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祈願 第一 >마 6:9
I. 소원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우리의 소원은 무엇인가?
사경에서 헤매는 한 병상의 한 소녀가 있다면 “살고 싶은 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고백할 것이다. 병든 자의 절박한 소원은 치유와 회복이다. 최대의 소원들의 예를 더 보자면 고등학생은 우등생이 되어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일 것이다. 대학생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나일까 한다. 정치가는 경세의 도를 가지고 국태민안을 도모하는 것, 상인은 돈을 많이 벌어 재벌이 되는 것, 예술가는 국전에 당선되는 것, 교수는 명 강의를 하고 유명한 책을 저술하는 것...등등이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인가? 통일! 우리는 이런 노래를 하여 왔다. 그리스도인은 이 소원을 넘어서 근원적인 소원을 기도하며 바라고 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선한 소원도 있고 악한 소원도 있다. 빗나간 소원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다.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던지 다 주겠다”(마 14:7)고 맹세하여 말했다.
II. 신자의 삶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아버지-“아버지”라는 첫 호칭 속에 전 복음이 요약 압축되어 있다. 이 말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리가 된다. 이 호칭은 기도의 황금문이 된다. 하늘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이며 자비의 아버지가 되신다(고후 1:3). 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주의 기도문에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사람의 첫 번째 소원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다. 돈도, 지식도, 장수도, 학식도, 권력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그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소원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소원이다. 주기도문의 첫 소원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우러름을 받는 것에 있다. 주의 기도문 전반부에서 하나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고, 왕국이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소원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향한 소원이 먼저 아뢰어져야 한다. 전반부 3개의 기원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 위엄과 권능에 관한 것이다.
제1기원-하나님 나라 준비-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는 안 온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져야 하나님 나라가 온다.
제2기원-하나님 나라 來臨-세상 나라의 혼란상을 보라. 하나님 나라가 와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고는 하나님 뜻의 완전한 성취가 없다.
제3기원- 하나님 뜻의 성취-예수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을 펼쳐 전하고 이룩하는데 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 이 세 기도는 앞의 기원이 뒤에 오는 기원과 밀접하게(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면서 렌스키의 말대로 십계명 처음 부분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나머지 4가지 기원은 십계명 후반부처럼 인간의 지상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III. 하나님 아버지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탈무드에는 우리에게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고 한다. 탄생 시 부모가 지어준 이름, 친구들이 우정으로 불러주는 이름, 죽을 때 얻어지는 이름이다. 우리 이름은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사용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칭호는 하나님으로서 그가 갖고 있는 품성과 속성을 드러낸다. 인간을 취급할 때 나타난 하나님의 품성은 그가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선택한 여러 가지 이름의 의미를 살펴볼 때에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이름은 네 개의 문자 즉 “네 개의 문자”(tetragrammation)로 되어 있는 YHWH (히브리어 יהוה) 야훼이다(5500회 이상 나옴) 칭호는 창세기 2장에 나온다. 유대인들은 YHWH라는 호칭을 너무 거룩하게 여겨 성경을 읽을 때조차도 이 단어를 발음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지중에라도 모독하지 않기 위함이었다(참조 레 24:16). 그리하여 이 이름의 모음을 잊어버려 마소라 학파는 Adonai 모음에서 빌려와 여호와(Yehowah)라고 읽혀지게 되었다(흠정역은 Jehovah로 음역). 그 뜻은 “존재하시는 분,” “자존자”(自存者), 혹은 동사 형태가 사역형(causative)이기 때문에 “존재케 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친히 당신 자신을 소개한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라고 하셨다.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Ehyeh ’asher ’ehyeh)라는 구절(출 3:14)에 비추어 해석해 볼 때, “계시는 이,” “혹은 계실 이”를 의미하며, “영원자”가 된다. (참고: 히브리어본문 אהיה rv,a אהיה-Ehyeh Asher Ehyeh). 여기서 Ehyeh (Hebrew: אהיה)가 두 번 나온다. 그 뜻은 “나는~이다”로 번역된다. Ehyeh(אהיה)의 기본어근은 동사 hy:h((hayah "to be")이다. [Ehyeh(אהיה)-Asher(관계대명사 rv,a)-Ehyeh(אהיה). "I Am that I Am (or will be, ongoing)." ] 하나님은 모세에게 영원하고 자존(自存)하는 분이라는 의미를 밝히신 것이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밝히신 이 이름은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구원을 예비하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시다. 영어 성경에서 GOD이나 LORD로 나온 경우 모두 “여호와” 칭호를 대체 표기한 방식이다.
창 1:1에 나오는 하나님 이름은 " !yhil~a> (Elohim)" 으로 어근에 내포된 “힘,” ‘권세“ 및 ”능력“의 뜻에 비추어 큰 권능을 가지신 분을 의미한다(2500회 이상 나옴). 창조 사업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전능성에 관한 놀라운 표현이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은 놀라움, 경외감, 전적인 의뢰심 등의 감정을 인간 속에서 일으킨다.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행위를 통하여 창조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분을 나타낸다.
