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1888년 대총회 의제

1. 일반 안건들

2. 신학적 주제들--10왕국의 정체, 그리스도의 신성, 죽게 된 상처의 회복, 믿음으로 인한 칭의, 뱀의 지혜 활용 범위, 예정론(RH, Oct. 16, 1888).

 

II. 문제점

 

Jones Waggoner의 당시 설교 내용이 보존되어 있지 않고 있다. EGW의 설교문 중 어떤 것도 마찬가지로 기록 보관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당대에 전달된 내용을 직접적인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Jones1888년 총회에서 믿음의 의에 관한 직접적인 발표를 하지 않았고 웨고너의 주장을 동조 지원하였다. 1888 년이 지나 이어지는 해, 특히 1890년대의 변모된 Waggoner의 사상을 곧 1888 년의 메시지인 것으로 간주하는 접근방식을 경계하여야 한다. Haskell은 교회 내에서 Jones Waggoner 를 우상화시키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1888Mineapolis 회의에서 발표한 믿음의 의에 관한 자료들을 간접적으로 복원하는 방법은 다음 자료들을 추적하여서 가능할 것이다.

1. EGW의 글을 통하여 Waggoner의 입장을 투영하는 방법으로

2. 회의 후 그들이 남긴 타 기록들을 점검하므로(W.C. White이 남긴 노트에 적힌 성경절들 포함)

3. Waggoner의 책 Christ His Righteousness을 통하여 -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고양하고 있다.

4. The EGW 1888 Materials(관련 서한, 설교 수집 포함), The 1888 General Conference Bulletin

5. SC, DA, COL, MB, MH(그리스도에 관한 장)

 

III. EGWWaggoner/Jones 사상의 차이점

 

EGWWaggoner/Jones가 전한 기별을 극구 칭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모든 사상을 다 동의한 것이 아니다. EGW1888년의 W/J의 기별을 인정한 것이지 1890년대 의 그들의 이론을 엄호한 것이 아니다. 특히 기독론적 차이점이 컸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로부터 파생하였다는 것이나 예수께서는 죄를 범하실 수 없었다는 1889-1890년대의 웨고너의 주장은 EGW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구원에는 조건이 없다고 한 W/J에 대하여 EGW은 성경에는 조건들이 충만하다고 반박하였다.

1. EGWWaggoner-Jones 인정한 것은 전적으로 1888년도의 신학적 발전에 국한된다. EGW1890년대의 그들의 신학적 이론의 변모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1890년대 EGWW/J에 관한 언급은 1888년 배경에서 이였다.

 

2. EGW은 칭의에 관한 W/J의 설교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선물로서 받는 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점에 서 극구 칭찬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관점에서의 EGW의 칭찬을 W/J의 신학 내용에 대한 배서로 오해하는 것을 피하여야 한다.

 

3. W/J는 칭의를 과거 죄에 대한 용서로, 성화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권능이란 차원에서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EGW은 칭의를 평생 과업으로 강조하였다. 이것이 W/J에게는 결여 되어있다. EGWChrist Our Righteousness” 원고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범주에 칭의와 성화를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칭의와 성화를 정의하고 그 두 사이를 분별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4. EGW은 성화와 개인적 거룩성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묘사하는 일에 있어서는 W/J와 노선을 같이 하였다.

EGW은 구원개념의 기초를 그리스도의 의롭게 하는 의(justifying righteousness)의 공로에 놓았다. 그러나 W/J은 구원을 흠이 없는 상태, 심판시 율법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모본에 연결되느냐 여부에 두었다.

 

5. EGW은 그들처럼 은총의 낙관론에 섰으나 금생에 있어서 무죄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EGW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후대의 W/J의 유토피아적, 도덕주의적 낙관론을 따르지 않았다. EGW이 강조한 것은 도덕적 영적 전진의 역동적 가능성과 그 필요성이었다.

 

(1) W/J - 복음의 진수는 새 christs의 창조, 즉 새 화육들이다. 예수는 자신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실적으로 도달한 범위 안에 자신을 두었다.

(2) EGW - 그리스도의 모본을 닮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신이 되는 것 아니다. 품성 완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시범된 율법의 완전이 아니다. 자장 훌륭한 성도라도 인간본성에 오염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받아질 수 없다.

 

6. EGWW/J사이에 최대의 차이점은 EGW이 성화를 그리스도의 가리워 주는 의의 간구(중보)하에 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EGW은 많은 진술을 하였다. W/J와는 판이하게 EGW은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면서 보통 인간이 가진 타락 부패한 정욕적 본성을 갖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W/J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타락성을 가진 까닭에 인간의 타락성을 심각하게 생각치 않았다.

