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두 상반되는 메시지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 서로 엇갈리는 메시지가 나온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알리는 메시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런 메시지를 증거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눅 21:32). “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이런 임박성의 메시지는 그 외에도 숱하게 많이 나온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는 어떤 일들이 선행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상당한 시간대가 개입되어 있을 것을 예기케 하는 메시지들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 24:4-7).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2-3).
관련 두 종말론 이론들과 그 수렴론
이 두 상반되는 듯 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두고 학자들은 씨름하여 왔다. 더구나 1900여년이라는 긴 시간대가 흘러간 20세기 초엽에는 이 이슈가 논쟁점이 되기도 했다.
종교사학파에 속하는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1863∼1914)는 "그의 저서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1892)는 종래의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론을 거부하고, 신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자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 건설의 임박성의 메시지(설교)를 두고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은 현재적이며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이며 미래적이고 묵시적이라고 펼쳤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사역 초기 시점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종말이 임박했다고 하였지만 후기에는 어떤 환경적 압력 여건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연기 되어 자신의 죽음 이전에는 오지 않으며, 그의 죽음이 하나님나라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보았다.(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Fortress, 1971), 73, 85, 86).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6)는 바이스의 예수 설교 중심의 이론 전개를 넘어서 더욱 철저한 일관성을 추구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체를 그의 종말론적 신념과의 관계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이론을 바이스의 견해와 구별하기 위해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견해를 그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06)에서 제시했다. 그의 사상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천국과 그의 재림에 있 그 도래가 매우 가까이 왔다고 보았다. 둘째,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개념은 유대 묵시문학으로부터 유래했다. 셋째,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시기에 대해 오해했으며, 그의 종말론적 기대는 환상에 그치고 말았다. 예수는 제자들의 전도 여행이 완료되기 전에, 인자(the Son of Man)가 임하시고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리라고 믿었다9마 10:23). 그러나 제자들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가 착각했으며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것은 끝내 오지 않았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초기 메시아의 초자연적 도래의 예기가 변질되어 인자의 파루시아로 보았다. 마 10:23의 약속 불성취에 좌절되어 파루시아의 첫 연기가 있은 이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파루시아가 일어나지 않은 파루시아의 지연이라는 현상이 지속되므로 비종말화의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바이스나 슈바이처의 종말론은 일종의 좌절된 종말론(frustrated eschatology)이다.
찰스 다드(Charles Harold Dodd, 1884-1973)이 종말론을 예수의 교훈의 중요한 주제로 본 것은 슈바이처와 유사하지만 하나님나라를 미래적인 것이 아닌 현재적인 것으로 주장한 것은 슈바이처와 전혀 다르다. 그는 예수의 초림과 함께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었다고 하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제시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것이 아닌 현재적 경험의 문제로 취급했다.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그의 선언은 복음서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신약 기자들 역시 마지막 때가 이미 온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가 하늘로부터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나(눅 10:18),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씀이나(요3:18∼19),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소유했다는 구절(요5:24) 등이 이를 입증한다.
포스(Geerhardus Vos)와 래드(George Ladd)는 위의 철저적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을 어느 면 수렴하여 ‘이미(already)’와 ‘아직도 아니(not yet)’라는 종말론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적이 되었지만 아직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30년에 포스는 [바울의 종말론]에서 도래할 세계는 원칙적으로 이미 실현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파루시아까지 ‘이 시대나 세계와 오버랩 되어 있다고 한다. 래드는 [신약성서 신학]에서 예수 선교의 핵심은 악의 권세와의 투쟁이었으며 하나님나라가 사탄의 나라를 정복해 가는데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예수의 죽음은 사탄의 행위이자 동시에 예수께서 사탄에게 승리한 행위가 된다. 그리하여 예수의 부활과 파루시아 사이에는 두 시대가 중첩되어 있는 시간대가 된다.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
엘렌 화잇은 1888년에 하나님 나라가 은혜의 나라와 영광의 나라의 이중성을 펼쳤다. 은혜의 왕국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고 선포한 메시지에 나오는 왕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립되었다. 이 은혜의 나라는 거룩한 은혜의 사역으로 인간의 심령 안에 세워진다.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 그들의 기별이었다. “때가”차게 되자, 곧 다니엘서 9장의 69주일이 끝나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야가 올 기약이 찼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웠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건설되었다”(쟁투, 346-347). 그리하여 하나님 백성들은 이 세상에 거주하고 있어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존재들이다(요 17:16).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엡 2:6)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는”(히 6:4) 축복을 받는다.