성경 갈피갈피에 펼쳐지고 있는 YHWH와 Elohim이라는 하나님 이름은 전 성경에 나오는 신구약 성경의 중심이 된다. 이 두 이름이 이중주처럼 전 성경에 나온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특성과 속성을 상황에 맞추어 이 두 이름에 덧붙인 합성명사 이름들로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존재와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 분은 창조주가 되시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차마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쉠’, Hashem (השם) 즉 ‘그 이름(the Name)’이라고 만 불렀다(레 24:11). 옛날 서기관들이 성경 복사 시 자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기도한 후 경건하게 필사를 하다가 하나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시 몸을 씻고(齋戒), 새 옷, 새 잉크, 새 붓으로 기도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 그들은 너무 거룩하게 여겨 하나님 이름을 부르거나 쓰지 않고 그 대신 "Adonai" ("Lord"). 로 부르거나 썼다.
하나님의 이름은 구원과 능력과 승리의 이름이 된다. 구원의 이름-다른 이로써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행 4:12).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그의 이름은 능력이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매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라고 선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가 승리했다. 하나님의 이름은 승리의 이름이다. 이 구원과 능력과 승리의 이름이 되시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짊어지고, 우리의 말에서, 동기에서,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드러내는 우리의 삶이되어야 한다.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妄靈되게 부르지 말라고 명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망령”이라는 뜻은 “헛되게”이다. 노망하여 보통상태를 벗어난 언행을 하듯이 하나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 당신의 이름을 사용하고 적용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망령되이 쓰지 말라 하신다. 쓸데없이, 하나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고 적용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강력하게 벌하실 것을 선포하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칭호나 명칭을 경솔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보훈, 106).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호칭에서 아버지는 친밀성을 나타내지만 그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자녀들은 항상 그의 무한한 위엄과 위대함(참조 사 57:15)을 깊이 의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함(참조 6:5)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 5:2)는 말씀을 의식하는 것은 통회하는 심령에 구원의 첫째 조건인 경외와 겸손의 정신을 소생시킨다. 친밀한 아버지라고 하여 버릇없이 구는 것은 안 된다. 아버지는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아니 아버지이시기 전에 온 세상 만물 위에 가장 높임을 받으시어야 하는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이 되신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 거룩함을 침범하는 자가 있다면 전 우주를 뒤흔들어 이를 지키려고 하신다. 우리는 아버지를 무한한 두려움으로 대하고 기도할 것이다.
Rudolf Ott이 1917년에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 출판하였다. 하나님의 성스러움은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로 신앙의 기본적인 지반이 된다. 오토는 '누멘'(numen : 신·영혼·신성)에서 '누미노제'라는 용어를 만들어 '누미노제를 인지하는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 우리는 '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어떤 것을 다루게 된다…… 그 느낌은 때로 부드러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예배에 깊이 몰두하는 평온한 상태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안정되고 일관된 상태에 있는 영혼이 충만해져서 한동안 두려움으로 전율하게 한다. 피조물이 마음을 졸이며 떨고 말문이 막히는 겸손한 상태가 되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 앞에서일까? 그것은 표현할 수 없고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신비' 앞에서이다." 종교는 거룩함, 신비로움(mysterium), 경외감(tremendum), 탄복(fascinans: 오토는 종교가 가진 독특함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종교적 감정들은 라틴어를 통해서 나타낸다)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의 몸 안에 내재된 신감을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사야는 이런 체험을 하였다(6:1,5) 천사들도 머리를 들지 못하고 “거룩” “거룩” “거룩‘한다.
현대교회는 아같은 확실한 개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아버지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어떤 대상을 섬기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거룩하게 되기를”- hagiasthetho, 동사 aJgiavzw 의 명령법, 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 문법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그 형용사는 hagios이다. 동사 hagiazo는 거룩하게 숙고하다. 다르게 여기다. 성별하다의 뜻을 지녔다. 하나님은 구별된 분이며 세상 그 무엇과도 다른 지존하신 분이시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사 8:13)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의 거룩성이 죄를 불사르기에 우리가 직접 그 분과 만날 수 없다. 초월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지극히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세는 호랩산에서 하나님 앞에 신발을 벗고 조아렸다(출 3:5).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잃은 신자는 마치 처녀성을 여자와도 같다. 신앙은 왕의 앞에서 侍下의 생활이다. 하나님을 부르기만 해도 외경의 눈물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예수 십자가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지존자(至尊者)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존경심을 가지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편 111편 9절)”(보훈, 106). 식탁에서 담소하다가도 하나님 이름이 나오면 단정하게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한다.
IV.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생활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진다.
자녀가 그릇된 삶을 살아가면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 호로 자식, 아비 없는 자식이란 욕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피조성, 의존성과 불완전성, 미천함을 깨달아야 가능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상에 내보내신다. 그러므로 생활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야 한다. 이러한 간구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품성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생활과 품성으로 하나님의 생애와 품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대는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없고 그분을 이 세상에 나타낼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다”(보훈, 107).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이 땅에서 야비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명을 어기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는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소망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스캔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 그 결과 왕국 그 자체의 기반이 요동치는 위태로운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지 않는 한 인간은 절망적 존재로 전락된다. 거룩한 공포감이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연습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 12:28)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을 기뻐하며 그 선전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음과 숙명적으로 묶여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ㅡ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의미는 목숨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는다. 긴 인생을 살아도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산 적이 없다면 인생을 헛되게 산 것이 된다. 한 사람이 짧게 살아도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기뻐하고 그 분을 사랑하면서 살았다면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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