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영감에 관한 이해 방향
성서 영감에 관한 이해 방향
I. 계시와 영감
계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나 진리를 보여주신 것을 두고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 반면, 영감은 진리의 기록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는 표현이다. 통상적으로 예언자는 계시 받은 내용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 선행적인 계시가 있고 영감은 후행한다. 그러나 영감이 수반되지 않는 계시가 있을 수 있다. 7 우뢰 내용을 기록하지 말라는 것은 이 경우에 해당한다(계 10:3-4). 현장 목격자나 증인으로서 기록한 경우나 누가처럼 많은 문헌 기록을 조사 연구한 후에 기록한 경우에는 성서 기자는 계시 없이 영감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문자로 전달하고 있다.
II. 영감의 의미
영감은 성령의 감동을 뜻한다(벧후 1:21).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theopneustos)(딤후 3:16)으로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사람의 코에 불어 넣은 것에서처럼(창 2:7), 하나님의 감동은 하나님이 불어 넣은 것(God-breathed)을 의미한다.
III. 성경 영감에 관한 텍스트
성경에는 영감의 의미를 전달하는 두 개의 텍스트가 나온다. 그 하나는 디모데후서 3:16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후서 1:21이다. 이 두 성경절들은 하나님이 모든 성경의 저자가 되심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A. 디모데후서 3:16
1. 본문
pa'sa grafh; qeovpneusto" kai; wjfevlimo" pro;" didaskalivan,
pro;" ejlegmovn, pro;" ejpanovrqwsin, pro;" paideivan th;n ejn dikaiosuvnh/,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KJV)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NIV)
2. 대립적인 두 가지 번역
(1) 서술적 용법에 따른 번역--NASB, KJV, NKJV, NIV, RSV, Jerusalem, NAS-->“모든 성경”을 주부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을 술부로 보는 번역이다.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17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profitable for...
theospneustos(theos + pneo)--> 준동사 수동태, 서술적 형용사 용법으로 본다. 이런 번역 사례를 고린도후서10:10의 bareiai (are weighty)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kαί 를 “그리고(and)”로 번역한다.
(2) 제한적 용법에 따른 번역--NEB, Vulgate, ASV -->성경 기원에 역점을 둔 번역이다.
"Theospneustos"를 “모든 성경”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보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으로 번역한다.
“All God's breathed Scriptures are even profitable for...”
이 경우 kαί를 even, also의 의미로 번역한다. 이런 형용사적 번역의 사례는 디모데전서 4:4 ("because every creation of God is good")에 나타난다.
그러나 문제점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이 되어 성경에는 영감된 부분과 영감 안 된 부분이 있게 된다는데 있다.
3. 디모데 후서 3:16은 서술적 용법에 따라 이해하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theospneustos), 즉, 하나님께서 창조의 숨결을 불어 넣으신 작품이다. 그래서 성경이 권위를 지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
B. 베드로후서 1:21
1. 본문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For the prophecy came not in old ti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a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KJV)
For prophecy never had its origin in the will of man, but men spoke from God as they were carried along by the Holy Spirit. (NIV)
ouj ga;r qelhvmati ajnqrwvpou hjnevcqh profhteiva potev, ajlla;
uJpo; pneuvmato" aJgivou ferovmenoi ejlavlhsan ajpo; qeou' a[nqrwpoi.
ferovmenoi는 fevrw (운반하다, 견디다, 데려 오다, 움직이다, 지도하다 등)의 수동태
분사형이다.