영광의 왕국은 아직 수립되지 않은 것으로 미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세워지는 나라이다(마 25:31, 32). 이 나라는 예수께서 하늘 성소에서 중보자로서의 봉사를 마치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실 것인데” 그것은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한 그 나라이다(눅 1:32, 33)”(쟁투, 416).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재림하시기 전에는 이 나라는 도래하지 않는다. 이 영광의 나라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할 때 오른편 양에게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1-34).는 그 나라이다. 이 영광의 나라가 언제 도래 할 것인지에 관하여는 오직 아버지께서만 그 날과 그 시를 아신다(마 24:36)..
은혜의 나라가 다니엘 9:24-27까지의 70 이레의 마지막 한 주일 중간에 이루어져 지연이 안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고 이 영광의 나라 성취가 지연될 수 있을 것인가?
재림과 왕국 지연의 딜레마
성경에는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약 1:17)고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고 한다. 또한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으시다”(욥 42:2). 엘렌 화잇은 “그러나 별들이 정해진 길을 따라 광대한 궤도를 운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경륜은 조급하거나 지체(delay)하는 법이 없다”(소망, 31-32)고 한다.
반면에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이 함축된 메시지들도 나온다. 예컨대, 이 지연은 10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delay) 다 졸며 잘새”(마 25:5)와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주의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의 메시지에 함축되어 있다. 엘렌 화잇은 “불법의 비밀”, 멸망의 아들, “불법한 자”라는 칭호를 가진 “불법의 사람”은 예언에 기록된 바와 같이 1260년 동안 최상권(最上權)을 잡은 교황권을 가리키고 있으며 1260년의 기간이 서기 1798년에 마치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기간 이전에 있을 수 없었다”(쟁투, 356)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지연의 이유를 하나님의 자비성과 하나님 백성의 책무 불이행에서 찾고 있다.
“흑암이 덮인 긴 밤은 괴로운 것이지만 새벽은 자비롭게 지체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실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준비되지 못한 상태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오래 지체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멸망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2T 194).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의 기별을 전하므로 당신의 목적이 성취되었을 것 같으면 그리스도께서는 벌써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영접되었을 것이다” (6T 450).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 그 자체는 무조건적이지만 그 시기는 자기 백성의 천국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시켜야 되는 책무의 조건성을 달고 있다(마 24:14; 계 14:6-7). 혹자는 이른바 추수 원리를 적용시켜 하나님 백성들이 무죄한 완전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중심 조건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주장자들은 더글러스(Herbert E. Douglass)와 맥스웰(C. Mervyn Maxwell)로 “완전: 불가능의 가능성(Perfection: The Impossible Possibility)에 그들의 사상이 잘 나와 있다.
이러한 인간적 관점에서보다도 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지연이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왈렌캄프(Arnold V. Wallenkampf)는 The Apparent Delay에서 “인간의 빈둥거림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재림을 연기하여야 했다. 인간이 그 분의 예지성과 전지성을 한 방에 탈취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하므로 하나님의 전지성을 인간의 수준으로 격하시켜 버렸다”고 한다(p. 91, 92). 빌로소(Mario Veloso)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오실 시간을 설정하셨다면 지연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은 이상 지연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There Is No Delay,” Ministry, December 1996). 엘렌 화잇의 두 시각의 긴장관계를 수렴하여 네알(Ralph Neall)은 박사학위 논문(The Nearness and Delay of the Parousia in the Writings of Ellen G. White)에서 하나님 편에서는 마지막 때가 설정되어 있지만, 인간적 관점에서 지연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는 엘렌 화잇의 저술에는 주께서 곧 오실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세 천사의 메시지 선포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보는 사상이 차 있는 것으로 본다.
