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질문-“세상에서 단위 면적 당 유지비가 가장 많이 드는 것이 무엇인가?”(-여자의 얼굴)

얼굴이란 우리말은 " 영혼이라는 뜻" " 통로라는 뜻"의 합성어라고 한다.

멍한 사람을 얼빠졌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죽은 사람의 얼굴도 되고 산사람의 얼굴도 되며, 또는 기분이 좋은 사람의 얼굴과 아주 기분이 나쁜 사람의 얼굴도 된다.

사람의 얼굴은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듯 영혼이 나왔다 들어왔다 하는 것처럼 바뀌어 변화무쌍하다.

얼굴은 정직하다.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6초라고 한다. , 첫인상이 결정하는 요소 중 외모, 표정, 제스쳐가 89%, 목소리톤, 말하는 방법 13%, 그리고 나머지 7%가 인격이라고 한다. 표정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듯 표정과 감정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람의 얼굴은 근육 80개로 되어 있는데 이 80개의 근육으로 7,000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신체의 근육 가운데 가장 많은 근육을 가지고 있고 가장 오묘한 것이 바로 얼굴이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상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6:8-15

15--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더라

I. 공개토론회와 불의한 재판

진리가 전파되는 곳에는 열띤 토론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국제적 마인드가 있었던 스데반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헬라파 자유 유대인 (리버디노들)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공개 토론회도 참여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상 공개토론의 주역 중에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리스도와 사단, 선과 악 사이에서 전개되는 대쟁투 역사를 읽는다. 스데반은 예언과 율법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연구하고 여기서 얻은 진리를 지혜와 성령으로 전하였다. 당대의 권력자들은 스데반을 이길 수 없어 이를 권력의 힘으로 제압하였다. 그러나 참된 승리자는 스데반이었다. 권력자들 앞에 끌려 갈 때 변박할 수 없는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는 누가복음 21:14-15의 약속의 말씀이 스데반에게도 성취되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유대교 토론자인 다소 사람 사울을 동원하여 그를 심문하였으나 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 단계에 유대교 권력자들은 술책을 사용하였다.

은밀히 사람들을 가르쳐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고 하게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을 충동시켜 스데반을 체포하여 공회에 세우고,

거짓 증인을 조작 동원하여 재판하였다.

종교권력에 집착하고 있는 자들은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둔갑시키고 곡해시키는 기술자들이다. 저들은 이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였다(26:59-61). 거짓을 참으로 바꾸는 기술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게 마련이다. 거짓 기술자들은 고문 기술자, 박해 기술자들이다. 비겁한 자나 사실상 패배한 자가 사용하는 방법은 보복이다. 복음의 진리를 주먹으로, 또는 합법성을 가장하여 제압하는 비극적 모델이 스데반에게 나타났다.

 

II. 원수의 평가

인간은 시각적 존재다. 시각은 감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주 변하는 속성을 지녔다.

다른 사람이 보면 '별로'라고 평가받는 사람이 연인의 눈에는 사랑스럽게, 또는 천사같이 보이게 마련이다. 생명을 바쳐 희생하시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자녀들에게 말 그대로 천사의 얼굴로 다가온다. 미워하는 대상은 아무리 잘 생겼어도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다만 악마의 화신이나 증오의 대상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증오의 대상이 천사의 얼굴로 보였다는 것은 이는 확실히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스데반에 대한 원수의 평가를 보자. 원수의 정체는 산헤드린 공의회다. 그들은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죽음으로 몰았다. 이제는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고자 하였다. 저들은 지금 스데반이라는 집사를 체포하여 심문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보니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한다. 이는 원수의 평가이다. 왜 적대자들은 감정과 시각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원치 않는 좋은 판단을 하고 있는가?

 

III. 스데반의 신앙인격

A.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신앙의 사람이었다(6:8).

천사의 얼굴은 성령의 충만의 증거가 된다.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하였고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6:3)->“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6:5)->“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6:8). 은혜가 선행된 다음 권능이 임한다. 은혜를 받으면 권능이 나타난다.

