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하나님을 거슬리지 말라”
“그대는 하나님을 거슬리지 말라”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23 활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24 그 신복이 저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그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대하 35:21-24).
100m 경주를 잘 달리다가 골인 직전 마지막 순간에 넘어져 탈락되는 광경을 보노라면 안타깝기 한이 없다. 개혁의 왕 요시아의 마지막 장면이 골인 직전 넘어진 것처럼 오버랩되어 보이기도 한다.
I. 신실한 왕 요시아 신앙 이력
요시아는 8세 유다 제 16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는 16세에 하나님을 찾았다. 20세 때는 바알의 제단, 태양상, 아세라 목상을 철폐하였다. 지나간 날의 빗나간 신앙 유적들을 정리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다. 26세 때에는 성전 정결 및 수리하는 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사업의 동력이 된 것은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보고하고 왕에게 읽어 준 기별을 들음에서 이었다. 왕은 율법서 메시지를 듣자 “그의 옷을 찢었다”(왕하 22:11). 왕은 회개하면서 개혁의 봉화불을 올렸다.
당대 세기말적 절망감이 온 나라를 덮었다. 이스라엘은 거의 하나님의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고 하나님께서는 곧 당신의 이름을 더럽힌 사람들을 형벌하시기 위하여 일어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의 분노의 불은 붙었다. 슬픔과 놀람에 압도된 요시야는 옷을 찢고 번민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회개하지 않은 나라의 죄악에 대하여 용서를 간구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진노가 임박한 것을 깊이 의식하고 훌다 여선지자에게 갈 길을 물었다.
훌다는 여호와의 진노 임박의 불가피성을 선포하면서 회개한 왕에 대한 심판의 지연이라는 거룩한 사랑의 배려 메시지를 왕에게 보낸다. 왕의 대책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읽어 주도록 독려하였다. 그리고 거국적인 유월절 준수를 7일 동안 하면서 어린 염소 3만, 수소 3천 등 제사를 올린다. 그는 음악 예언자도 세운다. 이 거창한 국가적 예배의식이 진정한 개혁의 동력을 일으켰을까?
II. 신실한 왕의 실패 원인
요시아는 전반적으로 다윗처럼 정직하게 행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왕이라 할지라도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관제 부흥과 개혁이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면 개혁의 구호는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다. 지도자의 모범과 리더십은 중요하지만 아래에서부터 개개인이 신앙적 각성과 개혁이 수반되지 않은 관제 신앙운동은 형식적인 구호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불행하게도 백성들은 배도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요시야의 통치가 시작되었을 때에 유다 사람들 중에 마음이 진실한 사람들은 여러 해 전부터 고대 이스라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인간의 견해로 볼 때에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거의 성취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전 여러 세기 동안의 배도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힘을 모았으며 열 지파는 이방인 중에 흩어졌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이 남아있는데 이 지파들에게까지도 바야흐로 도덕적·국가적 파멸이 이르러 올 것처럼 보였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도성 곧,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이 서 있고 위대한 국가 건설에 대한 소망이 집결되어 있는 도성이 완전히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지하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공언하신 목적을 외면하실 수 있을까? 의인들이 오랫동안 박해를 받고 악인들이 표면상으로 번영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 좋은 날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선지자 하박국은 이같은 걱정스러운 질문을 하였다. 그의 시대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의 상태를 바라본 하박국은 그의 마음의 괴로움을 질문으로 표현하였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PK 384-385).
“대다수의 백성들은 회개와 개혁의 초청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선한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나라를 다스린 사람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타락하였다. 애굽 왕의 간섭으로 폐위된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요시야의 장자 여호야김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여호야김의 치세의 초기부터 예레미야는 그의 사랑하는 나라를 파멸에서 구하고 그 백성들을 포로에서 건져낼 희망을 거의 가질 수 없었다”(PK 412).
