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祈願 第六>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본문: 마 6:13(눅 11:4)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I. 들어가는 말
에스키모인 들의 늑대 잡는 비결- 예리한 칼날 위에 피를 두툼하게 여러 번 발라 얼린다. 늑대들이 그것을 핥다가 혀가 얼어서 감각 기능이 상실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 피를 빨다 탈진하여 죽는다.
제6기원은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출을 구하는 기도이다. 구원 받은 신자라도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시험에 들 수 있고, 악에 빠질 수 있다. 그 누구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시험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 기원은 자기의 연약성을 깊이 깨닫게 하는 기원이다.
이 세상은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면서 악의 영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따라 붙는다. 그리스도인 마음 안에서는 “미혹의 영”(요일 4:6)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밖에서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대적 마귀”(벧전 5:8)가 온갖 시련으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 우는 사자처럼 사방에서 의인들을 미혹하고 삼키려고 광분하고 있는 시험들이 널려 있다. 홈쇼핑 광고에 현혹되어 상품구입하고 후회하기 쉽다. 그러기에 사방에서 몰려오는 시험으로부터 보호가 필요하다.
여태까지의 기원들은 긍정의 탄원들이지만 여기서는 부정의 탄원을 올린다. 이 기원은 두 개의 탄원으로 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를 구하는 소극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에서 구해 달라는 적극적인 것이다.
II. 시험의 의미
시험에 대한 헬라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v", peirasmos)이다. 그 동사는 페이라조(peirάζω)이다. 신약성경에서 명사와 동사 형태로 약 60회 나온다. 시험의 의미는 내적시험과 외적 시험에 따라 그 의미에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악의 창시자로부터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나온다. 신약성경에서 페이라스모스가 유혹의 의미로도 또는 시련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어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시험은 내적, 도덕적 유혹(temptation)과 외적인 시련(trials), 시험 치는 일(testing), 또는 증명하고(to prove)과 조사하는 일(to examine) 의미로 구분된다.
1. 내적, 주관적 시험이나 유혹((temptation)
시험은 마음을 죄악으로 끌어들이거나 나쁜 길로 꾀어 의무에서 이탈케 하는 일이다. 시험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상태와 방법이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유혹으로 이끄시는 분이 아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외적 고통 및 내적 유혹으로 죄악에 빠뜨릴 목적으로 주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페이라조)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시험에 직면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지만, 그 시험에 넘어지거나 실패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내적 도덕적 시험으로 유혹하는 것에는 “자기 욕심(epithumia)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에 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물론 에피두미아 배후에는 거짓의 아비가 있어서(요 8:44) 우리를 포로로 삼고자 유인하는 책동을 하고 그 결과 우리 마음이 갈망하거나 쾌락 추구를 하게 한다.
야고보의 메시지에서 내적 시험의 과정이 끌려->미혹(미끼로 미혹)->욕심의 잉태->낳고(죄 출생)->장성->사망이라는 단계별로 묘사되어 나온다. 마치 내 머리 위로 새가 날라 가듯이 안 좋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겠지만 새가 매 머리에 앉아 둥우리를 짓듯이 에피두미아 욕망이 잉태하는 일은 자기 책임이 될 것이다.
<참고>
“시험은 죄를 짓도록 유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사단과 우리 마음속의 악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야고보서 1장 13절).”(보훈, 116).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유혹을 받아 넘어진 후 변명하였듯이 인간은 자기의 그릇된 행동에 대하여 변명하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기 일쑤다.
2. 외적, 객관적 시련과 시험(trial, test)
외적 고난, 시련, 박해를 두고 사용된다. 페이라스모스가 “시련(dokimion)과 동의어적으로도 나온다(약 1:2-4). 악마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넘어뜨리기도 한다. 이런 시련은 하나님께서 선한 의도로 인내를 연단하는 때나,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시고자 할 경우에 허용하시는데 이런 경우에 오히려 즐거워해야 한다(벧전 4:12). 악마는 하나님의 시련을 이용하여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시험” 즉 “검증”은 하시지만(창 22:1; 출 20:20 등), 결코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는 않으신다(약 1:13). 사단은 시련을 유혹으로 바꾸어 인간을 넘어뜨리고자 유혹한다(욥의 사례).