2. 본문이 함축하고 있는 주요점들
본문에 따르면 성경은 하늘에서 직접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인간 도구를 통하여 온 것이다. 즉, 인간이 영감을 받았다는 점에 그 주안점이 있다. 그러나 예언은 예언자의 개인적인 “뜻(thēlema)”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예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다. 19절에서 “더 확실한 예언의”이라고 한 점에 비추어 예언의 신뢰성을 못 박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한다. 예언자나 다른 누구라도 성경의 예언에 대하여 사적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는 성경 기자들의 자유를 축약시키지 않았으며, 그들의 인격을 억압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개성을 빼앗지도 않았다. 오히려 때로는 성경기자의 연구를 수용하기도 했고(눅 1:1-3), 그들의 경험이나 문학적 다양한 스타일을 인정하고, 같은 진리나 사건들의 다른 차원이나 국면을 부각시키도록 하였다. 성령께서는 인간 도구들에게 이런 다양한 면모들을 통하여 거룩한 진리의 사상을 고취시키고 성경기자가 자기들에게 계시된 신적 진리 내용을 잘 기록할 수 있도록 적절한 어휘 선택을 하는 일에 도왔다.
IV. 영감에 대한 역사적 고찰 개요
유교, 불교 등 이교 종교가들은 시적 영감성 이상의 영감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외적인 계시를 시사하여 코란경이 천사장 가브리엘의 口授 에 따라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Philo, Josephus, 초기 랍비들은 성경의 축자영감론을 신봉하였다. Philo는 이교도들의 엑스타시 사상을 도입하여 영감 받은 기자의 개성은 억압되어 순전히 수동적이라고 하였다. 즉 성경 기자 자신의 이성적 활동을 배척하고 하나님의 영이 기자 안에 들어가 인간 음성 기관에 작용하여 예언할 것을 분명하게 선언케 한다고 보았다.
초기 교부들 역시 상기 유대인의 영감관에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여 인간 의식의 억압론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Athenagoras는 영감 행위를 플룻 연주자가 음정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부들은 몬타니즘을 극복하면서 영감에 관한 극단적 견해를 탈피하여 조화된 입장을 취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영감에 관한 확신은 강하였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은 성경 어떤 책들의 경전적 권위를 무시하였다. 루터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계시록을 antilegomena 범주에 포함시켰다. 칼뱅은 베드로후서의 베드로 저작성을 의심하였으며 요한계시록의 주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영감성에서 보다는 경전성 관념에 집착하였다. 루터는 경전성 판별 표준을 그리스도와 구원의 사상에 두어 그리스도가 들어 있지 않는 책은 성 베드로나 성 바울이 가르쳤다 하여도 사도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보았다.
V. 영감에 관한 제 학설들
A. 직각설(The intuition theory)
1. 자연적 영감설(Natural inspiration)의 입장에서 영감을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진리에 관한 우월한 (고도의) 직각력, 통찰력 정도로 본다. 그래서 성경 기자의 영감을 문호 섹스피어 정도의 천재적인 영감성 정도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본다. 성경 기자들을 종교적 천재들로 부각한다.
2. 주장자들--좌파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 입장에서 성경 영감론을 펼치고 있다. 펠라기우스와 유니태리안 교도들도 이런 영감관에 서 있다.
3. 비평--이 직각설에는 인간을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에서 보다는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인본주의적 관념이 깔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통찰력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통찰력을 지도하고 감독한다. 이 견해는 진리에 관한 인간의 자연적 통찰력이란 초자연적 지혜의 감독이 없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순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B. 조명설(The illumination theory)
1. 조명설은 영감을 성서 기자의 종교적 인식을 강화(intensification) 시키는 것으로 본다. 영감 받은 것은 기록한 저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서 기자는 보통 신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조명 정도 보다 더 높은 조명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여 영적 사물에 관한 그의 민감도 내지 감지도가 증폭되어 정상적인 능력이 고도로 강화된다. 조명설에 있어서는 특별한 진리의 교류에 역점을 두고 있지 않다. 요컨대, Achtemeier가 지적한 것처럼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며 성령께서 기자의 내적 의식을 강화시킨다고 한다. 직각설과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리스도인에게 국한 시킨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절대의존의 감정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에서처럼 신 의식에 의존하는 이라는 것에서 영감을 이해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시각은 성경의 현상들, 수많은 정보들 단편들로 시작하여 고대 책에 신적 진리가 없었지만 공동체 안에 성령의 계속되는 역사를 인정한다. 여기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객관적인 진리보다는 신 의식의 진정성 같은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예수는 인간적으로 이러한 신 인식의 원형이 된다고 본다. 예수의 인간성의 위대함에 역점을 둔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성경의 불일치하는 본문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주장자들--주로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한다. 슐라이에르마허, Neander, Cremer, Coleridge, F.W. Robertson, J.F. Clarke 등
3. 비평--이 조명설은 성서 기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벧후 1:21)는 점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지만,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 받았다고 한 것을(딤후 3:16) 간과 내지 무시하고 있다. 또한 계시 영감에 있어서 진리의 전달보다는 진리의 이해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시 된다. 성경에는 하나님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영감성 정도(degree)의 차이를 설정하는 부분적 영감론(partial inspiration)으로의 문호를 열어 두고 있다. 특히 개신교도들이 한 때 이 견해를 RC의 전승의 비신뢰성 이론의 토대로 삼았다.
