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주변의 세 신앙 고백
십자가 주변의 세 신앙 고백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1) 대제사장과 무리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4). 유대인들에게 나가니 (2)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18:38). 다시 밖으로 나가 말하되 (3) “이 사람을 대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요19:4, 6).
무죄를 선언하고도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하도록 내준 빌라도는 손을 씻었다. 그리고 로마 백부장에게 인계하였다. 이 죄 없는 분을 사형 집행관에 넘긴 것은 빌라도의 엄청난 실수였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며 쥐어짜는 고통을 당하셨다. 또한 그분은 온 밤을 통하여 7회의 재판을 받노라고 한숨도 못 주무셨고 지칠 대로 지쳤었다. 그분은 피곤하였고 허기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수난의 길(Via dolorosa, sorrowful way)에서 세 번씩이나 넘어지셨다. 이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여인들은 동정심이 솟구쳐 울었다. 하늘도 땅도 하나님의 아들의 이 참혹한 광경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 지금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에서 특히 세 사람이 예수를 만났던 것은 그 의미가 심장하다.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세 사람이 예수를 만났다. 한 사람은 십자가상에서, 또 한 사람은 수난의 길을 가는 도중에,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예수를 형장으로 데리고 가 십자가 처형을 총 지휘한 자로서 예수를 만났다.
“예수께서 운명하신 바로 그날 전혀 다른 세 사람이 자기들의 믿음을 고백하였다. 한 사람은 로마의 수비대 지휘하던 사람이요, 다른 사람은 구주의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이요, 세 번째는 주님 곁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강도였다.” (DA 770).
이렇게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세 사람이 각각 예수를 만났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한 사람은 해골 같은 갈보리로 가는 길에서, 다른 한 사람은 해골산 위에서 십자가 달린 중에, 또 한 사람은 형 집행을 총 관장하던 자로 “다 이루었다”를 듣고 각각 신앙의 고백을 한 것이다.
그 첫 번째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억지로 진 짐을 영생의 기회로 바꾼 사람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막 15:21).
그가 무엇 때문에 지금 리비아 근처에 있는 구레네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프리카 북쪽 연안에 있는 키레나이카의 수도인 구레네 지역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바 나그네 (stranger) 시몬은 멀리 구레네에서 오는 길이거나 또는 가나안 땅으로 이민하여 어느 시골에 살다가 명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으로 방문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DA 742에 나온 “stranger”를 이방인으로 번역한 것은 오역)
시몬이 해골산 사형장으로 가는 행렬을 만난 것은 재수 없던 일이 일어난 날 이었다. 그러나 이 날처럼 고마운, 행운의 날이 그 평생에 다시없었던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 성안으로 마침 들어가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한 시간 먼저 왔다 하면 예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반대로 한 시간 늦게 왔다 해도 로마 병사가 사형수를 끌고 가는 이 행렬을 만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시몬이 예수님 십자가행렬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죄수들 중에는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몸에 붉은 옷을 걸치고 이마에는 커다란 가시 모자가 씌어져 있는 한사람이 가고 있었다. 가시 면류관이 그의 머리를 찔러 거기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얼굴과 목덜미를 붉게 물들였다. 시몬이 보기에는 그분은 이미 기운이 다한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굵은 나무 기둥을 어깨에 메었는데 금방이라도 그의 몸이 나무 기둥에 깔릴 것만 같았다. 벌써 두 번이나 쓰러졌다. 욕설을 퍼부으며 따라가는 구경꾼들도 있었다. 시몬의 마음에는 어째서 인간들은 서로 사랑하여 감싸주며 살아가는 일보다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일에 저토록 몰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조수처럼 밀려왔다. 그 때였다. 가시관을 쓴 분이 갑자기 기우뚱하더니 예측대로 묵직한 나무에 깔리면서 쓰러졌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이 바람을 가르면서 쓰러진 반나체 몸뚱이에 뱀처럼 꾸불꾸불한 핏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날카로운 채찍 소리만 들렸을 뿐 쓰러진 사람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맞은 자국만 약간씩 부들 떨리다가 다시 멎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한 로마 군인이 시몬에게 손짓하였다. 가슴이 철거덕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도망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창칼이란 권력이 있었고 시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시몬은 숫자적으로도 당할 수 없는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억지로 시몬을 끌고 가 예수가 메었던 나무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었다. 시몬에게는 매우 재수 없는 날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무는 생각보다는 가벼웠다. 나무에 묻어 있는 끈적끈적한 피가 시몬의 목덜미에도 묻었다. 투덜거리면서 걷고 있는 그를 사람들은 더럽게 재수 없는 놈이라고 야유를 하고 웃어댔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내가 재수 없게 지목되다니 ...”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당대의 권세와 권력의 희생물이 된 시몬은 그 큰 나무통을 메고 해골산을 향하였다. 시몬이 발걸음을 옮기자 쓰러졌던 예수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따라나섰다.