1. 은혜가 충만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은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성품이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성품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2.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란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였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가 은혜로 변화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된 사람은 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것이다. 신앙에 성숙해 가는 변화가 따르는 일이 없다면 당사자도 고달프고 주변 사람도 고달프다. 성도에게 최고의 축복은 은혜 받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사모하여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늘 이 거룩한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한다.

 

여자들의 피부 관리에 시간 투자 과학적 재료 사용하여 얼굴에 윤기가 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내면적 인격의 외면적 표현과 꼭 비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격의 변화가 있을 때, 회심의 체험을 하고 감사와 감격으로 차 있을 때, 마음을 다하여 찬송할 때 그 얼굴들이 우리를 매혹시킨다. 스데반의 얼굴은 밝았다. 고요하였다. 자비와 인자로 차이 있었다. 두려운 모습이 아닌 당당한 모습이었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받고 감사할 때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변한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얼굴에 피가 낭자하였다. 이것은 비참한 모습이다. 그러나 원수의 눈에는 천사의 얼굴로 비쳐졌다. 역경과 고난에 처하여 있을 때 천사 같은 얼굴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얼굴에 비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전도의 문은 천사 같은 얼굴이 연다. 현재가 아무리 곤고로워도 궁극적인 축복의 약속을 믿고 따라간다면 천사 같은 얼굴이 가능하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였다(7:55-56). 스데반 그 자신은 발광체가 아니다. 반사체일 뿐이다. 그가 하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 영광이 스데반의 얼굴에 반사된 것이다. 그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고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을 때 그 보좌로부터 영광의 광체가 그 얼굴에 비치어 천사와도 같은 얼굴을 한 것이다. 스데반의 인생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 초점에서 빛이 스데반의 얼굴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얼굴에 세상 것들이 비친다면 그것은 속물로 보일 뿐이다. 무엇이 우리의 얼굴에 투영되고 있는가? 하늘인가? 땅인가? 이 땅의 제도만 보고 그 일에 열을 올리고 있으면 우리는 그 지상적인 것만 반사할 뿐이다.

사람됨이 온유하고 선량하게 생긴 모습 때문에 천사 같은 얼굴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심령에 은혜가 넘칠 때 우리는 스데반의 얼굴처럼 천사의 얼굴이 된다. 하나님과의 내면적 교제를 통하여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에 천사 같다고 하였다. 이 영적 내면생활이 외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 천사의 얼굴이다. 얼굴은 영혼의 거울이다.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 깊은 변화가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

 

B. 천사의 얼굴을 지녔던 사람들

성경에는 천사의 얼굴을 한 선구자들의 사례들이 나온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다( 34:29). 하나님과 긴밀한 다니엘과 그의 3친구들은 얼굴에 하늘의 빛이 반사되었다(1:15).

엘렌1840(12-13) 밀러 집회에 참석하여 설교자로부터 구원 받고자하면 죽으면 죽으리라에스더의 심정으로 나오라는 호소를 듣고 에스더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나섰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재하신 강렬한 느낌을 받고 하늘의 평화와 기쁨으로 행복에 찼다. 한 아주머니가 엘렌의 이 얼굴을 보고 작은 소녀, 예수님 만났니?”하고 물었다. 엘렌이 하고 대답하자 그가 그래, 예수님 만난 일이 네 얼굴에 쓰여 있구나라고 대답하였다.

 

C. 말씀에 뿌리를 둔 신앙이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서 이스라엘의 지난날 반역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펼쳤다. 스데반의 설교는 소위 광신적 신앙을 지닌 무리들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종교에서) 언어의 본질은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것이 우선이다. 듣는 것을 포기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파국으로 끝난다. 구약성경의 요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데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점을 빼면 구약성경이 무너질 것이다. 스데반의 언어사건은 계시 사건이었다. 그는 오늘과 내일에 있어야 될 것을 과거의 역사를 비폭력적으로 반성하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것은 계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음성에 귀를 막았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스데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용서의 기별을 전하였다(7:60).