3. 악(ponhrov", poneros)
포네로스는 악한 사물 혹은 악한 사람을 가리킬 수 있다. 본 기원에서는 어느 쪽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문법적으로 남성명사로 보면 “악한 자,” 즉, 형이상학적인 마귀나 인간세상에서 그 대행자가 되고, 중성명사로 보면 악이나 악한 것을 뜻한다. 접속사 “다만(ajllav, alla, but, 오로지)”에 비추어 보아 “악”과 선행하는 절에 있는 “시험”을 평행 대구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악”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나 외적 시련을 가리킨다. 그 잘못된 행위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에피두미아의 결과로 다가온 것들이다.
악이란 도덕적 악과 천연세계의 악(자연세계의 악)으로 구분된다. 천연세계의 악은 도덕적 악의 결과이다. 즉, 죄가 뿌리라면 악은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 가지 또는 열매로 볼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의 도덕적 악의 결과가 외부 피조 세계의 악을 유발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악은 신체적 연약성, 불구, 질병, 및 피조세계에 몰아쳐 오는 재난들로 나타난다. 욥은 이런 외적 악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원을 제6기원과 구분하여 별도의 기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평행구적 의미에서 같은 범주에 넣고자 한다.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無로 전락시키는 악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출하실 수 있는 분이다.
III. 시험과 시련의 영적 의미
1.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자라나게 하고 성숙하게 하신다.
야고보의 권고에 따르면 시험에는 다음과 같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인간은 유혹에 빠져 집나간 탕자가 고통 속에서 자기를 돌아다보듯이,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야 자기의 본래 모습을 보고 깨닫고 아버지의 품을 찾는다. 진정한 믿음은 성숙을 지향하여 자라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영적 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크리스천들이 있다. 그들은 신앙하고 있는 어른들이지만 제2의 유년기 수렁에 빠진 어른-아이(adult-child)라고 하는 지적들이 있다. 이들 유년기적 성인 신자들이 지닌 특징은 자아 중심적이고 요구가 많으며 불평불만이 많다는 점이다. 이런 성장이 멈춘 상태를 노화라고 한다. 겉은 멀쩡한 어른이지만 속은 유치한 아이에 불과하다. 어린 아이 특성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스럽다. 참을성이 부족하다. 노화가 지속되면 동맥경화증 등 많은 질병들이 찾아와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시험은 성숙에의 길목에 놓인 영적 시험 문제들이 된다. 곡식이 자라고 알맹이가 차가려면 비바람, 뜨거운 햇볕이 모두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신적, 도덕적, 영적으로 자라가는 데에도 유혹이나 시련이 활용된다. 요셉은 유혹과 시련을 통하여 성숙한 품성으로 꼴 지어 져 갔다. 인간의 삶의 길에는 걸림돌들이 많다. 작은 걸림돌, 큰 걸림돌 등등, 이 걸림돌들을 가리켜 시련 또는 시험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이 걸림돌을 인내를 축복의 시험문제로 바꾸신다. 마치 바람을 타고 연이 더욱 올라가듯이 자기 백성들의 믿음이 비상하기를 원하여 이런 걸림돌들을 이용하신다. 온실 속의 작물은 약하다. 비바람에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는 튼튼해진다. 시험은 성숙의 디딤돌이 된다, 그것은 인내의 과정을 통하여 찌꺼기 털어내는 방편과 연단의 수단이 된다. 병으로 고통당하는 아이는 아픔을 통하여 성숙하여진다.
시험은 자고하지 않도록 하는 제어 장치도 된다(고후 12:7-10 4). 또한 시험은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이해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바울은 빈곤, 박해 상실, 외로움 등 시험들을 받았다(고후 4:8-11).