주의 오심의 박두와 지연 사이의 긴장 이슈를 안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이 엉킨 사안을 풀어 갈 수는 없는가?
하나님의 예지
이 사안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적 예지 사이에 상호 작용은 결정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가 원인이 된다고 신봉하는 입장에서는 통상적으로 이중 예정론을 수용한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은 있을 수 없다고 보아 배격한다.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예지는 원인이 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할 여지를 남겨 두어 인간의 미래 결정을 사실상 알고 계신다는 것을 배격하고 오로지 그 가능성만을 아실뿐이라고 한다(Clark Pinnock, et. al., The Openness of God: A Biblical Challenge to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God, 32).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예지성이 절대적이지만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에 동의한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 여지가 있게 된다.
슈반테스(Siegfried J. Schwantes)에 따르면 성서의 역사관은 우연한 결정론이 개인의 책임성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보아 이를 배격한다 (The Biblical Meaning of History, 32).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기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교호작용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집 때문에 또한 때때로 인간이 회개한 때문에 당신의 계획의 세부사항을 수정하여 나가신다. 그 예증은 홍수 사건에서(창 6:1-8) 그리고 니느웨 거민들의 회개 사건에서(욘 3장)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지역적, 일시적 조정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좌절시킬 수는 없다(참고, 단 4:32).
하나님의 예지가 절대적이지만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사상은 자유로운 행위가 예지되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예지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실천적 시각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구원 받을 것인지 아니면 잃어버림을 당할 것인지를 아신다. 심지어는 나라고 하는 인간은 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존재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를 아신다. 심지어는 그 사건이 일어날 때 최소한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행위와 동작에 매여 있다 하여도 그렇다. 그러므로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맺는 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여러 신약성경 본문들 사이에 있는 긴장관계는 현재적 은혜의 왕국과 미래적 영광의 왕국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이미’와 ‘아직도 아니’라는 도식으로 이해 조화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을 아신다는 것과 재림 사건의 지연 사이의 긴장관계는 하나님의 예지가 절대적이지만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시성(일치성)을 지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 긴장관계에 관하여서는 그리스도께서 오는 세상에서 설명해 주실 때까지는 인간의 죄된 본성으로 완전히 이해 할 수 없는 한계점도 있다. 그래서 주께서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하셨을 것이다. 엘렌 화잇은 이에 관한 이해를 돕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들을 주고 있다.
“유능한 사람들은 평생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을 탐구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충분히 탐구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어떤 성경절들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설명해 주시기 전에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경에는 풀 수 없는 오묘와 사람의 생각과는 서로 일치되지 않는 말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는 논의하지 말아야 할 이 문제들에 관하여 논쟁을 일으키고자 한다”(복음, 312).
“지상 봉사의 끝이 가까웠을 때에 그분은 당신의 개인적 지도 없이 그 사업을 제자들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깨달으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그들을 격려하고 미래를 위해 준비시키고자 힘쓰셨다. 그분은 그들을 거짓된 희망으로 속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열린 책을 보듯이 장차 있을 일을 아셨다. 그분은 그들과 헤어져 양을 이리 가운데 버려두는 것처럼 그들을 남겨 두고 가야 할 것을 아셨다”(행적, 21).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백성들이 듣는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홀로 감람산에 계실 때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가 예수님께 나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당신의 재림의 큰 날을 따로 분리하여 제자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 두 사건을 섞어서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께서 당신께서 보신 대로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셨다면 그들은 그 광경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분은 두 큰 위기를 섞어서 설명하시고 제자들이 스스로 그 뜻을 연구하도록 하셨다”(소망, 627-628)
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은 세계의 종말론과 개인적 삶의 종말론 사이에 건실한 대화를 하게 하는 닻이 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43). 충성스러운 종은 주인이 곧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지만(마 24:43-47), 악한 종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믿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마 24:48-51).
(이 글은 2015년 7-8월호 Ministry지에 게재된 Alberto R. Timm 박사의 "Longing for His Appearing"을 편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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