시몬은 구경하다 왜 이런 고역을 치르나 후회도 하고 또 저 붉은 옷을 입고 가는 예수를 원망도 하였다. 십자가를 등에 질 힘조차 없는 자라면 십자가에 매달릴 짓도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의 책망도 보냈다. 저 로마 병사 놈들의 형틀에는 아무나 달리는 것이 아닌 관례에 비추어 보면 저 가시관을 쓴 분의 얼굴에 깃들인 엄위와 순진 무구성은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시몬에게는 해골산이 가까워 오면서 부터는 이러한 상념이나 불평과 원망이 사라져 갔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숨도 가빠졌으며 더구나 혹시 잘못되어 자기를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면 어떠나 하는 공포감도 엄습하여 왔다.
해골산 처형장 주변에 조용하고 바람도 멎는 것 같은 분위기 이었다. 기분 나쁘게 저쪽에서 까마귀가 울어대고 있었다. 드디어 처형장에 도달하자 로마 병사들은 백부장, 아니 인간 백정이 된 장교의 진두지휘아래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시몬의 어깨에서 나무를 내려놓게 하고는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은 분을 나무위에 눕혀 놓고 팔을 벌려 비끌어 메었다. 그들이 하는 작업 과정을 보아서 여러 번 해 본 능숙한 솜씨였다. 그들은 다른 두 죄수에 비하여 가시관을 쓴 분을 특별히 취급하였다. 그들은 그를 한 가운데 두고 손목을 나무에다 대고 거기에 커다란 못을 박았다. 두어 번쯤 둔탁한 망치소리가 들리더니 그 후에는 못이 나무에 박히는 경쾌한 소리로 바뀌었다. 못질하는 때에 피가 튀어 병사들의 손등을 적셨다. 이것은 시몬의 눈에는 평생토록 지워질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시몬은 구토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저 무서운 고문, 박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원천적 질문이 그의 인간성에 대한 구토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몬은 그토록 양처럼 순해 보이고 티 하나 없는 인간이 이런 꼴로 죽어야 한다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른 두 죄수들은 악에 바쳐 소리 지르면서 반항하고, 저주하고 이를 갈면서 로마 병사들에게 죽어 혼령이 되어서라도 너희들은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발광하였다.
사실상 이때까지도 시몬은 그 가시관을 쓴 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군인들이 내건 죄 패를 보고 이 사람이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한 사람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당시 폭력적인 반 Rome 항쟁의 여러 유사 메시야가 연상되었고 그런 자들 중에는 왕으로 자칭, 타칭하는 자들도 있는 것을 연상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가 우락부락하고 얼굴은 살기마저 도는 모습인 것에 비하여 보면 이 “유대인의 왕”은 난폭성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광기 어린 폭력 앞에서 그는 새끼 양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당하고만 있었다.