2.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고난의 학교에서 섭리를 깨닫게 하신다.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의인들은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여 왔다. 진정한 교회사에는 하나님 백성들이 시련과 고난을 받아 온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시련과 고난은 육에서는 뜯어가지만 영을 더 닦아 맑게 한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고난은 인생의 죄와 불의를 씻는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이마 위에 주름살이 깊어갈 수록 안으로 지혜가 영글어 간다.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수록 혼에서 솟아나는 향기가 짙어간다. 생명의 깊은 뜻은 피로 쓰는 글자로만, 눈물로 그리는 그림으로만, 한숨으로 부르는 노래로만 나타낼 수 있다.
이 시련과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원수를 용서하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승화시킨다. 고난은 인간을 하나님께 이끈다. 고통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간다. 결국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은 영원한 아가페의 세계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 안에 성령의 귀한 은혜가 나타나도록 하고자 애쓰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장애와 핍박과 난관을 허락하시되 저주로서가 아니라 우리 생애의 가장 큰 축복으로 허락하신다. 우리가 대항한 모든 시험과 우리가 용감하게 견딘 모든 시련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며 품성 형성이라는 과업에서 우리를 전진하게 한다. 하늘의 능력으로 시험에 대항하는 사람은 세상과 하늘 우주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효능을 나타낸다”(보훈, 117).
3. 시험은 사용하기에 적합한지 여부 검증 믿음의 참 모습을 지녔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수단이 된다, 일종의 충성과 능력 시험인 셈이다. 하늘 제품을 만들어내는 일에 연단이 필요하기도 하다. 시험, 시련은 하늘 수능시험이나 내세의 학교에 진학할 자격을 얻게 하는 자격시험이 된다. 아브라함이 시험 받은 것은 복을 주시기 위하여서 이었다. 하나님께서 넘어뜨리는 악의가 없다.
원수는 우리를 죄 가운데 빠지게 한 후 하늘 우주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스가랴 3장 2절). 그분께서는 또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스가랴 3장 4절)고 말씀하셨다.
IV. 시험에서 보호를 구하는 자세
주기도문의 이 부분은 때때로 모든 시험을 우리로부터 제거해 주기를 구하는 청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를 시험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짐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요 17:15).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새 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간구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시 91:3-7).
매우 자주 우리는 고의적으로 자신들에게 시험의 기회를 제공한다(잠 7:9). 진정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선택한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랑의 길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시험과 악으로 이끌고 계신 분으로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자면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준비 태세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시험 받지만 모든 사람이 다 시험에 넘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혹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단의 초대장이다. 어떻게 그 초대장을 거절하고 승리할 수 있는가?
1. 인간은 누구나 안전하지 않고 완전하지도 않다.
“자신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은 일찍이 싸운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苦鬪)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령이 새로워져서 성결케 되려면 그 심령은 하나님께 순복시켜야 한다. ”(정로, 43)
시험은 보편적이다. 누구에게나 늘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권고하고 있다. 베드로는 자기는 시험이나 유혹으로부터 면제 받은 사람인 것처럼 큰 소리쳤지만 얼마 안 되어 넘어졌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 26:33-35).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자만하여서는 안 된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1, 32)라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방심은 금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지녔다. 사단은 이 약점을 파고든다. 순간적으로 유혹에 굴복하여 무분별하게 취한 행동을 회복하는 데 평생의 노력이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생활 하는 첫 집이 주막집이었는데 그는 거지 자기 거처를 四宜齋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자기의 삶의 자리 네 가지를 마땅히 지켜야 될 義로 보고 그 의가 자기 삶의 자리를 제어해야 한다는 것을 사의재로 표기한 것이다. 사의재란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단정히 해야) 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된다는 것이다.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있는 다산의 생가 서재 칭호를 이 사의재와 상통하는 與猶堂이라고 칭하였다. <여유당> 칭호에서 與猶는 노자 도덕경 제15장에서 빌려 온 말이다. ‘여與여! 머뭇거림은 마치 살얼음 겨울 냇가를 건너는 것 같고, 유猶여! 신중함은 마치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경계하는 것 같도다 與呵其若冬涉水 猶呵其若畏四隣’ 라고 말하였다. 그는 “與猶” 이 두 글자를 두고 “안타까워라. 이 두 마디 말이 내 약점의 치료제가 아니겠는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영적인 왕국에 들어가고자 결심한 사람은 흑암의 왕국의 군대의 지원을 받는 온갖 거듭나지 않은 성질의 세력들과 분노가 그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날마다 그는 헌신을 새롭게 하고 날마다 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 옛 습관들, 악으로 기울어지는 유전적 기질은 언제나 지배권을 쥐려고 분투할 것이다. 이것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경계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승리하고자 분투 노력해야 한다.”(행적, 477).