스데반은 받은 은혜와 권능으로부터 말씀을 펼쳐 정의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돌을 들어 던지는 저들의 이글어진 모습들을 향하여 사랑의 용서를 발휘하고 있다. 리꾀르라는 현대 철학자는 삶의 궁극적 과제는 정의와 용서에 있다고 하였다. 종교가 정의의 투쟁에는 약하지만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시킨다. 이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의와 사랑을 조화시켜 성취시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 정의와 사랑을 조화시켰다. 스데반은 그 십자가로부터 이어진 부활, 승천, 그리고 하늘 성소에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은혜 충만하여 정의와 사랑을 조화시켰다. 이 조화는 하늘의 예증이며 승리의 성취였다.

예수께서 하신 기도처럼 스데반은 원수를 사랑으로 용서하는 기도를 하면서 돌에 맞았다. 용서는 종말론적 희망의 사건이다. 래서 원수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칼날처럼 드러낸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 용서의 기별을 전하는 그의 모습에서 천사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원수에게도 내 얼굴이 천사처럼 보이게 하라. 그 인생의 초점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고착되게 하라. 하늘의 영광을 접하라. 저주 대신 축복을 받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진정한 용서의 기별은 하늘의 영광이 반사될 때 가능하다. 용감한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

 

D. 은혜와 권능의 충만은 성령과 지혜로 말로 증거케 한다(6:10).

사람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의 전도를 막을 수가 없었다. 백성/장로/서기관들을 충동하여 거짓 증인을 세워 고발하는 당대 지도자들이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가장 혹독한 오해를 받았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성령으로 증거하였다. 스데반의 그 모습이 천사와도 같았다.

1.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된 것만으로는 끝나서는 안 된다. 지혜와 성령으로 증거하여야 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비웃고 반대하는 자들을 압도케 하는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전도하면서 싸우는 사람이 있나?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영혼을 구원하고자 전도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상대방을 더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사람들은 마음으로 그를 천사같이 보게 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볼지 모르지만 우리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다면 우리 얼굴을 변화시켜 그들을 압도하는 존재가 된다.

고전 2:1-4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으로 하여...

전도할 때 얼굴이 빛난다.

2.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고 해석하여 증한 사람이었다.

원수의 고소내용은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6:13)는 것에 집약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1) 거룩한 곳은 솔로몬 성전이었다. (2) 율법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 오경이었다.

(1) 성소신학 재해석

스데반은 하나님의 정의의 거울에 지나간 날의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를 비추어 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느냐고 물었다. 그는 저들의 우상숭배하는 자세로 성전을 생각하는 율법주의적 광신주의를 들추어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지상 성전 휘장은 찢어졌다. 스데반의 신학은 하늘성소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재림교회의 천상성소의 신학의 원조격이 되는 사람이었다.

모형이었던 지상성전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 하늘 성소로 그 관심이 옮겨 가야했다. 십자가의 희생은 부활 승천을 통하여 이제 하늘 성소에서의 중보 사업으로 이어져 가고 있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하늘성소에서의 중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올바로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이러한 하늘성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에 연관되지 않은 십자가 강조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였다. 자가 아래에서 성령을 달라고 하는 신자들에게 마귀가 악령을 넣어 주기 때문이다.

후에 바울은 스데반의 성전신학 개념을 확장시켰다. 그는 성령을 모신 사람이 성전이 된다는 사상으로 발전시켰다(고전 3:16; 6:19). 어느 장소만이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장소에 집착하여 여자의 뜰, 이방인의 뜰을 만들고 울타리를 쳤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 교회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이 영혼 성전이 지어져 지어가는 일이다(2:22).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최대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 하실 것이다. 그리고 축복하실 것이다.

 

 

(2) 율법 신학 재해석

스데반은 율법에 구속되어 화석이 되어 버린 구약신앙을 그리스도의 복음 신앙으로 꿰뚫어 보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최초의 마르시온주의자도 에비온주의자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살인도구로 삼아 선지자들을 죽인 지나간 날의 잘못된 역사를 들추어냈다.

