 엘리자베스는 뛰었다. 달리다가 화가 난 아이와 얼마나 떨어져 있나를 확인하고자 엘렌이 뒤를 돌아보다가 13세 되는 한 성난 소녀가 던진 돌에 얼굴을 맞았다. 엘렌은 그 아이가 던진 돌에 코를 정면으로 맞고 의식을 잃은 채 쓸어졌다. 의식이 잠시 들어 보니 가계에 누워서 온 얼굴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아직도 피가 흘러 옷을 적시고 있었다. 상점 바닥에도 선혈이 낭자하였다. 마침 상점에 들린 한 사람이 엘렌을 불쌍하게 여겨 마차에 태워 집으로 대려다 주겠다고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엘렌은 마차 바닥에 피가 묻을까 보아 사양하였다. 쌍둥이 언니 그리고 급우 그 어느 누구도 엘렌의 상처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였으며 엘렌 자신도 얼마나 자기가 허약하여졌는지도 몰랐다. 엘렌이 일어나 걸으려고 하였으나 현기증으로 땅에 쓸어졌다. 언니와 다른 급우가 부축하여 두 블록 쯤 상거한 집으로 부축하여 데려 갔다(2SG 7).
엘렌은 3주 동안 코마 상태에서 의식이 깜박거리며 사경에서 헤맸다. 어머니 이외 모든 주변 사람들은 엘렌의 죽음이 임박하였다고 보아 장례준비를 서두르라고 하였다. 의사도 살 가망이 없다고 진단하였다. 사경에서 벗어난 엘렌이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니 기형이었고 몸은 해골처럼 여위었다. 코뼈가 함몰되어 숨쉬기도 어려웠다. 조지아주 여행에서 귀가한 아버지가 딸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착하고 명랑하던 딸이 한 달 만에 이 모양이 되다니” 하고 탄식하였다.
엘렌의 회심의 첫1단계--죽음의 병상에서 예수께 굴복
엘렌은 병상에서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이웃 아낙네들이 와서 수의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다. 의사가 왕진하였지만 그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그늘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엘렌은 이 위기의 병상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에 평화를 체험하였다. 죄 용서의 체험이 모든 이웃들에게 임하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1837년 1월 25일 북극광 aurora 가 New England 온 하늘을 수놓을 때 그 붉은 섬광에 눈이 핏빛처럼 보였다. 엘렌의 엄마가 엘렌을 부축하여 창문 쪽으로 옮겨 이 장엄한 광경을 보게 하였을 때 공포감 대신 예수님이 오시는 생각을 하며 기뻐하고 박수를 쳤다.
엘렌의 둘째 단계 회심--칭의와 사죄 체험
3학년도 다 마치지 못한 학업을 계속하고자 여러 번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자기의 처참한 모습을 고민하면서 엘렌은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1836-38년까지 너무 아파서 부정기적으로 학교에 나갔다. 코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기침은 계속되었다. 12세 때 학업을 포기하여야만 했다. 자기에게 돌을 던진 그 급우가 아픈 마음으로 엘렌의 학습을 돕고자 했지만 소용없었다.
자기에게 이 엄청난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관한 것, 그리고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 때문에 오는 좌절감은 그에게 죄책감으로 남게 되었다. 전에 가졌던 마음의 평화는 사라지고 예수님에 대한 확신도 없어져 버린 만성적인 우울증에 빠져 들었다. 엘렌은 자기의 이 반역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에게 자기의 영혼의 고뇌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니는 교회에 소장된 어린이 용 신앙서적들에 나타난 성자들의 고결하고 흠없는 삶을 접하면서 엘렌의 좌절감은 깊어 갔다.
Portland에서의 밀러의 첫 설교 강화들
1840년 3월 11-23일 이 기간 중에 밀러의 Portland에서의 첫 전도집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Portland에서의 밀러의 재림운동 집회는 각 교단을 깨우치는 일에 성공적이었다. 한 번의 집회에 2000명 이상이 운집하였고 그 곳 주민들의 날마다의 대화의 주제는 밀러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 무신론자, 이신론자, 보편구원론자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회심하였다.
좌절의 수렁 중에 있던 12세 소녀 엘렌은 윌리암 밀러의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집회에 어떤 흥분성은 없었지만 엄숙한 기별이 사람들의 심령을 파고들었다. 죄인들은 근심의 자리를 박차고 나오라고 호소하자 12세 소녀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부르심에 응하였다. 그는 이어지는 밀러의 집회에 참석하여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엘렌은 결심자에게 단으로 나오라고 한 전도자의 호소에 응하기도 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심려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지 못하였다.
