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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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6:9).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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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상 추락

"왜 어머니 때려" 아버지 숨지게 한 초등생 아들

201619일 경기도 김포경찰서는 살인 혐의로 A(11)군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

A군은 7일 오후 1047분께 경기도 김포시의 자신의 집 방에서 아버지 B(55)씨의 배를 흉기로 한 차례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어머니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A군은 경찰에서 "어머니가 집에 늦게 들어오자 아버지가 화를 내며 때리는 것을 보고 홧김에 찔렀다"고 진술했다. A군과 어머니는 "평소 B씨가 집에서 자주 폭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A군은 어머니가 자신의 방에서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는 도중 부엌에서 흉기를 가져와 찌른 것으로 조사됐다. B씨는 당시 술에 취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A군은 만 14세 미만의 형사 미성년자이어서 형사 입건을 할 수 없다.

경찰은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촉법소년(10세 이상14세 미만)에 해당하는 A군을 살인 혐의로 법원 소년부로 송치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지혜와 힘의 상징,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 온 가족이 믿고 존경하며 따르는 아버지 상이었다 오늘날은 그것이 변질, 타락되어 산산조각 났다.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하거나 의존할 대상이 아니다.

 어제 보도된 어느 목사가 중학생인 자기 딸에게 폭력행사를 하여 숨지게 하고 그 시신을 집에 방치한 사건을 말하기 조차도 부끄럽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전국신학대학협의회 개회예배에서 하늘에 계신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기도한 어느 여 목사에게 머심 식탁 자리에서 그렇게 티를 내면서 꼭 기도해야 되겠느냐고 힐문했다가 당한 경험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어느 설문 조사 결과

1-엄마(mother), 2-열정(passion), 3-미소(smile), 4- 사랑(love), 아버지는 70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if !supportEmptyParas]-->주기도문의 중요성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더욱 깊게 하는 비결이 된다. 주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과의 은밀하게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하늘로 연결시키는 기도의 권능을 모본으로 보여주셨다. 기도를 할 필요가 없으신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싶었다. 우리는 인생에게 다가오는 여러 문제들을 기도로 극복해 가는 신자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그들의 비결은 개인적인 기도의 권능에 있다. 그러나 기도를 공동으로 드릴 때도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자들이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문의 골격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6:9a; 11:2)고 하며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6:9-13, 11:2-4)은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문의 모델에 속한다. 제자들은 당대 랍비들의 기도 형식과 자세에 익숙하였는데, 예수께서는 그런 기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한 기도 모델 골격을 알려 주셨다. 그리스도의 활력이 넘치는 기도를 배워야 한다. 어떻게 이런 살아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지를 모르는 제자들은 에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싶었다.

주기도문은 산상 설교의 중심이며 핵심이다. 주기도문의 각 구절에 마음을 열고 이 기도의 정신에서 살아 나갈 때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설교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주기도문을 실천한 삶이다. 그래서 2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주기도문은 모든 복음의 요약이요, 기도중의 정수, 기도를 가르치는 기도라고 했다. 루터는 주기도문은 기도의 알파벳이라고 하였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먼저 기도의 본질에 대해 가르친 후(6:5-8) 주기도문을 기도의 길잡이로 가르치신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 한 곳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의 기도하는 법에 관한 질문을 받으시고 가르쳐 주신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1:1) "주기도문"의 기도는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가 드리는 기도다. 기도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침례 요한의 기도하는 모습에 거룩한 자극과 감동을 받고 물은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의 기도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의 기도는 각기 다른 때에 주어진 사건이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주의 기도를 두 번 가르치셨는데, 한 번은 산상 설교를 듣던 무리에게 하시고, 또 한 번은 그로부터 몇 달 후 제자들만 있는 데서 하셨다. 제자들은 잠시 그들의 주님과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돌아왔을 때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고 계시는 그분을 발견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 듯 계속 큰 소리로 기도하셨다. 구주의 얼굴이 하늘의 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의 바로 면전에 계신 듯하였으며, 그분의 말씀에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강한 능력이 있었다. 경청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흔히 목격하였다”(보훈, 102).

그분께서 고된 하루를 마감하는 기도의 시간에서 돌아오실 때, 그들은 그분의 얼굴에서 평화의 모습, 곧 전신을 휩싸고 있는 듯한 상쾌함을 보았다. 그분은 아침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낸 후에야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을 전하기 위해 나가셨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사업의 능력이 그분의 기도 시간과 관련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제 그분의 간구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들은 마음이 위엄에 눌려 겸비해졌다. 그분께서 기도를 그쳤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누가복음 111) 하고 부르짖은 것은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보훈,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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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구성(골격)

마태는 주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배열하고 있다.

