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 Pilgrims
순례자들 Pilgrims
벧전 2:11 (한글 KJV): “사랑하는 자들아, 타국인(sojourners, paroikos) 같고 순례자(pilgrims, parepidemos) 같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혼을 거슬러 육신의 정욕들을 멀리하라.”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strangers, xenos, 크세노스)과 순례자(pilgrims, parepidemos)로라 증거하였으니”
순례(巡禮)는 일반적으로 종교적 의무 또는 신앙 고취의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뜻한다. 킹제임스역에서는 '순례'란 단어가 6번 나온다(창47:9; 출 6:4; 시119:54, 히11:13, 벧전2:11). 그러나 개역개정판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개역개정성경은 '순례'를 '나그네' 또는 '거류' 또는 '행인'으로 변역하고 있어 '순례'의 뜻이 명료하지 않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땅(세상)에서 낯선자(strangers)이다. 타국인이란 번역은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이다. 순례자(pilgrim)란 믿음으로 소망의 포로가 되어 가라고 명한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순례자의 목적지는 하나님 앞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순례하는 사람들이다.
순례자는 목적지가 확실치 않은 방랑자와는 다르다. 순례자는 나그네이면서 뚜렷한 소망을 품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히11:14~16). 또한 살인을 하고 도피자와 유랑자가 된 나그네 가인과는 다르다(창4:12).
순례자는 관광객과는 다르다. 이 시대는 관광의 시대이다. 교회도 관광객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나간다. 주말 예배를 주말 소풍으로 여기는 풍조가 일고 있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이 특별한 날에나 한 번씩 교회를 찾는 이들도 많다. 기분 전환을 기대하는 이들의 취향에 부응하는 각종 이벤트성 프로그램 개발 시대이다. TV광고에 길들려진 이 세대의 집중력은 30초를 넘기지 못한다. 그에 따라 교회도 부단히 새로운 인물, 새로운 어떤 사상, 새로운 체험을 추구한다. 신유 체험, 인간 잠재력 극대화, 심령과학, 성공하는 삶, 기공체조, 아마겟돈 등 새로운 것들이 등장한다.
1. 순례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이다. 이들은 이 세상 어느 곳에 목표를 두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섭리의 인도를 받아 믿음으로 여행하는 나그네 순례자들이다(히 11:13).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구자들은 순례자들이다. 특히 75세에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전의 믿음의 영웅들과는 달리 믿음의 순례의 길에 나선 제1호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너는 떠나가라(레크 레카)9창 12:1)”고 명하자 그는 과감하게 삶의 둥우리, 현대 이라크 바그다드인 문명의 요람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가라는 명을 따라 가지만 처음에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다.
믿음을 지닌 자들이 순례자의 노래를 부른다. 시 121편, 125:1; 127:1 – 이들은 믿음을 붙잡고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며 간다.
2. 순례자는 꿈과 환상을 지녔다. 시 126: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온을 향한 희망의 노래 – 꿈과 환상을 지닌 사람들의 노래이다. 포로에서 돌아온다는 것이 불가능한 기적으로 여겨 진 것인데 순례자들은 그 기적을 꿈꾸었다. 그들은 기적이 현실화 되는 꿈을 꾸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사무엘 울먼의 “청춘” 이란 시는 노래하며 걷는 순례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장미 빛 뺨도, 빨간 입술도 아니며,
나긋나긋한 무릎도 아니다.
그것은 의지와 상상력이며 활력이 넘치는 감성이다.
그것은 삶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
나이만 먹는다고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버릴 때 우리는 늙는 것이다.
나이는 피부에 주름살을 만들지만
열정이 식어버리면 정신에 주름살을 만든다.
걱정과 두려움과 자기불신은 용기를 꺾고 정신을 죽여 버린다.
60살이든 16살이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경이로움에 끌리는 마음,
미지의 것에 대한 꺼지지 않는 호기심,
그리고 삶이란 게임에서 기쁨이 있게 마련이다.
당신과 내 가슴의 한 복판에는 무선 전신국이 있다.
그 무선전신국이 인간과 하나님에게서 오는 아름다움,
희망, 환호, 용기 그리고 힘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동안은 당신은 젊은 것이다.
안테나가 내려지고 당신의 정신이
냉소의 눈과 비관의 얼음으로 덮이면,
당신은 나이가 20살이라도 늙은 것이며,
안테나가 올라가 있고 그 안테나를 통해
낙관의 전파를 수신하면,
당신은 나이가 80살이라도 젊은 채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3. 순례자들의 목적지는 본향 하나님 나라이다(계21:16, 고후12:2; 빌 3:20).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이 얼핏 보면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하리만큼 위태로운 것에 불과하다. 순례자는 이 세상의 라이프스타일의 정반대 방향을 선호한다. 이 땅의 철학, 제도, 취향을 떠나 정반대 방향으로 유턴한다.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하여 나간다.