C. 구수설(The dictation theory)
1. 성서 기자는 마음과 몸에 대한 성령의 전적인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펜촉 역할을 한다. 이 구수설은 하나님 말씀을 기계적으로 기록한다는 일종의 기계론적 영감론(mechanical theory of inspiration)이다. 인간(penman) 영감론을 배척하고 영감을 기록에만 국한시킨다. 성서 기자는 일종의 녹음기 역할을 할 뿐이다. 이 입장에서는 성경 문체와 문법도 성령의 문체와 문법으로 인식한다.
2. 주장자들--고대 유대인들, 종교개혁 이후의 많은 프로테스탄트
3. 비평--성경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출 3:4; 단 4:31; 계 1:10-11, 19:9). 그러나 이런 방식의 영감론으로 성경 영감성 전부를 다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공관복음서 내에 나타난 각 기자의 문체의 차이점, 모세, 다윗,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의 글에 나오는 문체의 차이점 등을 무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까지라도 구수 대상으로 보아야 하는 문제점도 있다.
D. 축자영감론(The verbal inspiration)
1. 구수설과 마찬가지로 기계론적 영감론이지만, 구수설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발전시킨 것이 이 축자영감론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하고 인간적 요소를 극소화시킨다. Bernard Ramm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닐과 기록하는 일에 어떻게 개입하신지를 전개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16에서 하나님의 감동을 문자 그대로 God-breathed(RSV)로 이해하고,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한 말씀에 역점을 둔다. 구수된 것이 성경에 나오긴 하지만, 성령께서 성서 기자의 개성을 침해하지 않고 지도 감독한다고 본다. 라틴어에서 verbum은 말씀(word, logos)를 뜻한다. 영감론의 초점을 말씀에 두고 인간에게 두고 있지 않다. 즉, 인간 영감론을 배척하고 성경의 단어 하나가 (축자적으로) 영감되었다고 본다. 축자영감론은 계몽주의의 여파로 인한 자유주의적 영감론에 대항하는 이론 역할을 하였다. 이 축자영감론은 원전 무오론을 강조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론 입장에서 종교개혁자들의 sola scriptura 원리를 강조하고 성경의 예언적 모델을 신봉하고 있다.
2. 이론적 근거--1) 축자영감론은 원전무오론과 다음 연역추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이다.
하나님은 결코 과오의 저자가 아니다.
고로 성경에는 에러가 없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하나님 안에는 에러가 없다.
고로 성경에는 에러가 없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하나님은 성경의 원천이 되신다.
고로 성경은 역시 진리어야 한다.
2) 성경 무오론이 옳지 않다면 성경의 권위성이 실추된다.
2. 주장자들--Robert Haldane, Plymouth Brethren, Charles Hodge, B.B. Warfield, Machen,
Carl F.H. Henry, Francis Schaeffer
3. 비평
1) 성경의 인간적 요소를 무시 또는 간과하고 있다.
2) 성경에 대한 왜곡된 주장이나 확신을 주지 못하는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3) 성경에 나오고 있지 않다.
4) 성경에는 사소한 불일치(discrepancy) 현상이 나오고 있다.
다윗이 이새의 여덟 째 아들인가(삼상 16:10-11), 일곱 번째 아들인가(대상 2:15)?