엘렌의 두려움과 혼란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영적 황홀감을 갈급한 것 때문이었다.
1.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깊은 자각 때문이었다. 엘렌은
하나님의 가납을 받기 위하여서는 선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다.
엘렌은 1841년 8월 또는 9월 초 Maine 주 Buxton에서 개최된 밀러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자기의 모든 노력과 힘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일에 무가치하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동 집회에서 설교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주제를 다루었다. 설교자는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예수께 나오라고 호소하였다.
2. 엘렌은 참으로 구원 받았다면 영적 황홀감을 체험하여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아직도 번민하고 있었다. 단순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후에 체득하였다. “죄인들이 희망에 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믿음을 통하여 오로지 예수님과 연결됨으로써 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이래로 그는 열렬히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고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께 바치기를 힘썼다. “예수님 도와 주세요. 저를 구원하여 주세요.그렇지 않으면 저는 멸망합니다.” “갑자기 내 마음에 무거운 짐이 나를 떠나갔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가벼워 졌다.”(LS 21). 엘렌이 자신의 무력성을 처절하게 느끼면서 간절히 기도하자 그토록 무거운 짐이 떠나갔다. 사죄의 체험, 하나님과의 평화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밤나무거리감독감리교회 목사는 1841년 9월 시침 전 6개월간의 침례 후보자 수련기간을 주었다. 교회는 1842년 5월 23일에 엘렌의 시침을 결의하였다. Miller는 포틀랜드에서 1842년 6월 4-12일까지 일련의 집회를 인도하였으며, 엘렌은 이 집회에서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면서 침례를 앞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받았다. 6월 26일(일) 바람 부는 날 아침 Casco Bay의 차가운 파도 속에서 11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침례받았다. 그가 물에서 나올 때 주의 권능이 자기에게 임재하는 체험을 하였다(LS 145). 그는 그날 오후 밤나무거리 감독 감리교회신자로 입교되었다.
하몬 가족 출교당하다
아버지 하몬은 감리교회에서 존경 받는 신자였다. 하몬 가족이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역대 목사들은 밀러의 설교에 우호적이었다. Cox 수석장로 역시 밀러 지지자였다. 1842년 7월 20일 메인주 감리교회의에서 Cox 장로가 교적을 Orrington으로 전적하는 일을 결의하였다. 그는 밀러파에 밀착하여 일하여 나갔다. 엘렌에게 시침한 목사 John Hobart도 전보 발령을 받았다. 새 목회자는 밀러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843년 2월 6일 하몬의 반 감리교적 활동을 다루는 회의가 소집되었고, 4월 23일 회의에서 하몬의 불규칙적인 교회 출석 문제를 거론 하여 나가던 중 담임 목사가 방문하여 교회에 더 이상 나오지 말라고 통보하였다. 동 감리교회는 7개월간의 우여 곡절 끝에 8월 21일에 하몬의 온 가족들을 출교 처리하였다. 출교 당한 후 상급회의체에 재심을 요구하였지만 역시 묵살되었다.
엘렌의 회심 셋째 단계
엘렌은 1842년 수침 후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거룩함 즉, 성화 문제와 씨름하였다. 자기의 체험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옥불에 대한 두려움에 몰입되기도 하였다. 당시 밀러파는 1843년 3월 21일-1844년 3월 21일 사이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1843년은 엘렌에게 16세 되는 나이였다. 엘렌은 그리스도인으로 도달하지 못한 것에 불만족하여계속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추구하였다(LS 26).
1. 칭의와 성화에 대한 혼란
마음의 거룩함 추구하고 있던 엘렌은 칭의가 무엇인지 성화가 무엇인지 불분명하였다. 설교자들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렵기 만한 상황이었다(LS 149-151). 엘렌은 성화의 “큰 축복”을 받지 못한 것에 고민하였다.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감리교 신도들의 재림에 대한 악신들인 모습은 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2. 죽은 자의 상태와 지옥불에 대한 혼란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죽은 자에 대한 지옥 불의 무섭고 가공스러운 묘사는 엘렌을 두렵게 하였다. 하나님이 심판을 즐기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이 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공중기도를 할 수도 없었다. 절망감에 압도되어 빛도 없이 흑암에 쌓여 3주 동안을 지나기도 하였다. “극도의 절망감에 억눌려 떨면서 밤새도록 꿇어 기도하기도 하였다”(자서, 32).