I. 호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II. 하나님-하늘을 향하고 있는 기도

   A. 하나님의 이름 경외

   B. 하나님의 나라 소망

   C. 하나님의 뜻에 순종

III. 나와 이웃 살고 있는 인간 세상을 향한 기도

   A. 일용할 양식- 현실적 필요를 베푸시는 은총

   B. 용서하고 용서 받는 속죄의 은총

   C. 시험에서의 승리

   D. 악에서의 구원

IV. 송영- 나라, 권세,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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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3가지 청원과 맨 끝에 첨가된 한 가지 송영 청원은 하나님과 직접 관련되는 내용이고 중간에 이어지는 4가지 청원은 우리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주기도를 구성하는 두 부분의 상호관계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 사이의 관계에 비교된다. 십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로 펼쳐진 것 같이 주기도도 하나님 사랑와 이웃 사랑이라는 삶의 지표를 펼쳐 놓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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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이 호칭을 두고 기도의 황금문이라고 한 분도 있다. 황금문 같은 이 호칭의 헬라어 원문 순서는 파테르(아버지여) / 헤몬(우리들의) /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하늘에 계신)’의 순서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 6:1-18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10회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무려 117번이나 아버지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요한복음 17장의 이른바 대제사장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드린 긴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에는 아버지란 표현이 무려 36회나 나온다. 요아힘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는 당대 유대문헌들을 살펴 본 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사람은 예수 하나님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중으로 아버지가 되신다.

위격 상 아버지가 되신다.-성부, 성자, 성령 삼위 중 제1위를 아버지로 호칭한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신다. 아버지는 창조주로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성서시대에 창시자, 창설자를 아버지(조상)로 부르는 관행이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신다. 우주만물과 모든 유형과 무형의 존재는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신정국가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 교회를 창설하시어 아버지가 되신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택하여 아버지가 되신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4:22). 영적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셨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11:1). 그래서 바울은 이점을 들어 양자로 풀이하였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9:4).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인 교회(6:16)가 양자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8:15-16).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4:4-7). 고대 이스라엘 양자나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 양자 개념은 집합적이다.

구속을 통하여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아들로 입양된다. 그는 언약 백성을 삼으신 구속의 아버지가 되신다. 요한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양자됨을 펼치고 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이 양자로 입양되는 사건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 이름을 믿을 때 일어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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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가장 깊은 구렁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서 믿음으로 회개하는 영혼을 높이사 하나님의 양자가 되게 하신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포된 모든 보증 가운데 이것이 충실과 공의와 하나님의 자비로운 언약에 대한 가장 강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부조, 754).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치 우리 육신의 아버지에게 구하듯 신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9-11). 누가는 이 좋은 것을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 되시는 분이시다.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 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축복이다. 우리 기도가 궁극적으로 구하는 진정한 복은 소원 성취를 넘어서 하나님 자신이다. 기도란 우리의 소원을 정화하고 바로 잡는 법을 배워가는 길이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 즉 그의 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Reinhold Schneider, Das Vaterunser, Kolmar: Alsatia, 1941; Freiburg: Herder, 1947, 1979(6. Auflage). 그래서 이런 축복을 받은 교회는 영(靈) 가족이 된다.

이 호칭은 우리 눈높이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시게 적용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고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 고후 4:4; 1:15)이 되시기 때문에 그 분이 아버지로 부르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것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와는 동일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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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호칭 -예수께서 아버지를 부르신 호칭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14:36). “아바(αββα, abba) 아버지(πατήρ)”는 아람어와 헬라어 두 단어를 결합시킨 표현이다.

8: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4:6 “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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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예레미아스는 <신약성서의 중심 메시지(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에서 기원 전 2세기 이전에 아버지를 나타내는 abbi 대신 아람어 abba가 사용되었다고 하며, 더 이상 어린이의 관용 호칭이 아닌 나의 아버지,” “너희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의 통용어로 성인 사회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p. 21). 칼손(D.A. Carson)<산상설교(The Sermon on the Mount)>에서 아버지가 그리스도 당시 유대인 문헌에 나온다 할지라도 이는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하고 있다(p. 62).

아바또는 아빠(αββα, abba)”는 아람어로 어린이가 아버지를 존경하여 부를 때 사용하는 언어이다.

예수님은 당대 어린이가 가장 친근하게 부르는 용어인 "아바" 호칭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불렀다. "아바"(14:36)가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르는 아람어이지만 우리말의 "아빠"와는 다르다. ”Abba“ 칭호는 오늘날 내 아빠(My Daddy”보다는 내 아버지란 표현에 더 가깝다고 한다(Carson, p. 62). 우리 말 "아빠"는 어린 아이의 친밀성을 표현하고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존경감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아바"는 친밀성과 더불어 존경하는 마음도 담겨 있다.("아바" 용어 해설, Stuttgarter Erkläungsbibel. 해설 관주 성경전서, 37).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보통 쓰이는 용어는 '아브'인데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당대 하나님 호칭 사용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68-69).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하신 이 호칭은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외에는 줄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시었다. 유대 지도층이 이 호칭을 문제시 하여 참람죄로 정죄하게 된 하나의 이유로 삼기도 했다(8:18-19, 38-39, 49, 54).

