祈願 第5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본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누가복음 114).

 

I. 들어가는 말

1. 5월은 가정의 달을 맞아

5월은 가정의 달이다. 5월에는 어린이 날, 어버이날이 들어 있다. 가정에 그늘이끼다 못해 지옥으로 변모하여 가는 세상이다. 가정은 사회의 근간이 된다. 오늘날 근간이 되는 가정이 무너져 가고 있다. 깨어져 가는 가정이 비일비재하여 가는 세상에 가정을 작은 천국으로 만드는 길은 무엇인가? 가정에 가정의 달에 가정을 새롭고 매혹적으로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모와 자녀, 아내와 남편 사이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일까? 답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 필요한 것을 주의 기도문과 연결시켜 본다면 용서일 것이다. 용서는 가정을 살리는 길이다.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의 허물과 약점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용서가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가정이다. 가정의 달 5월을 사랑과 감사로 완성하여 갈 밑바탕에 용서가 먼저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 가정은 용서->사랑->감사로 가득한 5월이 되어야 한다.

 

2. 5기원의 특색

4기원은 삶의 현장에서 필요로 한 것들에 관한 기원에 그 초점이 있다. 이에 비하여 제5기원, 6기원은 인간의 심령의 간절한 소원을 담고 있다. 이 심령의 절절한 요구는 인간의 육신의 요구보다 더 절박한 것이다. 심령의 요구에 관한 제5기원은 지나간 삶에 얽혀진 것들에 관련되어 있다. 용서가 삶의 현장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제6기원은 미래에 관련된 사항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보다 과거에 남긴 죄악적 삶이 나를 더 옥죄면서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3. 공자의 가르침

제자 자공의 질문을 받은 공자도 논어에서 용서의 중요성에 관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자공이 묻기를 평생토록 귀감으로 삼고 지키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한 마디로 말해서 무엇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그것은 바로 용서()이니라’”(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위령공 제23).

 

II. 십자가의 죄 용서와 제5 기원

신자의 간절한 소원은 지나간 삶에 얽혀진 무거운 죄의 짐에서 해방 용서라에 있다. 다윗은 지나간 삶에서 남긴 어두운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절박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51:1-3)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7-10).

 

인간은 모두 죄인들이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3-25).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신 사건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범한 모든 죄악은 그 대소경중을 막론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이미 완전한 용서를 받았다. 신자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침례를 받았을 때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은 죽고(6:6) 새 생명을 얻어 아주 깨끗하게 재창조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 제5기원은 십자가 아래에서 이미 용서받은 죄를 두고 하는 기도가 아니다. 5기원은 예수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신자가 날마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장애물을 두고 드리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답게 상아가야 하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일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동안 마음에는 죄과들이 켜켜히 쌓여져 간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1).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위에 나온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내면 모습은 어떤가?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였고, 그들의 본성은 변화되었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의 하늘 아버지를 닮아간다(참조 요 3:3~5; 요일 3:1). 그들은 전에 그들이 사랑했던 죄를 미워하고, 전에 그들이 멸시했던 미덕을 사랑한다(참조 롬 6:2, 6; 7:14, 15).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이전 죄들의 노예로 계속 있지 않으며, 그들의 이전 실수들을 상습적으로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분적으로 죄 씻음을 받아 재창조를 받았지만, 육신이 연약하고, 마귀가 더욱 기승을 부려 넘어지기도 하고 가끔 실수하는 것이 나라는 인간 실존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인간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특한 생각의 포로로 전락하기도 쉽다. 살면서 미워지는 사람이 생기고 원수가 다가오기도 한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삶의 얼룩들이 나를 덮쳐오는 때가 비일비재하다.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까지는 사는 동안 육의 여세는 온갖 기회를 이용하여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재기하고자 한다. 죄악의 현실이 거미줄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발버둥을 칠 수 밖에 없는 이중적인 존재인 것이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고 탄식한다. 이것은 정직한 신자의 공통적인 고백이며 체험이다. 신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하는 도그마를 앞세워 자기의 부끄러움을 덮어보고자 하나 모두 부질없는 짓에 불과하다. 우리는 날마다 그날 범한 죄를 회개하고 완전한 용서를 받아 다시 일어서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 제5기원은 필요하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역동적인 완전을 추구하지만, 무죄한 상태에 도달하여 회개가 필요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를 두고 엘렌 화잇은 다음 메시지를 남겼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중 아무도 죄가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산 사람들, 알면서 잘못된 행위를 범하기 보다는 차라리 목숨 자체도 희생하려고 한 사람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빛과 능력으로 존중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성질의 죄됨을 자복하였다”(COL 160).