구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주장에 대하여 구약의 예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표상이며, 그림자라고 해석하였다. 표상인 지상의 제사제도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실체가 오시어서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다고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보는 것을 통하여 율법의 진정한 모습을 회복시켰다. 그는 갈 6:2 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표현은 그리스도 중심의 법이라는 뜻이다. 법은 제도의 표본이다. 제도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가 그 실체라고 주장하였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사상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사상은 무익하다. 아니 오히려 독이 된다.

한 때 SDA의 함정은 율법을 그리스도 없이 전하는 것에 있었다. 1888년에 공식적으로 극복된 이 문제는 그 이후에도 자주 유령처럼 우리를 따라 다닌다. 한국 교회의 현재의 근원적인 문제는 그리스도 없는 행정이고 그리스도가 부재한 선교지 분할 문제다.

최근 프란치스코1세의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 강조에 놀란 일

 

E. 스데반의 신앙은 흔들림 없이 충성하는 절개 있는 신앙이었다.

교회안에 일시적으로 헌신을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평생토록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까지도 신앙을 지키고 환한 모습으로 잠든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험악한 일을 당하도록 놔두느냐고 불평하지 않았다.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불신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손해를 당하는 일에 부딪치면 마음이 요동치기 일쑤다. 우리는 실망과 좌절의 수렁에서 하늘의 사령탑을 보지 못한다. 질병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다. 그러나 스데반은 믿음으로 그 험난한 상황에 대처하여 끝까지 복종, 억울한 죽음을 신앙으로 마감하였다.

스데반의 삶과 죽음의 목표는 그의 마지막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7:59). 그는 예수의 충만한 임재를 느끼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IV. 새 역사의 기폭이 되는 스데반 순교 사건

A. 순교자의 피는 선교의 씨가 되었다. 스데반은 복음사업의 세계화 문호를 열었다. 스데반은 복음사업의 세계화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이다. 천사의 얼굴로 죽은 사건이 그리스도교 선교사에서 새로운 획을 그은 사건이 되었다.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을 회심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스데반이 영감에 차서 안에서부터 타오르는 눈빛을 하면서 용서를 구하며 죽은 사건은 사울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영원한 하늘의 기별이 되었다. 스데반을 죽게 한 공로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 된 사울은 스데반의 천사 같은 얼굴로 깊은 감명을 받았고 스데반의 성서 논리가 진리라고 내적으로 인정하였다. 순교자의 피는 전도의 씨앗이 되었다. 스데반이 다 하지 못하는 일을 사울이 바울이 되어 이루어 갔기 때문이었다. 천사 같은 얼굴은 전도의 원자탄이 된다. 하늘에서 투영된 빛이 서린 모습은 원수까지도 감명시킨다. 피해자 스데반과 가해자 사울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섭리적 만남이었다. 한 인격의 마지막 숨결은 선교의 횃불이 된다.