시몬은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을 멀리 떠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은 요지부동이었다. 버티고 서서 끝까지 다 보아야 한다는 거역할 수 없는 의지의 힘에 눌려 십자가 처형과정과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시하였다. 예수의 땀과 피로 범벅이 되어 거의 알몸이 되다시피 한 모습은 해골산 꼭대기에서 온 세상 인간들에게 엄청난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나부끼는 깃발 같아 보였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 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을 지금 사람들이 포장하고 있다. 그 깃발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메시지는 시몬에게는 저 지평선 저쪽에서 떠오르는 햇살 정도같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웃고, 조롱하고,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주고, 용서 받지 못할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는 와중에 있을 때 십자가에 달린 분의 말씀이 들렸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자기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는 자기를 괴롭히고 형틀에 달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시몬은 이 용서를 비는 기도 소리를 듣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예수의 십자가야말로 이 땅위에서 있었던 가장 큰 전쟁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전쟁이었다. 이 싸움판 한 가운데서 나무에 달려 죽어 가는 저분이 온 세상의 생명을 대신하여 최후의 일전을 감행하고 있었다.
시몬은 이 순간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예수의 시선과 시몬의 시선이 부딪쳤다.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어떤 들리는 말을 없었으나 가시관을 쓴 분의 눈이 시몬에게 하는 말은 이리하였다.
“나의 무거운 십자가를 재수 없게 대신 저준 형제여, 고마왔소, 나는 그대를 잊지 않겠소 부디 형제도 저들을 용서하시오, 용서만이 끝내 생명을 지킬 수 있다오.”
시몬은 이 무언의 메시지를 알아들을 듯하였다. 그래서 그 뜻을 담은 시선을 보냈을 때 그는 잔잔한 미소를 보냈다. 계속하여 그는 시몬에게 이렇게 주문하는 듯하였다.
“앞으로도 그 든든한 어깨로 나의 짐을 저주시오, 억지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사람의 짐을 저 준다면 그것을 이길 악마는 없을 것이오” (갈6:2 참조).
호소
시몬은 비틀거리며 해골산을 내려왔다. 예수의 십자가를 메고 가던 때 보다 빈손들고 가는 하행 길의 가슴이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였다. 아마도 그 무거운 형틀이 시몬의 가슴속에 묻혔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일이 있은 후 시몬의 삶은 바뀌어졌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인생의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지나간 삶이 아까웠고 다시 찾아 바르게는 할 수 없었으나 자기와 같은 지나간 날의 삶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시몬은 성인군자가 못되지만 자식들만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신약 성경에는 구레네 사람 시몬에 관한 기사가 몇 토막 나와 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 와서 지나가는데”(막15:21) 이 루포는 시몬의 아들이었다.
바울은 이들 가정에 문안을 하고 있다.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라고까지 한다.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라”(롬16:1·3). 이런 점에 비추어 초기 교회에서 루포와 알렉산더 그리고 그 어머니는 유명한 성도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이름을 먼저 소개하면서 그 아버지 시몬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이들의 신앙적인 위상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시몬의 신앙은 그들 가정을 복음전도자의 산실이 되게 하였다.
엘렌 화잇여사는 이 시몬을 낯선 자 나그네라고 하였다(DA 742). 나그네길 인생을 걷는 순례자이었다. 인생 나그네 길에서 이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를 졌다. 갑자기 짐을 진 사람이 된 것이다. 재수 없게끔 짐을 진 것이다. 원치 않았는데도 짐을 져 주었다. 인생의 길을 걸어 가다가 몰아닥친 不幸이 있다. 갑자기 부모가 죽어 고민하는 형제여 그대는 지금 원치 않는 짐을 지고 있다.
갑자기 형제가 죽어 고민하는 형제여 그대는 지금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있다.
가산이 탕진되어 앞길이 망막한 상태로 있는 분들이 있다면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저주하고 있는가? 그렇다 이러한 짐은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다 시몬처럼 재수 없는 날을 재수 있는 날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고 있지 않고 있다. 시몬은 그 십자가의 짐을 비록 억지로 졌을 지라도, 예수와 교제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의 길을 택하였다. 인생의 짐을 기회로 삼으라! 자기 책임이 아니면서도 지는 짐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황금기회로 삼으라.