필그림들이 1620년 9월 6일, Mayflower를 타고영국을 떠난 이유는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항해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순례의 길이었다. 믿음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세상에서 필그림으로 나선 이들이다. 이들은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가기 전에 먼저 화란(Holland)으로 갔다. 그러나 점점 화란화 되어가고 있는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화란의 생활방식이 자기들의 자녀들에게 바른 교육과 도덕관을 심어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신앙의 자유와 아울러 자녀들에게 바른 교육과 영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화란을 떠나 미국 신대륙을 향한 긴 항해의 결단을 내렸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필그림을 기억하면서 감사절을 지키고 있지만 본래 목적하였던 순수한 신앙의 유산과 바른 교육은 얼마나 유지되고 있는가?
4. 순례자들은 배우는 자들이다. 길에서 헤맬 수도 있다. 캄캄함이 온 세상을 덮고 있어 등불이 필요하다. 나침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이 되고 나침판이 된다(벧후1:19). 순례자들(parepidemos)은 제자(mathetes)들이다. 제자는 말씀의 학습자이다. 삶의 현장이 학습현장이 된다. 삶의 현장이 순례자의 학습실이고 말씀의 실습장이다.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며 배운다. 이들은 평생 여정이 한 곳, 즉, 하나님을 향하는 말씀의 사람들이다.
5. 여행자들을 만나 동행하며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감싼다. 그들 중에는 순례자도 있고, 도피자와 유랑자도 있다(딤후4:10-18). 1620년 9월 6일, 영국 Plymouth 를 떠나 신세계를 향하여 갔던 Mayflower 배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스스로를 "Saints"라고 불렀던 44명의 필그림들과, 66명의 다른 사람들이었다. 필그림들은 그들을 "Strangers"라고 불렀다. 65일 동안 그들은 추위와 풍랑과 더불어 싸우며 고통스러운 항해를 하였다. 목재로 만든 배에 불이 붙을까 두려워서 찬 음식을 그대로 먹기도 하였다. 1620년 12월 플리머스에 상륙한 이들은 반수 이상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인디언에게서 옥수수 재배를 배워 최초의 혹독한 겨울을 타개해 나갔다. 이것을 기념하여 추수감사절 행사가 시작되었다.
긴 항해를 하는 동안 "Saints"들과 "Stranger"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로 인하여 적지 않은 갈등도 있었다. 그러나 신대륙이 눈에 비쳐 올 때에 그들은 회의를 갖고 합의를 하였다.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이라고 칭하여지는 이 합의 내용은 서로 동등함을 인정하고 두 그룹이 연합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모두가 스스로를 "필그림“이라고 불렀다.
오늘 우리들 필그림에도 strangers 들이 합류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 세상적인 목적으로 올라 탄 사람, 교회생활과 그리스도적 가치관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등. 이러한 차이들은 때로 교회생활과 순례의 여정에 갈등과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긴 항해 후 신대륙에 도달했을 때에는 Mayflower 호에 탔던 모든 사람이 필그림으로 내렸던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소망과 교훈을 던져준다. 처음에는 서로 생각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신앙의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인내로 항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모두가 동등함을 인정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필그림의 신앙을 함께 나누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지만 결국은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한 목적을 가지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려움과 갈등을 참고 인내하면서 고통을 함께 하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동등함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Saints 들의 수가 적었지만 결국 수가 더 많았던 Stranger 가 필그림에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속화되기 쉬운 오늘날, 언제 얼마나 많은 stranger 들이 필그림에 합류하게 되어도 결국에는 모두가 참된 순례자, 성도로서 하나님 나라에 다다를 수 있도록 우리는 순수한 믿음과 바른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이다.
6. 순례자들은 강을 건너는 자들이다. 히브리라는 말에는 강을 건너는 자라는 뜻이 들어 있다. 강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움의 상징이다.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다. 출애급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다. 순례자의 길은 편안하지 않고 계속 장애물이 나타나 인내로 가야하는 길이다(히 10:33-36).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타국인으로서 취급당한다(요15:19). 무거운 짐을 가져가지 않는다(히12:1).
여행 도중에 닥치는 강도, 맹수, 재난등을 감수해야 한다.(고후11:23-27). 순례자들은 바람을 거슬려 가는 자들이다. 즉, 바람을 거슬러 가는 순례자들이다.
스트레스가 많은 병의 원인이 된다는 얘기를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면 스트레스는 모두 나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스트레스에는 긍정적 스트레스와 부정적 스트레스가 있다. 스트레스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삶의 활력을 주기도 한다. 긍정적 스트레스는 일종의 자극으로, 일을 하거나 성취욕을 돋구어주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일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긴장감, 에너지와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만약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무기력하고 생동력이 없게 될 것이다. 문제는 부정적 스트레스다. 적당한 긴장이 해로운 스트레스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 때 그 때 생겨나는 스트레스를 누적 시키지 말고 삶의 활력소로 활용하는 생활의 지혜와 습관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아스퀴스(Asquith) 부인은 <추억(Memoirs)>에서 자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소유인 광활한 초원을 가로지르며 말을 타곤 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아아치형 다리 아래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게 되었는데 거기서 한 방랑자가 않아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다음에 당신이 가야할 길을 어떻게 결정하나요?” 그가 대답했다. “항상 바람을 등에 맞으며 간단다.” 이것이 바로 방랑자들의 선택이다. 그들은 바람이 그들의 등 뒤에서 불기를 원한다. 그래야 걷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례자는 다르다. 순례자는 방향을 미리 정해 놓고 걷는다. 분명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 길에 바람이 맞부딪혀와도, 거센 바람으로 인하여 얼굴이 따갑고 발걸음을 떼어 놓기가 힘이 들어도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인내하며 힘을 다해 걸어가는 것이 순례자의 행로이다. 연이 날아오르는 것은 연이 바람을 피하지 않고 바람을 타고 오르기 때문이다.