베드로의 3회 부인 사건에 대한 복음서 기술상의 사소한 차이점
십자가상의 죄패 내용에 관한 각 복음서 간의 차이점
토기장이의 밭 값 출처 문제 마 27:9-10 <--> 슥 11:13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막 2:26) <--> “ 제사장 아히멜렉”(삼상 21:1), 제사장 실권 행사 문제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레 11:6) --> 생물학적 문제, 토끼의 정체 문제
등등
5) 문체와 개성의 차이
6) 신약성경의 구약성경 변형적 인용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 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 을 예비할 것이요 ”
마 3:3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 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4. Inerrancy 문제
Carl F. H. Henry나 Francis Schaeffer는 성경 무오론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광의적 의미는 큰 문제 거리가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성경무오성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신뢰성을 뜻하는 말로 이해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무오론 은 다수의 보수적 복음주의 노선에서는 매우 심각한 이슈가 될 뿐만 아니라, 신학적 쟁점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성경무오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한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여타의 모든 기록들도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도미노이론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도미노 이론 근저에는 성경의 권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도 들어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하나님과 속죄에 관련된 사항은 인간의 경험론적인 방법으로는 그 진위를 밝힐 수 없다고 본다.
무오론자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연역추리를 빌려 그 당위성을 세우고 있다. 성경무오론은 어디까지나 원전에서의 무오이지 전사, 필사 내지 출판과정에서의 무오를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 원본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론을 봉쇄시킨 논리도 된다.
a. 무오론 유형들
무오 이론에는 절대적 무오설, 완전무오설(full inerrancy), 제한무오론, 친교목적 무오론, 무오 용어 배척론 등 다양한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어 이미 무오론 그 자체를 폐기하는 인상이 짙다.
1) 절대무오론은 과학적 사실 및 역사적 사건 에 관한 제반 기록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내용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외양적으로 불일치하게 보이는 내용들에 대하여 다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2) 완전 무오론은 성경의 기본 목적이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정보를 완전무결하게 바르게 기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적 및 역사적 사실이나 내용을 인간 의 눈에 보이는 일상적인 것을 비전문적인 현상적 언어, 통속적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고 본다. 이 입장에서는 성경이 신앙적 영적 메시지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으로 본다.
3) 제한 무오론은 비경험적 계시사건과 경험적 계시 사건 사이에 구별을 한다. 과학적, 역사적 정보는 성서시대의 이해의 조류를 반영하고 있으며 계시적 정보와 구별한다. 그러나 성경을 준 목적인 구원교리에 관한 사항이 무오하다고 본다. George Ladd, Daniel Fuller가 이 제한 무오론을 주장하였다.
4) 친교목적 무오론은 성경의 주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실천적인 친교를 하도록 하는데 있지 진리의 전수에 있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무오론을 기록의 사실성에 연관시키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5) 무오 용어 배척론은 과학 및 역사적 영역 뿐만 아니라 신앙과 행위에 관련된 영역에서조차도 비계시적인 영역이 있다고 보아 무오성 용어 사용을 배척한다.
Paul King Jewett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말로 본다. 그리고 바울은 교리적 가르침에서 조차도 종종 랍비들의 견해를 추종하는 비계시적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바울이 아내를 남편에게 종속관계로 설정한 것은 후기 랍비들의 견해를 따른 것으로 창조기사에 반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기록과 모순 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W. D. Davies가 고린도전서 15장과 고린도후서 5장 사이에 부활에 관한 견해의 차이가 노출되고 있다고 보는 것도 무오 용어 사용 배격의 근거가 되고 있다.
Encounter theology에서는 명제적 계시를 부인하기 때문에 무오론 문제가 대두될 될 여지가 없다.