둘째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기회를 잡은 십자가상의 강도였다(눅 23:39-43).
예수님의 십자가의 옆에 달린 두 강도중 하나가 소리 질러 말하기를 “여보게, 자네는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아닌가? 자네도 살고 우리도 살려 보게.” 성경은 그들의 비아냥거림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 지어다” (막15:32).
그러나 그 옆에 있는 다른 강도는 저주하던 태도를 뉘우쳤다. 그리고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같은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대로 거두어 들여 이렇게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 사람이 살아오고 행하여 온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는 줄을 모르느냐?”
그리고 나서 예수에게 향하여 “당신의 나라가 올 때 나를 생각하여 주시기 원하나이다”(눅23:44)고 하였다. 전설에는 “아기예수가 애굽으로 피난 갈 때 강도를 만났던 바 강도일당의 수령의 아들이 아기예수를 보고 감동을 받아 놓아주매 때가되면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젊은 강도가 갈바리에서 예수를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한 평생 강도 짓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소망이 있었다.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주하던 자가 회개하고 돌아설 때 곧 받아 주신다. 그는 행악자이었다. 그는 처음에 예수를 조롱하다가 만났다. 그는 비방하다가 만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대인의 가정에서 자랐다. 회당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 회당 예배에 재미가 없었다. 예배 참석에 취미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취미를 찾았다. 그는 악한 친구를 사귐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DA 749).. 좀 도둑질하다가 소도둑, 강도가 되었다. 그러다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를 보았다.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기도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십자가에서 자기 죄의 용서 가능성을 보았다. 십자가에서 희망을 찾았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았다. 한 짧은 순간의 결단이 구원을 좌우한다. 억압자를 폭력으로 내 모는 것으로 해방이 온다는 열심 당원 혁명 논리는 속임수였다. 그들과 한 통속이 되었던 삶이 무참하게 깨졌다. 그의 이러하나 삶은 저 깊은 낭떠러지 벼랑 끝에 매달린 모습이라고나 할 수 있다. 자기 죄책으로 십자가를 진 다 되어버린 듯한 마지막 절박한 순간에 그는 시선을 예수께 향하고 호소하였다. 이 호소에는 구원의 메아리가 “오늘 너에게 이르노니...”란 말로 되돌아왔다.
“속죄함을 입은 자들 중에 더러는 생애의 마지막 몇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를 붙잡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하늘에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죽을 때에 구원의 계획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Letter 23, 1905).
그는 제11시에 포도원으로 부름 받은 일꾼처럼 최후의 순간에 구원의 기회를 잘 포착하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나가버린 생활이 아무리 희망 없는 것처럼 보일 그때야 말로 희망의 저 언덕 너머의 구원이 영롱하게 보일 수 있다. 죄책으로 파멸된 인간에게 소망이 있음을 잊지 말라. 때가 이미 지나갔다고 포기하지 말라. 오후 5시에 포도원에 가서 일한 사람 역시 일당을 받았다. 그는 인생의 마침표를 잘 찍은 사람이었다. 평생을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배도하였다면 그처럼 원통한 일이 또 있을까? 마지막으로 주어진 은혜스러운 기회를 놓치지 말라.
셋째로 권력의 하수인인 백부장의 신앙고백이었다(눅 23:44-47).
군인들도 희롱하고 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렇다면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고 하였다. 저쪽 편에서 지금까지 처형을 진두지휘하여 온 백부장은 하나의 대화를 들었다. 철없는 어린 아이 같이 사리판단도 잘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 정신연령이 빙점 이하인 자기 부하들의 모습과 언행을 보면서 자신이 저 똘마니들의 대장이란 것에 환멸을 느꼈다. 저주의 말을 회개의 말로 바뀌면서 한 순간에 구원의 약속을 받은 저 형편없는 놈이 자기보다 한수 위인 영적, 도덕적, 안목-통찰력을 지녔다는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나간 날들의 그 어두운 생활, 권력 지향적인 냉혹한, 비정한 생활과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가해자의 용서를 구하는 저 예수의 하늘같은, 바다 같은 사랑의 언행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왜소함이 개미같이 느껴졌다.