 

7. EGW에서 있어서 두 가지 완전의 표준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나오고 있다. 하나는 칭의에 있어서 법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화에 있어서 체험적인 것이다. EGW은 칭의를 다루면서 그리스도 자신의 품성의 완전성만이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성화를 다룰 때는 인간의 성화된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율법의 준수와 의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W/J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8. EGWW/J가 설교한 즉각적 성화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회개한 죄인이라도 일생동안 죄와의 투쟁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EGW에게는 품성완전이란 노력과 미래의 문제였다. W/J는 완전에 즉각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성장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EGW은 대부분 완전에의 성장이란 개념에 국한시키고 있다.

EGWW/J의 정적(靜寂)주의(quietism)를 배격하였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성화케 하는 능력이 아주 중요하지만, EGW는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협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점은 W의 초기 사상과 상통한다. 그러나 EGW은 성화를 하나님의 범신론적 내주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새 incarnation교리를 따르지 않는다.

 

9. W/J은 성경을 조직적으로 접근한다. EGW은 실용적 접근을 한다. EGW은 신학적이라기 보다 체험적인 면에서 접근한다. Luther처럼 영적 필요성에 주 관심을 둔 것이다. 따라서 교리적 명료성이 EGW의 종국적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실존적 반응를 중시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진술에는 역설적인 것과 긴장이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루터도 그러하였다. W/J는 체계적이어서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

 

IV. 1888년 믿음의 의 메시지 개관

A. 엘렌 화잇의 1888년 전후한 가르침의 요약

1.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을 요구하신다.

2. 죄인이 되는 우리는 그 완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의 형벌을 지불하셨으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되심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그 분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삶을 그의 완전하신 삶으로 대체코자 드리신다(직설법).

4.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복음적 협동 정신이 수반되어 그 분께 순종할 태세가 되어야 한다(명령법).

5.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코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보신다.

6. 칭의의 순간 죄인에게 새 마음이 주어진다.

7.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자기의 의를 분여하신다.

8. 그리스도인들은 평생토록 마귀와의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한다. 때때로 부지중에 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 실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9. 위로부터 오는 거룩한 도우심에 전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 의지하면 죄를 짓지 않는 삶은 가능하다. 어떤 신자들은 사실상 그런 삶을 살아 왔다.

 

B. TM 91-93에 압축된 EGW의 믿음의 의의 기별의 요점들

 

여기에는 높임을 받으신 구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그리스도와 계명들에 향한 순종의 관계, 재림신도들이 예수에게 초점을 집중하여야 할 필요성, 세천사의 기별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기별, 대속적 희생의 공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하늘 성소에서의 대제사장의 중보, 완전히 조화된 율법과 복음의 전파 등이 나와 있다.

 

2. 1888년의 메시지는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다.

(1)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은 죄인일 뿐이다. 인간은 그 마음의 생각과 외적 행동에 있어서 반역자, 하나님과의 소원(疏遠)관계에 있다. 온 몸과 마음은 병들어 있고 그 의는 헌 누더기 옷 입을 것과 같다.

하나님과 소원하여진 인간은 인간 상호간에도 소원하여지고 타락치 않은 세계와도 소원하여졌다. 그런데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먼저 찾으시고 구원의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이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주도권의 전재과정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죄용서의 메시지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그 독특한 절정을 이루고 있다.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를 입혀주신다. 하나님이 되시며 동시에 인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좋은 소식을 구원의 소식을 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신다. 죄용서는 완전한 것이다. 이 죄 용서는 결코 가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책(罪責)을 제거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

이 용서의 결과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3) 죄에 대한 승리의 메시지다.

죄용서 다음단계에 오는 것은 대속자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 - 구원의 보증을 받은 신자는 죄에 대한 승리를 예수 모델, 죄를 승리케 하시는 분으로부터 배운다. 죄에 대한 승리를 할수 있다.

 

3. 죄에 대한 승리의 방책

(1) 그리스도 모델을 보라

그는 완전한 인성의 육신을 쓰셨다. 그분은 육신을 따라나신 다윗의 자손이다. 다윗은 인간의 죄된 본성도 가졌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죄된 육신을 쓰신 즉,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이 연약하고 죄된 육신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신 것은 거룩한 권능이 그 분 안에 상주하셨기 때문이다.

승리한 대장 알렉산더 병사는 패배를 몰랐다. 대장을 승리의 화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으로 우리 주님은 영적/육적 싸움에서 승리의 화신이셨다.

 

(2)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권능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다.

신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믿음에 입각하여 그 심령에 그리스도가 내주할 때 우리 안에 신성의 충만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할수 있게 된다.

 

(3) 의지를 그리스도께 굴복하고, 우리의 사상, 관심, 안목을 예수께 고착시켜라.