순례의 여정에 불어오는 시련의 바람, 고독의 바람이 싫다고 돌아서 버리면 걷는 것은 쉬워질 수 있으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곧 방향을 상실하고 바람 따라 떠도는 방랑자의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온 몸에 활력을 가득 채우고 붉게 물들이며 피를 뺨으로 보내는 것은 우리 얼굴에 와 부딪히는 바람이다. 때로 고독해도,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 천성으로 향하는 그 길, 우리 주님 앞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갈 때 우리 삶에 건강한 영성이 형성되고, 우리의 인격이 성화되며, 삶의 질이 승화되는 복된 순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안식일의 메시지가 담긴 주역에 나오는 地雷復에는 제7일이 하늘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길이 열리는 날로 나온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질병이 없어지고, 용서가 있으며, 지나간 삶을 정리하고, 다시 새 출발을 하는 날이다. 천지창조의 기념일, 구속의 기념일, 구속은 생명을 어둠, 음울, 죽음에서 건져내는 날, 살려내고 생명의 리듬이 힘차게 퍼지는 날, 새 출발을 하는 天道 순환의 날, 희망의 날이고 아무리 큰 고난이 엄습하여 와도 희망을 일깨우는 새날이다.
7. 목적지 본향에 도착하면 기쁨이 넘치고 그동안의 고난을 모두 잊는다(계21:4). 그래서 순례자들은 노래하면서 가고 있다.
오늘도 불러 봅니다. "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돌아가리~/ 나는 순례자~ 돌아가리~ / 날 기다리는~밝은 곳에~ / 곧 돌아가리~기쁨의 나라~/ 예수와 함께~길이 살리~/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 이 슬픈 세상을 가며
수고도 병도 위험도 없는 내가 가는 그 밝은 곳
나는 가네 내 아버지께 더 이상 방황 없는 곳
나는 가네 십자가 앞에 주님 품에 돌아가네
"역사를 지닌 순종 -순례중인 하나님의 백성이 오래된 언약궤의 노래를 다시 부를 때, 역사의기억들도 되살아나 다시금 체험된다. 결국 제자들은 광대하고 풍성한 순종의 실재를 딛고 행보하는 셈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여정으로 이 비탈길을 오르는 최초의 인간도, 최후의 인간도 아니다. 같은 행로를 따라 같은 길로 언약궤를 따라 결단과 기대에 찬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 ...기억이란 우리의 입장을 진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하는 데이터 뱅크다. 자신의 뼛속까지 다윗을, 혈관에는 예레미야를, 손끝에는 바울을 그리고 가슴에는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과 지난주의 체험을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을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순종은 판에 박힌 종교의 틀 안에서 맴도는 지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희망찬 경주다.“
8. 순례자들은 역사의 마지막 때 능력의 화신으로 나선다. 순례자는 地雷復 새 역사를 열어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을 지닌 순례자들에게 이른비와 늦은비를 통하여 능력을 부여한다.
“위대한 복음의 사업은 그 시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 못지않은 큰 능력이 나타남으로 마쳐지게 될 것이다. 복음 사업의 시초에 이른비가 내림으로 성취된 예언들은 그 사업의 종말에 늦은비가 내림으로 다시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의종들은거룩한헌신으로빛나고밝은표정을얼굴에짓고 하늘에서온기별을선포하기위하여이곳에서저곳으로분주히왕래할것이다 온 세상은 무수한 음성으로 경고를 받을 것이다 이적들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며 표적과 기사들이 믿는사람들에게 따를 것이다 사단도 또한 거짓 기사들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까지 할 것이다 계3:13 참조. 이리하여 세상의 거민들은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취하게 될 것이다" GC 611-612.
“밤의 이상에서,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있을 큰 개혁 운동에 관한 광경이 내 앞을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다른 이적들이 행해졌다. 심지어 오순절의 큰 날 전에 나타난 것과 같은 중재의 정신이 보였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가정들을 방문하고 그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있는 것이 나타났다. 사람들의 마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각성되었고 참된 회심의 정신이 나타났다. 사방에서 진리의 선포에 대하여 문을 활짝 열었다. 세상은 하늘의 감화로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진실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큰 축복을 받았다. 나는 감사와 찬양의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1844년에 목격한 것과 같은 개혁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였다.”(9증언,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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