지루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갔다. 갑자기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무거운 정적이 천지를 덮었다. 바람도 멎었고 태양도 빛을 잃었다. 검은 구름이 십자가를 덮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이렇게 전개되었다. 창세 이래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는 시간마저 정지된 듯하였다.
로마 백부장은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여 왔지만 이런 장면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윽고 가시관을 쓴 분이 삼라만상을 울리는 듯 하는 나팔 소리 같은 맑은 음성으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며 마지막 숨을 거둔 장면을 지켜 본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고 고백하였다.
로마 백부장은 삶의 목표를 권력의 추구에 두어 왔다. 그는 냉혹하고 엄격하게 군율을 집행하고 상관의 불의한 명령을 신속하게 실천하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자기출세에 조그만 장애물이 있어도 안 되었다. 그는 처형 집행의 책임자였기에 자기가 처형한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사람 죽이는 일에 별 두려움도 없었다. 인간의 목숨은 파리 목숨에 불과하였다. 직업치고 더러운 직업이 남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 그러나 가장 더러운 직업은 재판이 잘못되었는데도 그것을 집행하는 인간의 직업이다. 빌라도가 손을 씻었듯이 백부장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되 뇌이면서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하수인으로서 총 책임자 역할을 다하였다.
그는 억압자로서 살아왔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그는 Pax Romana 구현이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추구 인생관이 가져온 것은 결국 평화의 왕을 죽인 것이고 십자가 주변의 캄캄함을 보는 것뿐이었다. 정복자의 칼날의 의미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권력자의 생리, 즉, 적수를 끽소리 못하도록 완전히 제압하여 죽여 버려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그 한계를 깨달았다. 천지가 진동하는 만큼 그의 고막을 찢어 놓은 예수의 용서기도에 그는 기가 죽었다. 반항하는 자, 자기와 반대되는 자를 유배 보내거나 사형시키는 것이 문제해결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 확연하여지게 되었다. 숭고한 것은 생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폭력이 난무하는 (개판이 되어) 가운데 뒤죽박죽이지만, 예수가 뚫어놓은 생명의 길은 이제 大路처럼 보였다.
최후의 승리자의 죽음을 알리는 천연계의 격변이 이 백부장의 양심을 강타하였고, 그 결과 그는 이제 “이는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마27:54) 하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강퍅한 마음에 이제 연한 새순이 돋아난 것이다. 돌 같은 마음이 이제 깨졌다. 예수를 만나 깨어진 것이다. 이제 그는 회개한 것이다.
호소: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하고 “아버지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고 부르짖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숨을 멈추었을 때 죽었던 천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불어왔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죽은 것은 나무에 달려 그분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시몬이 죽었고 회개한 강도도 죽었다. 그리고 처형을 지휘하면서 이 광경을 지켜 본 백부장도 죽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가 나무에 달려 죽을 때 함께 죽는 경험으로 들어간 이 세 사람은 오늘도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십자가 사건 주변에 있었던 세 사람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한 사람은 불운하게도 예기치 않은 남의 짐을 졌으면서도 그것을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신앙의 결단을 하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파탄이 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도 시선을 하늘로 두는 소망을 허락받았다. 마지막 한 사람은 잘못된 재판의 결과 사형당하는 무죄한 분을 처형시키는 권력의 시녀가 되어 그 직무를 이행하다가 참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이들 세 사람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십자가 주변에서 일어난 세 인간의 세 가지 신앙 고백이며 결단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서도 이 고백과 결단이 오늘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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