3. 두 꿈 (LS 32-34)
(1) 성전과 어린양을 뵌 꿈
“큰 성전이 한 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하여 지탱되어 있는데 거기에 갈기갈기 찢겨 피투성이가 된 어린 양이 매여있었다. 거기에 있는 우리들은 이 어린 양이 우리들 때문에 찢기고 상처받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성전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어린 양 앞에 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해야 하였다. 그 어린 양 바로 앞에 높은 좌석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앉아 있었다. 하늘의 빛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는 듯하였고, 그들은 천사들의 노래와 같은 감사의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그 어린양 앞에 나아와서 그들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고 모종의 즐거운 사건을 기쁨으로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었다...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고, 주님의 성령은 내게서 떠나버려서 영영 다시 돌아오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자서, 33).
(2) 예수님을 만나는 꿈
“그분의 아름다운 용모와 인자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보아 그분이 예수님이심에 틀림 없었다. 그분께서 나를 주시하실 때, 나는 그분께서 내 생애의 모든 형편과 나의 속마음과 느낌을 모두 다 잘 알고 계심을 즉시 알아차렸다.
나는 그분의 살피시는 눈을 감당할 수 없어서 주시의 눈초리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그분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나에게로 가까이 오셔서 손을 내 머리에 얹으시고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사랑스러운 음성은 내가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한 행복감에 젖어들게 하였다. 나는 너무 기뻐서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감격에 못이겨 그분의 발 앞에 넓죽 엎드렸다. 거기에 속절없이 누워 있는 동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장면이 내 앞을 스쳐갔다. 나는 천국의 안전과 평화에 도달한 것처럼 느꼈다. 마침내 내게 힘이 되돌아와서 나는 일어났다. 예수님의 사랑스러우신 눈은 아직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분의 미소는 나의 영혼을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그분의 임재는 나에게 거룩한 경건심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불러일으켰다”(자서, 35). 엘렌에게 녹색 줄(믿음의 줄)이 주어졌다.
4. Levi S. Stockman 목사와 인터뷰(상담)
엄마에게 꿈 이야기한 일과 엄마의 스톡맨 목사와의 상담 주선
“ 목사님은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그의 손을 내 머리에 정답게 얹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엘렌, 너는 아직 어린아이인데, 어린 나이로서는 보기드믄 경험을 하고 있구나. 예수님께서 네가 앞으로 어떤 특별한 일을 하도록 준비시키심이 분명하다....목사님은, 내가 비록 어른으로서 그 같은 의혹과 좌절감으로 괴로워한다 할지라도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나에게 희망이 있다고 분명히 말해 주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마음의 번뇌 그 자체가 바로 주님의 영께서 내 속에 역사하시는 좋은 증거라고 하였다. 만일, 죄인이 죄 의식에 대해 마음이 굳어지면, 자신의 죄의 흉악성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가 의롭고 아무런 위험도 없는 것처럼 자만하게 된다고 그는 말하였다.””(자서, 36).
이 상담 결과 엘렌의 신관이 폭군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5. 어느날 한 모녀간의 대화를 어깨 넘어 들으면서 지옥 불 문제가 조건부 멸절론으로 풀리다. 영혼은 불멸적이 아니다는 확신을 하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부활 할 때까지 무덤에서 쉬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6. 성화의 체험과 증거하는 일
당시 감리교도들은 즉각적 성화론(두번째 축복, 은혜의 둘째 사역)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죄한 완전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사랑과 올바른 의도이었다.
“만일 예수님의 미소가 나의 마음을 격려해 준다면,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참고 이행하겠다고 약속하는 기도를 올렸다. 전에 내 마음을 괴롭히던 의무감 곧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가운데서 나의 십자가를 지라는 동일한 의무감이 또다시 내게 떠올랐다. 그러자 즉시 기회가 생겼다. 바로 그날 저녁에 나의 숙부 집에서 기도회가 열렸는데 나는 거기에 참석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을 때에 나도 떨면서 그들과 함께 꿇었다. 몇 사람이 기도를 드린 다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였다. 그 순간, 하나님의 약속은 마치 구하는 자만이 받게 되는 많은 귀한 진주처럼 내게 느껴졌다. 내가 기도할 때에,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무거운 짐과 영혼의 번민은 사라지고 주님의 축복이 부드러운 이슬처럼 내게 내렸다. 나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다. 예수님과 그의 영광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자서,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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