III. 요시아와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주도하고 있는 개혁 운동에 대하여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당대 타락한 제사장 가문에 속하였지만 요시야의 치세 제 13년 아직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부르심을 받기 1년 전에 이미 요시아의 개혁 사업은 시작되고 있었다. 권력의 힘을 빌린 청년 왕과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은 청년 예언자가 함께한 시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레미야를 모태로부터 “열방의 선지자”로 작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 자신의 무가치함에 압도되어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5, 6)고 부르짖었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인생의 가장 예민하고 신선한 약관 10대 후반 또는 20대초 청년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인생은 20에 문학가 아닌 사람이 없고, 30에 예술가 아닌 사람이 없으며 40에 종교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종교를 40 이후 인생의 퇴조기에나 찾는다는 것은 비극이다. 의의 종교 그리스도교는 세속에 물들기 전 20대 銳氣(예기)발랄한 청년기시절에 수용하여야 가솔린처럼 인화 폭발력이 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나라에 편만한 우상숭배의 사당들을 깨끗이 치웠지만 대중의 마음의 성전에 도사리고 있는 우상들을 몰아낼 수 없었던 점을 꿰뚫어 보았다. 진리의 종자가 뿌려져 싹이 트기는 하였으나 가시 때문에 질식된 상태이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신명기에 나와 있는 권고에 따르도록 거듭 주의를 환기시켰다. 예레미야는 어느 다른 선지자보다 더 모세의 율법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이것이 어떻게 국가와 모든 개인의 마음에 최고의 영적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고 애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율법책에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의로운 생애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위하여 굳게 섰다. 그러나 그 당시 유다 나라의 보편적인 상태는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만 선을 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으므로 예레미야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하여 매우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는 이렇게 호소하였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렘 4:3, 14).
요시아 왕의 개혁 사업은 외양적으로 찬란하게 보인다.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로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대하 34:31-33).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4-25).
위의 메시지에 따르면 요시아는 분명히 개혁의 기수이며 영웅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요시아의 개혁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에서 엿볼 수 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렘 8:8).
위 본문에 대한 번역본들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How can you say, we are wise, for we have the law of the LORD, when actually the lying pen of the scribes has handled it wrongly."
The Good News Bible: "How can you say that you are wise and that you know my laws? Look, the laws have been changed by dishonest scribes."
The Moffat Bible: "What! you say, we are wise, we do have his directions - when lo your scribes have written them wrong, and falsified them."
The Jerusalem Bible: "How dare you say: we are wise, and we possess the Law of Yahweh? But look how it has been falsified by the lying pen of the scribes."
The New American Catholic Bible: "How can you say we are wise, we have the law of the LORD? Why, that has been changed into falsehood by the lying pen of the scribes."
The Revised Standard Version: “How can you say, we are wise, and the law of the LORD is with us? But, behold, the false pen of the scribes has made it into a lie.”
여기서 우리는 요시아의 종교개혁의 동력이 되어야 할 율법책을 위조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요시아에게 읽어 준 율법책과 백성들에게 알린 율법책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즉, 야훼의 율법은 야훼의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릇인데 그 그릇에 말씀이 빠져 있다면 그릇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현재의 오경에 들지 않는 책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시아가 참된 개혁자도 아니고, 발견된 율법책이 진정성을 지녔는지 의혹을 품는 시각도 일어난 것이다.
오히려 예레미야는 요시아 왕 때부터 야훼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쳤지만 백성들은 듣지 앉았다.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십삼년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4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6 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7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5:3-7)
요컨대, 예레미야는 요시아에게 일말의 기대를 하였지만 그 개혁 전모를 모두 다 지지한 것은 아닌 것으로 비쳐진다.
IV. 요시아 왕의 결정적인 패착
그래도 예레미야는 개혁이랍시고 주도하는 왕에 미련을 다 떨쳐버리지 못하고 바른 궤도로 나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두었다. “마음을 깊이 살필 때가 왔다. 요시야가 통치자로 있을 동안은 백성들에게 다소나마 희망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위하여 그 이상 중재할 수 없었으니 이는 그가 전쟁에서 죽은 까닭이었다. 국민의 죄악이 그와 같았으므로 중재하기 위한 시간은 거의 지나갔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렘 15:1, 2)고 하셨다.”(선지, 415)
믿음이 신실한 왕이 전쟁터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사건은 뭔가 아구가 맞아 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개혁의 기수이자 영웅인 요시아의 마지막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진다. 전폭적인 지지를 할 수 없었던 예레미야조차도 그의 죽음을 두고 애가를 지었다(대하 35:35).