자신의 성질의 죄됨을 자복하여야 하는 이런 진술의 저변에는 죄에 대한 더 넓은 의미가 깔려 있다. 의식적인 죄를 넘어서 무의식적인 죄에 대한 성경의 개념을 재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알면서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더 나가서는 무의식적인 죄가 인간의 본성(nature - 성질)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망의 쏘는 뿌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까지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고전 15:56; 3:20,21 낮은 몸).

 

우리가 예수께 더욱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품성의 순결을 더욱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죄의 극악함을 알게 되고 자신들을 높일 마음이 더욱 더 적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계속적인 영혼의 발돋음, 계속적이며 열렬한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와 그분 앞에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적 경험에 있어서 진보의 매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깊어질 것이다.”(행적, 561).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된 불순종의 내적 타고난 성향을 물려주었다(5BC 1128).

만일 어린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어머니가 방종하거나 이기적이고 조급하며 흥분적이면 그런 기질들이 아기의 성질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자녀들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악의 성향(性向)들을 상속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만일 어머니가 확고하게 바른 원칙들을 따르고, 절제하고 극기하면, 또한 그가 친절하고 온유하고 이타적이면, 그는 그와 같이 고귀한 모든 품성의 특성들을 아기에게 물려 줄 수 있다.”(치료, 372-373).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과 함께 용서를 받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살면서 빗나간 삶과 부채로 남아 있는 죄를 반복적으로 용서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더 회개가 깊어가고 넓어져 가면서 우리는 용서를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III. 죄는 채무()이다

5기원에 나오는 죄는 헬라어 오페일레마(opheilo)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법률상의 채무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이다(참조 롬 4:4). 여기서는 도덕적 및 영적 빚으로 사용되어 있어 죄는 빚으로, 죄인은 빚진 자로 묘사된 것이다. 빚이므로 갚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부채로 남아 있게 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 빚으로 남아 있다.

누가복음의 평행구절에서는 가 하마르티아 (aJmartiva)로 나온다(11:4). 이 말은 과녁에서 빗나간다는 뜻을 지녔다. 화살이나 총을 쏘았을 경우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을 마땅히 해야 하는데 이를 하지 못한 것이다.

7:36-50

시몬의 잔치석상에서 7귀신들려 어두운 생활을 하였던 마리아가 용서 받은 것에 대한 회개와 감사의 표시로 값진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와 발에 붓고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면서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26:6-13; 7:36-50). 이 사건은 내적 성령의 감동과 인도에 따른 외적인 증거의 행위이었다. 그 옥합의 향유는 마음으로 믿음과 사랑의 존경을 상징한다. 가롯 유다는 구제금의 낭비라고 비판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자기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항시 기억되어야 하는 사건으로 칭찬하셨다. 그러면서 이름자 500:50 데나리온의 채무 탕감의 비유를 하셨다(7:41-43).

마리아가 바친 300데나리온 값이 나가는 나드 한 근(12:1-5)이 되는 향유를 예수께 부은 사건을 두고 바리새인 시몬과 가롯 유다의 평가사건이 여기에 나온다. 시몬의 눈으로는 막달라 마리아가 희망이 없는 죄인이었다. “그 대가 악하면 악할수록 더욱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자에게서 선의 가능성을 발견하셨다. 500 데나리온 대 50데나리온 빚진 자(opheilo)의 이야기로 시몬의 죄와 마리아의 죄를 비교하였다. 죄는 빚이다.