B. 해결책 모색:
1) 추상적 접근론(The abstract approach)--B. B. Warfield는 성경의 권위를 높이며 난해 성경절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보며 난해한 몇 구절이 무오론을 도괴시킬 수 없다고 주장
2) 조화적 접근론(The harmonistic approach)--Edward Young(Thy Word Is Truth), Louis Gaussen(Inspiration of the Bible). 난해 성경절들의 조화로운 해석 가능성 제시. 모순되어 보이는 성경절들은 각각 상이한 각도, 또는 국면의 묘사에서 비롯된 것.
3) 온건 조화 접근론(The approach of moderate harmonization)--Everett Harrison(The Phenomena of Scripture). 위의 조화론적 접근 방식을 취하지 만 무오라는 말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시각과 함께 완전 영감론적 접근 방식을 취함. 난해 성경절은 모든 데이터가 다 수록되지 못하고 상실된 것이 있는 관계로 다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앞으로 고고학적, 언어학적 연구에 따라 규명될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한다.
4) 문제성 있는 자료로 인한 차이발생론--Edward Carnell 영감이란 원자료 그대로 인용하면 되지 그것을 교정하여 가면서 제시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인용한 원자료가 유오적인 경우 그것을 인용한 때 유오가 될 수 있다는 입장. 무오는 단순히 보도된 것 보다는 단언적 서술에서 속하는 사항 인정. 성경이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고 해서 성경 내 모든 기록이 진리에 속한 것이 아님. ( E. Harrison의 Phenomena of Scripture과 James Orr의 Revelation and Inspiration 참고.)
5) 유오인정론--Dewey Beegle는 Scripture, Tradition and Infallibility에서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유오적 본문 인정하고 축자영감론 부인. 무오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M. Erickson은 Warfield, Carnell, Harrison의 입장들을 통합적으로 접근. 한 저자가 다른 저자의 글을 축자적으로 안용하고 있지도 않다. 역사적, 과학적 사항들에는 문화적 배경, 현상적 언어, 대중적 표현이 나온다. 성경 기자가 사실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다 기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정보가 다 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 난해 성경절을 과오론의 지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5. Inerrancy와 Infallibility
<Inerrancy> <Infallibility>
기록의 정확성(accuracy) 기록의 신뢰성(trustworthy, reliability)
과오로부터의 자유 무흠한 권위
원전의 무오성 계속하여 생명력 공급
미시적 접근(minor detail) 복음의 중심 진리 강조
E. 역동설(The dynamic theory)
1. 역동설은 전해야 할 진리의 신뢰성있는 전달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서 기자에게 필요로 하는 권능을 부여한다고 본다. 또한 성령께서 기자에게 사상이나 관념을 지시하고 지도하신다. 성경은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즉 성령께서 기자의 단어, 표현의 선택을 지도하면서 기자의 개성을 용인하신다. 성서 기자의 개성 신앙과 실천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는 무흠하지만 비종교적 영역에서는 과오나 부정확성이 배태될 수 있다.
2. 지지자들--Erasmus, Grotius, Baxter, ICC 주석 등
3. 비평
불합리한 이원론적 성경관으로 인하여 성경은 종교적 무흠한 진리와 세속적, 역사적 부정확한 정보의 결합이 되어 성경의 신뢰성을 약화 시킨다. 영감 받은 기자가 어느 순간에는 종교적 무흠한 진리를 전달하다가 다음 순간에는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못 선포하게 된다.
F. 신정통주의
Barth, Brunner, 및 Bultmann은 계시와 영감에 있어서 주관적 만남을 강조한다. 절대적인 명제적 계시를 배척하고 성경 본문에는 인간 언어와 문화적 요인의 잠입으로 인한 과오를 인정한다. 성경비평주의를 수용한다. 그러나 보다 더 차원이 높은 하나님과의 만남은 신자들 안에 일어나는 성령의 사건이 된다는 점에 역점을 둔다. 따라서 본문의 불일치는 문제시 되지 않는다.
G. 사상영감론
1. 사상영감론은 완전영감론(The plenary inspiration theory), 인간(성경기자)영감론, 성육신모델론 및 성경전체영감론 등을 포괄 융합하는 차원에서 이해되는 영감론을 전개한다. 통상적인 사상영감론과는 차이가 있다.