그러나 구약성경 에는 이미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64:8)고 이미 고백한 바 있다. 예레미야도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3:19)라고 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1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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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 our father)로 부르게 하신 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특별한 은총의 토대 위에 삶을 구축케 하며 동시에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주어 결속시키시는 의미가 담겨 있다.

구약성경에 아버지로 묘사한 경우가 나오기도 하지만 근엄하고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하고 생각게 하였다. 그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친근하면서도 존경호칭이라는 독특성을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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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권능이 있으시고 (전능하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권능이 있으신 하나님, 하늘이 지닌 의미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 창조자로서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이 담겨 있다. 그는 자기에게 구하는 자에게 완벽하게 들어주신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실패한 것은 하나님이 실패하고 불행해서가 아닌 우리에게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잠간 허용하신 것에 불과하다. 우리 하나님은 죽도록 사랑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 분은 십자가에서 한번 죽으셨다.

2. 어디나 계신-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다. 어디서나 우리는 그를 만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원천적인 고독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고아로 전락된다는 것이다. 고아는 고독한 존재이다. 아버지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런 고독의 함정에 빠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우리 아버지는 자녀가 전적으로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아버지를 의존하고 신뢰한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칭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칭호는 기도의 황금문이 된다. 이 황금문을 닫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을 관장하고 계신 분, 역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 진정한 주인은 위에 계신 하나님, 내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 관심을 돌리라 해바라기처럼 아버지 바리기 신앙이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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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하늘 영가족으로 삼으신 하나님

주기도문의 호칭은 하늘 가족으로의 초청장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한일서 32).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17)

20:22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하나님에게 올라간다고 전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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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할 때에 헬라어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할 때 이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중생을 통하여(3:3)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갈 때 우리는 사신 하나님 자녀로 입양된다. 하나님은 독단적으로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선택할 경우,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자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엑수시아, exousia)에서 권세는 권위,” “권리,” “선택권을 뜻한다. 이 권세는 흔히 사용하는 이라는 의미의 뒤나미스(dunamis)와는 다르다(5:27 참고). 죄 때문에 인간은 모든 권리를 상실하였고,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구원의 계획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기로 선택할 기회를 회복시켜 주었다. 아들은 아버지 것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고귀한 신분은 아니지만 그들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서인이 되어야 느끼곤 한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모든 것을 주신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신다.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2:11). 구주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접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하고 간절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제일 먼저 사용해야 하는 첫 번째 말로 거룩한 관계를 보증하는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게 하신다.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사랑의 진리가 담긴 선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당신의 마지막 기도에서 하신 말씀, 곧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요한복음 1723)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와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예수께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대로 하여금 그분께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라.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우리를 지으신 분께서 죄인을 위해 호소하시는 것처럼 열렬하게 호소한 적은 없다. 아무리 다정하고 관심이 많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이처럼 따뜻한 초청의 손길을 뻗은 적은 일찌기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도처에 계신다. 그분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들으시고,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각 사람의 슬픔과 실망을 맛보시고,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매와 친구와 이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지 주시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는 그분의 사랑에 변함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그분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고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하는 그분의 자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생애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가족과, 그분의 사업을 최고의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될 것이다. 그대가 가지게 된 하늘 아버지와, 그 가족의 모든 구성원과의 관계를 기쁜 마음으로 인정하며 귀히 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한 가족이 된 자들의 복리를 위한 것이라면, 비록 미천한 일일지라도 모두 즐거이 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로 바라보도록 명령하시는 이분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시편 1153). 우리는 그분의 보호 아래서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63)고 말하면서 안전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보훈, 105-106)

하나님께 나가는 첫 단계는 그분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다(요한일서 416).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이끌려 그분께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이기심을 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모든 자녀를 우리의 형제로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리저리 얽힌 거대한 인간 사회의 한 부분이며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간구할 때 자신과 함께 이웃도 포함시켜야 한다. 자신만을 위하여 축복을 구하는 사람은 올바로 기도한다고 할 수 없다.”(보훈,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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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보혈의 영적 핏줄로 이어진 영가족은 그리스도의 가족의 지체들이 된다. 그들이 이룬 신앙공동체 교회는 하나님을의 아버지로 모신 권속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2:19). 권속은 가족이란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형제자매가 된다. 성도들은 복음 안에서 서로 교제(코이노니아)를 나누며 서로 돌보고 지키며 한 진리로 결속된 형제자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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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