 

베드로가 용서의 한도에 관하여 랍비들의 3회 수준을 언급하면서 7회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70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시었다. 인간은 심판자가 아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자가 되신다. 인간은 평가하는 자가 아니고 용서하는 존재이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1만 달란트 대 100데나리온 빚진 자 비유로 용서를 설명하셨다(18:24-35). 오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천만 달러 대 20 달러, 50만분의 1이다. 1만 달란트를 은화로 환산하면 16만년 동안의 임금이 되고, 금화로 환산하면 500만년 임금치에 해당된다.

일만 달란트의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을 받은 신하가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있는 동관에게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을 알게 된 왕은 진노하였다. 빚진 동관이 왕에게 탄원했던 것처럼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채무 때문에 탄원하여 왔지만 그는 냉담하다 못해 잔인하게 다루었다. 바로 조금 전에 천문학적인 채무 탕감을 받은 그 사람은 조금만 더 참아 달라는 동관의 호소에 유의하지 않았다. “이 은혜를 저버린 종은 마음속에 오직 자기에게 빚진 적은 금액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빚진 돈 전부를 갚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자기에게서 내렸다가 은혜스럽게 취소된 선고와 유사한 선고를 그에게 그대로 집행해 버렸다.”(실물 245)

 

이 왕이 베푼 용서는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나타낸다. 종을 불쌍히 여기고 빚을 탕감해 준 왕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사람은 율법을 범함으로 인하여 죄의 선고 아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가리우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시고 각 사람에게 피로 사신 용서를 값없이 제공해 주신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130:7).(실물 244)

...

우리 자신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빚을 지고 있다.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이게 했다. 구주를 통해서 나타난 은혜가 우리의 구속과 중생을 이루게 하고 예수와 더불어 후사가 되도록 역사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실물, 25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기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악의 짐을 담당하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 그래서 그분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고 말씀하신다. ”(보훈, 114)

 

사하여 주옵시고”- 헬라어 아피에미(aphiemi)내보내다또는 해고하다”, “떠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것은 우리의 용서하는 습성을 말한다. 사본 증거에 의하면 이렇게 보는 독법과 우리가 이미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독법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는 우리가 동료들을 사하여 주지 않으면 혹은 사하여 줄 때까지는 감히 우리를 사해 달라고 간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참조 5:24; 18:23~35 주석. “사하다라는 의미는 아마 회개하고 탄원하는 영혼은 평안히 보냄을 받는다는 개념에 근거한 것 같다.

 

VI. 용서의 조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에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 받고 싶다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 받은 우리는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용서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너비를 더 깨닫고 배워간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마치신 후 이 제5기원에 대하여 명확하게 다시 가르치셨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15)

마태는 기원 제5에서 사용한 용서하였다는 과거 동사(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누가는 지금 용서한다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어 아직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과 축복을 구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라고 기도를 하면서 어찌 용서성이 없는 정신을 품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랄진대 우리는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자 하는 그와 같은 모양으로 그와 같은 정도로 남을 용서하여야 할 것이다. ”(정로, 97)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5). 어떤 것으로도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변명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용서를 체험하게 되면 죄인의 마음은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크신 마음에 가까이 끌리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조류는 죄인의 심령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에게서 다시 다른 사람의 심령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를 통해 친히 나타내신 동정과 자비는 또한 그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서도 나타날 것이다.

그가 비록 한때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의 각박한 정신은 그가 이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고 죄사함을 받기 전과 똑같은 형편에 처해 있다. 그는 자기의 회개를 부인했고 그의 죄는 마치 그가 회개하지 아니했던 것처럼 그에게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몰인정을 대조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가 바로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모든 용서는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은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7:2)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실물, 251)

 

V. 용서의 축복

5기원은 내가 다른이를 용서하면 나도 하나님께 사죄의 기원을 올릴 수 있다. 용서해야 용서(구원) 받는다.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축복들이 따라온다.