2. 성서기자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는가 하면 간접적인 지도가 수반되는 다양성을 띄고 있다.
3. 하나님께서 성서 기자들을 선택하시고 봉사를 위하여 준비시키며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독특한 지식을 들어 내보이고 그들이 접근 가능한 자료 선택을 감독하신다. 성서기자가 자기의 문학적 능력과 언어구사를 하며 논리전개를 하며 예증 등 자료를 완전히 자유스럽게 구사하지만, 동시에 성령께서 기자의 마음에 비추어 주시고 사상을 고취하며 완전한 지도와 감독을 한다고 본다. 어떤 경우에는 진리를 간결한 말로 주시거나 기자들에게 적의한 표현을 찾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적 요소와 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신적 계시의 진리가 인간의 언어와 개념을 입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기자에게 메시지 전달과 기록을 도우시므로 최종 작품은 하나님 말씀이 된다.
4. 하나님께서 기자가 과거 역사 선택과 구축하는 일을 지도 하신다.
1) 성경기자는 구두 전승, 또는 역사적 기록에 존재하는 사건들을 사용하고 있다. 모세가 인간 기원과 부조시대에 관하여 친숙한 구두 전승을 이용하여 기록하였다. 에스라도 역대기 상하의 기록 시 역사적 기록을 정확하게 활용하도록 지도하였다(대하 9:29).
2) 하나님께서는 기자가 개인적인 경험과 사건들을 선택하는 일을 지도하신다(참고 요21:25).
3) 성서 기자가 타인의 다양하고 부정확한 증언을 평가, 선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도가 있었다. 누가의 경우가 그렇다(눅 1:1-3).
4) 하나님께서는 기자가 경고, 견책, 교훈 및 격려의 메시지를 선포 내지 전달할 때도 지도하신다(고후 13:3 참고).
5. 3대 요인
1) 성경은 여러 책들의 인간 저자성을 인정한다.
“다윗이 말하기를...”(막 12:36; 눅 20:42; 행 2:25).
“모세가 말하기를...”(롬 10:19; 마 22:24; 막 7:10; 행 3:22).
“이사야가 말하기를...” (롬 10:20; 요 12:39; 롬 9:27; 막 7:6)
2) 성경은 하나님이 여러 기자의 실제 저자임을 말하고 있다.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말하기를...”(행 1:16; 참조 벧후 1:21).
3) 성경은 설명하기 어려운(신비한) 신적 인적 융합으로 되었다. 그 원천은 하나님에게 있고, 인간은 그 기자가 된다. 그리고 기록된 메시지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인적 요소들--기자 자신의 문장 스타일 사용, 자기의 문학적 능력 활용, 자기 개성 나타냄, 자신의 어휘구사, 자기의 배경과 경험 활용
*신적요소들--하나님께서 기자의 마음에 비추시고, 생각을 고취하며, 기억을 하도록 비추시고, 기록될 사물에 대한 관심을 지도
6.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사이의 긴장관계
재림교회는 복음주의 노선의 성경 고양 사상, 즉 성경의 권위성, 성경의 역사적 기록의 신뢰성을 수용한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문자적 표현을 중요시한다. 성경의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사이에는 불가분리적 관계,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관계와도 같다는 확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원전 무오론에는 불편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의 권위성을 견지 고양하면서 동시에 성경의 인간적 한계성을 어떻게 조화를 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Gerhard Hasel의 Biblical Interpretation Today, George Rice의 Was Luke a Plagiarist? 및 여러 학자들의 논문이 수록된 Biblical hermeneutics은 이에 대한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버틀러 등에 의하여 한 때 유포된 영감 등급론이 극복되었지만 그 영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 왔다. 엘렌 화잇은 이 등급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배틀크릭] 장막교회와 대학에서 동일하게 영감에 대한 문제를 가르쳤으며, 유한한 인간들이 스스로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영감으로 기록되고 또 다른 부분들은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등의 위험한 입장을 취하였다. 나는 리뷰지에 실린 영감에 대한 기사가 주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아닌 것과 대학에 있는 우리 청년들에게 저들이 가르친 것을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게 될 때에 저들은 신령하고 거룩한 영역을 과감하게 밟는 격이 되는데 오히려 저들은 두려워하고 떨며 저희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고 스스로 감추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어떤 부분을 영감적인 것으로 선택하고 또 다른 부분은 영감되지 않은 것처럼 불신하는 태도로서 성경에 대한 판단을 내리도록 어떤 인간도 세우지 않으셨다. 증언들에 대하여도 같은 방법으로 취급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함께 하지 않으신다(서신 22, 1889년).”(1기별, 23).