2. 기도를 등한히 하여서는 안 된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0-41).
“우리는 시련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낙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의 욕망이 이끄는 데로 가지 않도록 해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의 지도에 맡기며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실 그분의 손을 기다리며,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이사야 30장 21절)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보훈, 117-118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약속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는 보증을 얻게 된다.
3.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시련을 통하여 결코 실패하지 않는 조력자가 계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홀로 유혹과 싸우고 악에 맞서 투쟁하다가 마침내 괴로움과 슬픔에 압도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소망, 483).
악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책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야 말로 시험에 이길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치이다. 시험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이기심을 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라볼 때, 이기심은 가증하고 불쾌한 성질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서 쫓아내 버리고자 갈망하게 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때 우리의 마음은 부드럽고 겸손해지며, 시험은 그 힘을 잃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품성을 변화시키게 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와 대결하는 싸움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장 19절)고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가운데 생활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결코 놓지 않을 손으로 그대를 굳게 붙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이해하고 믿으라. 그리하면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랑은 사단의 모든 기만과 공격에 대해 난공 불락의 요새가 된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 18장 10절).”(보훈, 118-119)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위하여 돌아가신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떠나가고 시험에 넘어질지 모르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속량물로 바친 그 사람을 결코 버리고 돌아서지 않으신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눈을 뜬다면, 압박에 눌리고 슬픔의 짐을 진 사람들이 마치 짐 더미 아래 있는 마차처럼 깔려서 낙망 가운데 죽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험을 당하여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천사들이 빨리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이들 영혼들을 포위하고 있는 악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 영혼들을 인도하여 확실한 기초 위에 발을 디디도록 해준다. 이 두 군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세상의 군대들이 싸우는 것처럼 실제적이며, 그 영적 투쟁의 결과에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다.
4.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시험을 만나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시면서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7:31).
베드로가 회개하고 다시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김질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V. 호소
성도들이 작은 시험에서 승리하여가면 큰 시험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영적 근육이 발달해 간다. 그리하여 죄악의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들어와도 이를 즉각적으로 퇴치하거나 박멸시키는 영적 면역세포가 형성되어 간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서 이런 승리의 체험을 가진 성도들을 천국에 이주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 때 승리의 체험을 지녔다 하여도 실족할 수 있다. 이 땅은 영적 전쟁터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영적 싸움이 끝나는 때란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투쟁의 생애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의와 불의의 쟁투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힘 입음으로써만 승리할 수 있다. 유한한 우리의 의지는 무한하신 분의 의지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합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그리고 승리는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신 소유의 회복 즉,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일에 이바지할 것이다.”(청년, 55).
“천국으로 가는 길은 지위가 높은 자들이나 부자들이 당당하게 활보하기에는 너무나 좁으며 야심을 펴기에는 너무나 협소하고 마차가 쉽게 기어 오르기에는 너무나도 비탈지고 험한 길입니다. 노고, 인내, 자아 희생, 비난, 궁핍, 고된 노동, 당신께 대한 죄인들의 반대를 이겨내는 일 등은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몫이었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고자 할 때에 치르어야 할 몫도 이러한 것들이어야 합니다.”(2기별, 165-166).
“유혹의 시련을 이겨내는 자들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명예와 박수 갈채를 포기하므로 선한 양심을 지키는 자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께서 하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저들을 인정할 때까지 모든 인내심으로 기다리는 자들에게 낙원의 문들을 활짝 열어줄 한 손이 있습니다.”(2기별,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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