1. 용서하면 건강의 축복을 받는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손해는 자기에게 돌아온다. 이는 플로리다병원과 스탠포드대학 의대가 용서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 연구한 결과에서 잘 드러난다. , 용서하는 사람은 분노, 적대감을 줄여 고혈압을 낮춘다는 것이다. 가정의 치유와 회복은 용서의 손을 먼저 내미는데 있다<출처: Kaykuzma(ed.), FitForever (Review and Herald, 2005), 34>

용서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심장박동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용서란 가장 강력한 사랑의 파도 꼭대기에 올라타는 것이다. 용서는 자기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공평한 고통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용서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가 되어 주름진 과거를 펴 재창조함으로써 새 출발을 하게 하는 것이다.

2. 용서는 자유함을 준다.

용서하면 갖가지 그늘, 두려움, 증오에서 해방된다. 증오는 마귀가 준비한 잔인한 무기이다.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대통령 취임식 때 그 취임식에 자기를 27년 동안 괴롭힌 간수들을 귀빈석에 초청하였다. 클링턴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그가 27년간 괴롭힌 자들을 어떻게 귀빈으로 초청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생활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 자유가 없다. 자유의 뿌리에는 용서가 있다. 용서란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을 오르다가 그 짐을 내려놓는 것과 같다.

용서란 하프 마라톤을 한 다음,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것과 같다. 용서란 포로를 풀어 주고 보니, 그 포로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쇠사슬에 묶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암울한 일에 집착하면 소중한 삶을 낭비하게 된다.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사는 길은 용서의 길이다. 용서해야 미래가 보인다.

3. 용서는 오히려 축복(칭찬)의 언어를 사용케 한다.

용서는 용서할 감정이 생길 때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감정이 생길 때 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용서는 명령이다, 명령에 순종하여야 한다. 자녀들에게 칭찬의 말을 많이 하여야 자녀들이 산다. 칭찬을 갈급해 하는 자녀들이다. 얼마나 많은 말로 가정에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가. 지옥은 말로 만들어 진다. 가정은 평가하는 곳이 아니다. 세상이 평가하는 곳이다. 가정은 칭찬하고 북돋는 곳이다. 기대를 낮추고 존재 그 자체를 칭찬하라.

4. 용서는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가 된다.

용서의 진입로에서 들어서면 사랑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용서는 사랑의 길로 나가는 준비를 시킨다. 사랑의 주체가 되어 갈 때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진다. 용서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부족하다. 인간은 악기 연주하는 법을 배우듯이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사랑을 배우게 된다. 이 세상 살 동안 가장 중요한 일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5. 하나님의 건망증을 따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신 후 기억치 못하신다. 다윗이 그 험악하고 가증스런 죄를 범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시 51:9-10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죄악들을 모두 용서하시고 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을 책망하면서 다윗을 칭찬하셨다.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왕상 14:8). 이 칭찬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잊어버리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forgive) 잊으셨다(forget). 그리고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03:12).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7:19).

더 나아가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68:19). 날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자 기다리신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30:18).

 

이야기:

1. 요셉의 용서하는 마음 (45 )

 

2. 잃어버린 용서의 기술

Johann Christoph Arnold1998년에 펴낸 The Lost Art of Forgiving-Stories of Healing from the Cancer of Biterness (잃어버린 용서의 기술-쓰라림의 암으로부터 치유되어간 이야기)에서 범죄, 배신, 학대, 증오, 전쟁의 북새통 속에서 용서의 힘으로 치유되어간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야기 한 토막