1. 하나님의 뜻 변별력 취약
요시아는 먼저 당대 국제 정세 흐름에 둔감하였다고 할까? 이미 바벨론은 앗시리아의 니느웨를 정복하였다. 앗시리아는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에게 마지막 저항하는 태세에 있었다. 앗시리아는 애급과 동맹 관계를 맺어 동맹군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시아는 애급의 바로 느고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세력의 남진을 막는 일에 애급을 사용하므로 유다에게 자비의 시간을 더 주기 원하였는데 요시아는 이를 수용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애급 군에 대한 저항은 바벨론의 남진을 촉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2. 자기 고집(아집)
요시아는 종교개혁을 자기기 주도하여야 하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 확신은 다른 사람이 개입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게 하였다. 그는 이방 나라 군주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출정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신앙을 잘한다는 사람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 독선이다. 자기의 판단은 옳고 남은 틀렸다는 것은 독선적이었다. 적대 세력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수 있든 것이다.
요시아는 바로느고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이는 바로 느고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출정하고 있는 것을 불신하였다. 그는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님을 믿어 자기를 앞세운 꼴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변장하여 가면서 자기의 길을 추구하였다. 자기 구실을 잘 만들고 변론이 세고 논리가 매우 정연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당사자가 위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가 된다.
“요시야의 실수(왕하 22:19, 20; 대하 34:26-33; 35:20-24)―하나님의 말씀을 보증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가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젖혀 놓은 인간의 지혜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신다. 주어진 빛을 거절하지 말라. 요시야의 역사를 읽어보라. 그는 선한 사업을 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동안 우상 숭배는 진정되었고 외관상으로는 성공적으로 근절이 되었다. 성전의 문을 다시 열고 희생 제도를 재확립하여 그의 사업은 잘 수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 원인은 그가 받은바 경고에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대하 34:26-33; 35:20-24 인용). 요시야가 전쟁터에서 죽었기 때문에 요시야는 평안히 무덤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하면서 누가 하나님을 비난하겠는가?
주께서는 요시야 왕더러 애굽 왕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신 일이 없으시다. 주께서 애굽 왕에게 전쟁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이르러 왔다는 명령을 주셨다. 그래서 사자들은 요시야 왕에게 느고와 전쟁하지 말라고 하였다. 분명히 요시야는 주께서 그에게 직접 아무 말씀도 없으신 것을 기뻐하였다. 군대를 거느리고 되돌아 간다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였기 때문에 그는 계속 전진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전쟁에서 죽었는데, 그 전쟁이야말로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싸움이었다. 주님께 그토록 크게 영광을 받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지 않았다. 주께서 은혜 가운데 말씀하시고 그를 위해서 좋은 일을 예언하셨다. 요시야는 자아를 믿고 경고에 유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자신의 길을 따르기로 하였다. 하나님은 그 행동의 결과로부터 그를 지키실 수가 없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자기 뜻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될 수 있겠는가?(원고 163, 1903).”(화잇주석, 왕하 23:29,30-24:).
종교적 행사에 열심을 다하였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정한 헌신이 필요하다. 관제 부흥회 힘은 오래 못 간다. 요시야 죽은 다음 급전직하로 국운이 기운 것 보면 민족의 진정한 회심이 없었다. 한 개인 개인이 진심으로 거듭나는 체험으로 연결되지 않은 종교적 행사에는 큰 힘이 없다.
자기 고집, 논리, 독선으로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지나간 날 이룬 과업이 자기의 미래를 약속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
우주의 왕 되신 예수께서는 비천한 신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는 겸손과 비하의 삶을 사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고 그 몸을 우리를 위하여 내 주셨다. 그의 살과 피로 우리는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게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무엇인가? 자아가 부셔져야 한다. 자기가 먼지로 탈바꿈 되어야 한다. 자아를 내 던지고 나가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리게 마련이다.
3. 하나님의 지도가 결여된 출전
국운이 달린 전쟁을 두고 하나님에게 물었어야 한다. 훌다 예언자에게 물었어야 하였다. 인생의 중대사를 놓고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 없이 가다가 죽었다. 인생의 마침표는 기도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는 메시지는 오늘 소위 신실하다는 사람들이 더욱 주의 깊게 경청하여야 할 메시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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