스데반의 천사 같은 얼굴을 주목한 사람들 중에 사울도 있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공을 세워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었다. (참고 행 7:59; 8:1; 22:20). 그러나 천사같은 스데반의 얼굴, 정의와 사랑의 사람 스데반의 천사 같은 마지막의 모습은 그의 머리 속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그는 주안에서 기뻐하라.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4:4)고 권고하였다. 옥중에 있는 바울이 옥 밖에 있는 신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살기가 등등하여 다른 나라에까지 박해의 원정을 갔던 그가 지금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기쁨이 넘쳐 기뻐하라고 한다. 악의에 찬 바울이 이토록 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스데반의 모습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신령한 눈을 뜨고 보니 지나간 날의 자기 모습은 장님 그것이었다. 신령한 축복을 받아야 억압받고 있는 정신이 해결된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돌에 맞았다. 원수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그를 성밖에 버렸다. 그가 사경에서 헤매다가 미소 짓는 얼굴로 일어나 다시 가서 복음을 전하자고 하였을 때 충격을 받고 그를 따라 나선 사람이 디모데다. 스데반의 천사의 모습은 루스드라에서 바울에게 이어졌고 바울의 이 천사같은 얼굴은 디모데에게 이어졌다.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생활이 바뀌고 사생관도 변한다. 감정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순화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환경을 초월한 심성--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B. 스데반의 마지막 역할은 구약 예언의 핵인 70이레 예언을 완성시키는 일을 하였다. 천사의 얼굴은 2300주야 예언기간에서 옛 시대를 끊고 새 시대를 열었다. 끊음 없이는 새 시대가 오지 않는다. 십자가 사건도 끊음의 사건이다. 그래서 그는 결단의 사람이 되었다. 낡은 역사를 끊고 새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기폭제적 인물이 된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버려야 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는 자기 파멸의 비명이다. 버림으로 지나간 죄악의 역사를 끊은 사건이 십자가이다. 스데반은 성령을 대항하는 동족들의 반역의 역사를 질책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70이레의 예언은 성령을 거슬림으로 끝났다. 우리는 성경 예언 기간의 척추같은 2300일 예언의 첫 부분이 되는 70주일 즉 490년 기간이 끝이 스데반의 순교 사건과 연계된 것으로 예언을 풀이하는 백성들이다. 70주일의 마지막 주일을 메시야 사건이 예고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3년 반의 공생애 시작을 알리는 기름 부은바 된 왕이 등장하고, 3년 반 되는 때에 십자가의 사건을 말하는 제사와 예물을 폐지할 사건이 일어나고 십자가 사건 후 3년 반이 되는 때 스데반이 순교 당하는 사건으로 시작된 박해가 교회를 풍지 박산 시킨 사건으로 연결된다. 이로 인하여 복음이 다른 나라에 확산되고 유대인들이 선민으로서 주어진 기간의 대 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복음을 국제화시키는 사건의 장본인이 스데반이었다. 복음 사업의 전환점을 만든 국제 선교의 기폭제가 된 인물이었다.

C. 책의 백성 재림교회 신앙의 척추는 예언에 입각한 신앙에 있다. 재림신앙은 샤머니즘 같은 미신적인 신앙, 유대인 같은 이적을 추구하는 신앙, 헬라인 같은 지혜만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신앙을 초극하여 예언을 중심으로 신앙한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샛별이 우리 심령을 가득 채우고 그의 은혜와 권능이 얼굴에 반사되어 빛날 때 참된 예언적 신앙이 된다. 스데반은 바로 이 같은 예언적 신앙을 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성소에서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달라진 사람, 진정한 예언 백성의 표본이 되었다. 이 것이 참된 이적이다. 우리주님께서는 이런 이적을 오늘도 예언 백성인 우리들을 통하여 창출하시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만나야합니다.

70이레의 예언 기간의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은 천사의 얼굴과 마음씨를 가진 집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반사하는 반사체야 말로 한 시대를 끝장 내고 새 시대를 여는 사람이었다. 2300일의 예언 기간이 마친 때에 등장하는 엘렌 화잇도 하늘의 빛을 받았고 예수를 만나 회심의 체험을 하였다.

 

<호소>

남은교회는 마지막 시대 환난을 거쳐야 한다. 험난한 역사의 파고를 넘어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메시지가 있다.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칙에 진실함을 스스로 보여 주어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교가 가장 크게 모독을 당하고, 그분의 율법이 가장 크게 멸시를 받을 바로 그 때 우리의 열성은 가장 뜨겁고 우리의 용기와 확고함은 가장 불굴의 것이 되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를 버릴 때 진리와 의를 옹호하여 굳게 서고, 투사가 적을 때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것이것이 우리의 시험이 될 것이다. 이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냉()에서 열(), 그들의 비겁에서 용기를, 그들의 반역에서 충성을 취해야 한다. 이 국가는 큰 반역의 지도자 편에 설 것이다.”(5증언, 136)

 

이 때를 대비하여 스데반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 성령과 지혜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사람, 새 역사를 이끌어낸 스데반같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천사의 얼굴을 한 하늘 품성의 신자들로 가득한 남은 교회의 일원이 되어 주님 오시는 날을 열어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합시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