성경의 권위를 종교적 문제(사안)에만 국한 하면 될 것이라는 해결방식은 성경의 과학적 기사나 역사적 기록을 배제한다. 그러나 엘렌 화잇은 벨하우젠 등의 사상이 유포되던 당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생애는 실제적 인물들의 확실한 역사이다. 아담으로부터 그 후대를 통하여 사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실제로 일어났던 명백하고 꾸밈없는 사실에 대한 서술과 실제 인물들의 진실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영감적인 역사가 선한 사람들의 생애에 있어서 그들의 도덕적 품성을 손상시키는 사실들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일으키는 주제이다. 불신자들은 큰 만족감으로 이 죄악들을 빙자하여 그 범죄자들을 조롱한다. 영감 받은 기록자들은 인간의 약점과 결함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거룩한 역사의 페이지들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거짓되게 증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서기관들은 자신의 의도대로 기록하지 아니하고, 성령에 의해 지시되는 대로 기록하였다. 그들은 실제 그대로의 진리를 기록하였으며, 이 엄격하고 말하기 힘든 사실들은 우리의 유한한 마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계시되었다. ”(4증언, 9).
혹자는 위 인용문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성령의 지시론을 불편해 할 수 있거나 축자영감론으로 해석하는 자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창조, 홍수 및 역사적 인물 묘사 등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면 될 것이다.
재림교회는 역사 비평방법을 배제하고 역사적 문법적 성경연구를 권장하고 있다. 1986년의 Rio de Janeiro 선언문은 이를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엘렌 화잇의 성서 영감관의 중요한 사상이 드러나 있는 다음 인용문을 참고하라.
““주님께서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혹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는 등의 제의로써 성경을 개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중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성경을 베끼는 자나 번역한 사람들이 어떤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들이 있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일이 있음직하고 편협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가능성이나 우연의 일치에 대하여 주저하게 되고 걸려 넘어지게 되는데 이런 자들은 저들의 미약한 정신력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통찰할 수 없으므로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의 신비들을 쉽사리 곡해하게 된다. 사실상 저들은 단순한 정신의 소유자이면 신성(神性)에 속한 것을 받아들이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단순한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나 쉽사리 곡해한다. 따라서 저들은 단순하고 아름다우며 자양분과 기름끼로 가득찬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성경을 베끼거나 번역하는 일에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모든 실수들이 영혼을 위태롭게 하거나 어떤 자의 발이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실수들로 말미암아 가장 밝히 드러난 진리가 난해(難解)한 것이 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1기별, 16)
“성경의 저자들은 저희 사상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성경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언어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이 불완전하고 인간의 정신이 타락하였으며 진리를 교묘하게 기피하므로써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읽고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성경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1기별, 19)
“성경 가운데서 항상 완전한 질서나 뚜렷한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적들이 어떤 정밀한 차례를 따라 행하여진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신령한 계시가 요구되는 환경과 처지를 따라서 이적들을 행하신 것이었다. 성경의 진리들은 감추인 보석과 같은 것이다. 진리는 샅샅이 살펴보아야 하며 참담한 노력으로 캐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하여 피상적인 견해만을 가진 자들은 저희 생각에는 깊은 지식을 가진 듯하나 실제로는 얕은 지식을 가진 자들로서 성경에 반대되는 점들을 말하며 성경의 권위를 무시한다. 그러나 진리와 의무에 일치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은 거룩한 감명을 받을 수 있는 마음 준비를 갖추고 성경을 연구할 것이다. 빛을 받은 영혼은 영적 통일성을 발견할 것이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굵은 황금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기별, 20)
“성경은 감동을 입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기록된 것이며 성경 자체가 하나님 자신의 사고 방식이나 표현 양식이 아닌 것이다. 성경은 사상과 표현에 있어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자로서 대표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어떤 표현은 하나님답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논리와 수사(修辭) 가운데 당신 자신을 두어 성경상 시련의 대상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필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의 필촉이 아니었다. 여러 다른 저자들을 관찰해 보라.