브루더호프 공동체와 긴밀히 교제하고 있는 한국 쉴터 공동체의 박한결 자매의 사연은 어떠한 배신의 아픔도 용서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결 자매는 대학생 시절, 자신을 무겁게 누르는 삶에 대한 절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힘들게 살아가던 중에 쉴터 수양회에 참석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실한 가정을 이룰 희망을 품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 딸 지혜를 낳았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생각만큼 순탄하지 않았고, 전혀 상상도 못할 일이 한결 자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저는 남편이 날 사랑하고 우리 아이 지혜가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저와 지혜에게 더 관심을 쏟는 것 같았고 저도 남편을 믿었습니다. 직장에서 퇴근하는 시간이 늦어져 새벽에 들어오는 날이 잦아져도 가족을 위해 고생하느라 그렇겠지,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제 감정은 알 수 없이 우울해지고 남편도 그전과 달리 곧잘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남편의 전화 통화를 통해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몸을 떨었습니다. 1년 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한 번은 용서하지만 더는 절대 안 된다, 그땐 이혼이다.’라고 생각해 오던 터였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배신감과 분노에 압도되어 제발 나가달라고 남편에게 애원했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상황들을 참고 살아왔던 것이 너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자고 있는 지혜 옆에 누워 울음을 삼키며 최대한 냉정해지려고 했지만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내 존재가 사라졌으면 했습니다. 이제 막 세 돌을 넘긴 지혜를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지면서, ‘내가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거절감과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감정이 복받쳐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죽겠구나, 이러다가 정신이 나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거야. 그래야만 해. 예수님, 도와주세요.’라고 되뇌이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 가정의 비전과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며 두려워 떠는 제 영혼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미안해 하기는 커녕, 날카로운 말들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당신도 젊었을 때 좋은 사람 다시 만나라. 당신도 충분히 만날 수 있다. 아이는 당신이 키우면 좋지만, 싫다면 고아원에 보내라.’라는 그 사람 말에 총이 있었다면 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그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들을 생각하면 거절감과 수치심, 분노, 두려움으로 견딜수 없었고, 잊으려하면 할수록 영화처럼 또렷이 기억날 뿐이었습니다. 남편이당신은 그렇게 자기인생에 대해 자신감이 없느냐? ’고할 때는, 모든 원인이 내게 있는것 같았으며, 헤어지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내 자신이 미워지고 싫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내 자신이 증오스러웠고, 이런 상황을 허락한 하나님도 원망스러웠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괴롭힐 대로 괴롭히다가 연민에 빠져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저의 영혼이 파괴 되어 감을 느꼈습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영혼은 지옥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용서하는 것이라면 그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용서는 내 의지의 선택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는 어떠한 선한 길로도 갈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제 안에서 죄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고, 한 번에 끝날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새로운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옮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얼굴이 확대되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위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저주받은 인간의 형상이었습니다. 치욕적이고 무자비한 십자가형으로 인해 오열하며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부르짖는, 아무런 기풍도 느낄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끔찍해서 눈을 돌려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죄악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제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그토록 처참히 죽어야 했던 것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다른 죄인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모순된 모습은 하나님의 자비는 받아들이면서 그 자비를 베풀기는 거부하는 자였습니다. 그제서야 공동체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를 얼마나 용서해 주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저를 평생 용납한 부모님, 같이 사는 동안 저를 용납하고 용서한 공동체 형제자매들.... 또한 저는 남편만이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정작 제 자신이 어둠의 세력에 갇힌 자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제 자신이 바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되면서 남편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내가 남편에게 행했던 무관심한 태도와 잘못들이 기억났습니다. 과거에 남편이 저의 사랑 없음으로 겪은 고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제 잘못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분노를 품고 찾아갔던 그 여자의 집에서 그녀를 향한 강한 연민이 넘쳐 그녀에게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매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용서는 가능했으며, 그 가운데 남편과 더불어 제 자신이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더욱 감사한 것은 그제서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사람은 1998년에 영국 브루더호프를 방문해서 몇 개월 동안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가족에게 주신 사랑을 재확인하였고, 현재 쉴터 공동체에서 부부간의 깊은 신뢰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 외도로 인한 신뢰 관계의 파괴가 회복되려면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다. 처음에는 둘이 따로 떨어져 살면서, 두 사람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상담을 받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두 사람은 부부간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의지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