하나님과 그 권능에 사로잡혀서 영원한 승리의 대장 예수 안에서 실패가 있을 수 없다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확신은 시험과 곤경에 빠질수 없다.

) 여호사밧의 승리를 보라(대하 20)

시험받은 순간에는 신도들은 여호사밧에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의 손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인간의 힘으로 사단을 패배시킬수 없다. 성령 충만하고 예수께 눈을 고착시킨 사람은 죄에서 승리할 수 있다. 사단보다 더 강한 분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4) 죄에 대한 숭리는 성소진리에 함축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늘성소에서 인간의 죄를 정결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하늘성소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자기 영혼의 성전을 모든 죄와 부정에서 정결케 하여야 한다. 그분이 하늘성소에서 정화사업을 하고 있을 때 지상에 있는 우리는 우리의 영혼성전 으로부터 영적, 도덕적 더러움을 정결케 하여야 한다.

4. 믿음의 의의 메시지는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 (14:12)

 

V. 결론

 

1. 1888 대총회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도 우리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신앙을 한다하면서 겉도는 신앙 험담 불평하는 신앙 참된 진리를 가졌으면서도 냉냉한 신앙, 지식적 승인정도의 신앙, 더 나아가서 보수 정통에 향한 집념이 바위 처럼 강하지만 용광로 같은 사랑으로 끓는 가슴이 없는 머리만의 신앙 이야기는 오늘의 나와 너의 경험이다. 장로와 목사의 경험, 대총회와 합회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성서적이고도 역사적인 명확한 진리를 주장하면서도 다소 시대 감각에 더디고 성서진리를 아는 면이 약한 신앙 노장 선구자들에게 버릇없이 대할 수 있다. 젊은이들의 해대는 풍조에 이마를 찌뿌린 노장들은 버릇없는 젊은이들에게 권위주의적 위압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신앙과 생황의 괴리현상으로 신자와 신자간의 반목 부화의 담은 더 높아갈 수 있다. 지나간 날의 경험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지난날의 거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찾아 우리 생활 가운데 투입시켜야 한다.

 

2. 우리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믿음의 의에 관한 진리는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그분의 용서의 은총 속에 지난날을 묻고 새 피조물이 되어야한다. 죄에 대하여 승리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여기 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장에의 부르심이다. 여기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을 하는 경험, 불타는 경험, 기도와 말씀강론, 찬미, 명상 다정한 친구와 나누는 정감 속에서 지난날 하셨던 헌신을 새롭게 하는 기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내주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여야 하는 기간이다. 십자가 은총 아래서 우리의 의지를 묶어 바치고 그분의 정결케 하는 권능으로 새로워지는 경험 헌신의 경험이 밀물처럼 함께 하여야 한다. 이일을 위하여 기도하자 부르짖자 통회하자.

 

VI. TM 91-93 내용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기별

주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푸셔서 와그너와 존스 목사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에게 지극히 소중한 기별을 보내셨다. * 이 기별은 들리움을 받으신 구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희생 제물에 관한 소식을 세상을 향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것은 보증물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초청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야에서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분의 거룩한 인격, 공로, 인간 가족들에게 행하신 변함없는 사랑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권세가 그분께 주어졌으므로 그분은 인간들에게 풍성한 은사를 나누어 주시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분 자신의 의를 속절없는 인간 대리자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전파하도록 명하신 기별이다. 이것은 셋째 천사의 기별이며, 이 기별은 큰소리로 전파되고, 크나큰 성령의 부어지심이 수반될 것이다.

들림을 받으신 구주께서는 값없는 언약의 축복 즉, 그분을 믿는 모든 영혼을 위하여 얻으시려고 죽으신 유익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보좌에 앉으신,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그분의 효험 있는 사업 가운데서 나타나야 한다. 요한은 그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 깊고, 너무 넓었다. 요한은 인간 가족들을 향하여 그것을 쳐다보라고 호소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교회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며, 그분의 생명의 피로 구속의 값을 치르어 주신 이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아무리 세기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갈지라도 이 대속하는 희생의 효력은 결코 줄어들 수 없다. 그분의 은총의 복음 기별은 교회를 향해 분명하고도 명백한 모습으로 제시되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 세상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율법, 율법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가르치거나 믿지 않는다는 말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은 생동감 있게, 능력 있게 백성들에게 제시되어야 했는데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그 공로를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향기로운 향연이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있는 동안에 대제사장이 속죄소 위에 따뜻한 피를 뿌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의 효력을 간구할 때, 우리 기도는 우리 구주의 품성의 공로의 향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시인한 모든 죄를 그분은 제거하신다. 이러한 믿음이 교회의 생명이다. 광야에서 모세에 의하여 뱀이 들려지고, 불뱀에게 물린 모든 이들에게 쳐다보고 살라는 명령이 내렸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져야만 했으니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