성경의 말씀 자체가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그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그의 사상이 그 감화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개인적인 정신의 감명을 받게 된다. 거룩한 정신으로 물들여진다. 거룩한 정신과 의지가 인간의 정신과 의지에 혼합하게 되어 인간의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 ― 원고24, 1886년(1886년 유럽에서 기록함).”(1기별, 21)
7.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사이의 긴장관계 해결 방향
(1) 적응론 (accomodation, adaptation)
성경의 모든 문장 양식에 있어서 또한 하나님의 사상의 장엄성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한계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퇴폐한 감각과 둔하고 세속적인 식별력을 가진 인간들로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불완전한 언어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겸비하심이 나타난 것이다. 주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들이 현재 처하여 있는 위치에서 만나셨다. 성경은 말씀의 단순성에 나타난 완전성을 갖추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위대한 사상에 대하여 답변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무한대에 속하는 사상이 유한한 인간의 사상 전달의 수단으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성경의 표현들이 과장되기는커녕 오히려 장엄한 사상 앞에 인간의 강한 표현들이 압도당하였으며 필자들이 하는 진리를 전달한다 할지라도 도저히 인간의 표현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죄인들은 다만 하늘 영광의 광채의 그늘만을 간신히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1기별, 22)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성경에도 존재한다. 계시된 진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되고 인간의 필요에 적응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요 1:14)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불리워지신 것처럼 하나님의 책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성경을 대적하는 하나의 논지(論旨)가 되기는 커녕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을 굳게 해 주어야 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신적(神的)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성경의 영감을 주장하지만 반면에 다른 부분들은 인간적인 것이라 해서 거절하는 자들은 신성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접촉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인간의 구속(救贖)을 위한 하나님의 사업에는 신성과 인성이 결부되어 있다”(5증언, 747).
(2) 판단의 유보(suspension of judgment)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료와 그에 대한 이해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충분한 자료가 다 나타날 때 까지 문제시 되는 본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면서 성경의 권위성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대처하여 나가야 한다. 어떤 몇 자료 때문에 성경 전체에 대한 의혹을 가지고 나가는 일은 지혜롭지 못하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 그리스도의 성육신, 중생, 부활, 그 외에 성경에 제시된 많은 주제들은 너무 심오해서 인간의 마음으로 설명하거나 완전히 깨달을 수 없는 오묘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특성에 속한 것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섭리에 속한 모든 오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분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5증언, 699)
H. 조화로운 접근 방식
1. 성경의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도 같은 관계가 있으며 그 두 요소들은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다.
2. 사상 영감이 주축이 되지만 성경에 표현된 단어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사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령의 지도로 선택된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단어들은 성경무오론을 신봉하지 않지만 통상적인 사상영감론자들처럼 성경유오론을 강조하는 입장을 배척한다. 성경의 모든 메시지와 단어들은 신뢰할만하며 신적 말씀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3.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성경기자(penman)에게 全人的으로 감동을 주셨다(벧후 1:19-21)는 점에서 인간 영감론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
4. 성육신 모델을 중심으로 이해하되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말씀하여 오셨다는 점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
5. 완전영감론적 시각에서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참고 자료:
1. 안금영, “메시지와 메신저 관계에서 본 성서 영감의 실상”
2. 1SM 15-23, 37
3. GC 8-9
4. Ellen White Letter 127, 1906 등
5. Van Bemmelen, Peter M. “Revelation and Inspiration.” In Handbook of the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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