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수난시기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 수난에 역점을 둔 기술을 한 점(복음서 전체의 1/3 분량)과 구속사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중요성 때문에 그 어떤 다른 기록보다도 수난주간 기사가 지닌 영적 중요성이 크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수난 시기 추정에 관한 참고할만한 정보가 나온다. 마가는 주일 중 첫째 날에 부활하셨다고 한다(막 16:9). 예수께서는 금요일, 즉 예비일에 죽으셨다(요 19:14). 누가는 십자가 사건이 있은 뒤에 곧 바로 안식일이 온 것을 시사하고 있다(눅23:54; 24:1).
십자가 사건 일자는 다음 세 가지 조건에 맞아 떨어져야 한다. 1) 금요일에 일어나야 한다. 2) 빌라도 통치 시대(AD 26-36)에 일어난 사건이라야 한다. 3) 니산월 14일 유월절 제의가 있는 때 만월이라야 한다. 당대 고정된 월력이 없었던 점과 예루살렘에서 월삭을 육안으로 관측한 것을 토대로 기산하였으므로 오늘날 천문학자들이 정교한 만월 시기 산출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다니엘 9장의 예언의 빛에 비추어 십자가 사건은 AD 30또는 31년에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겟세마네(Geqshmanh')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겟세마네가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 된다. 유월절 의식은 할렐(Hallel, 하나님을 찬양한다)을 부르는 것으로 끝맺었다. 제자들과 함께 나눈 최후의 식사는 이렇게 찬송하는 것으로 의식을 끝냈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 26:30). 목요일 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떠 있었다.
겟세마네는 “기름 틀(the oil press)”을 뜻하는 아람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곳에는 감람나무들이 있다. 지금까지도 그 때 있었던 나무들이 8그루가 남아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물론 감람나무 윗부분은 서리 등 이유로 잘려나갔지만 같은 그루터기에서 다시 새 순이 나와 자라난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명상과 기도 그리고 휴식을 위해 구주는 이곳에 자주 갔으며, 여기에서 종종 밤을 보냈다(눅 22:39; 요 18:2; DA 685, 686,). 십중팔구 십자가에 달리기 전, 화요일과 수요일 밤에 그는 이곳으로 물러나 있었을 것이다(참조 마 21:17; 24:1, 3; 26:17, 18; 눅 21:37).
여덟 제자들은 아마도 동산 입구쯤에 머물러 기도하게 하신 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을 변화산에서처럼 인솔하시고 예수와 함께 지내도록 지정 받았다. 예수께서 “가장 가까운 친구”(소망, 686)들인 세 제자들을 가까이 있도록 부르신 것은 인간 동료들과 함께 기도로 보내시며 친근한 동정과 이해를 갈망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민과 기도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7-39).
예수 그리스도의 고민과 슬픔을 구약성경의 여러 예언자들은 예고하였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참고 사 52:14; 63:2-3).
예수께서 걸어오신 삶의 여정에서 일찍이 없었던 영혼의 공포와 슬픔, 그리고 고민에 짓눌린 밤이었다. “전에는 결코 예수께서 그토록 큰 슬픔과 침묵에 잠기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소망, 685). 그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여 오셨는데(요 8:29), 이 날 밤에는 지탱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차단된 것처럼 보였다. 인류를 위한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신 그리스도는 거룩한 공의 아래서 고통을 받고 게셨다(소망, 686). 인간의 대속자와 보증인으로 서는 때 아버지와 연합이 깨어진 것을 느끼시므로 아버지의 사랑에서 영원히 차단된 것 같았다. 사단이 그리스도에게 이점을 집요하게 주입하였다. 지금 예수께서는 범죄자로 계수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타락한 인류의 죄책을 짊어져야 하였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 위에 인류의 모든 불법이 놓였다.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절감하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슬픔과 고민을 다 측량할 수 없다. 신비한 슬픔이다. 함께 가던 제자들이 주임의 이상하리만큼 큰 슬픔과 고민에 압도당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민의 신학적인 의미는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그 어떤 인간이라도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고뇌였다. 둘째, 자기가 짊어져야 하는 인류의 죄의 짐을 지심으로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에서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식에 사로잡혔다. 셋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달으시고 그 죄악의 결과를 맛보아야 했다. 이런 고민을 통하여 우리는 죄인과 같이 되신 예수의 인간성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고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 행진하는 비참한 결과를 내다보면서 고민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민하신 예수께서 이 인간성의 약점을 기도로 극복하시는 모습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연약성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동산에서 예수께서 남기신 것은 고독과 고뇌에 잠긴 모습, 인정에 목말라하는 모습과 육체적으로 무척 피곤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고민의 결정적인 모습은 피땀(diapedesis, the sweat of blood)을 흘리는 것에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생명을 건 기도를 드릴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었다. 피땀은 극도의 긴장이나 갑작스러운 공포 같은 일을 당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현상을 묘사한 바 있었다. 성 바돌로메의 축제 당시 대 살육이 일너나고 있을 때 찰스 9세도 후회에 압도당하여 이런 경험이 수반되었다(Bunch, Behold the Man, 35쪽).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민에 찬 기도에 대한 비판을 한 인간들이 있었다. 예컨대, 제2세기 그리스도교의 대적 Celsus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동안 몸의 경직이 있었다는 것을 두고 비판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었고 더구나 자원하여 하는 일이었는데 무슨 어려운 일이나 고통이 있었겠느냐고 하였다. “할 수만 있으면” 즉음이 두려워 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였다(Contra Celsus, II, 9). 그러나 이는 기도를 통하여 인간의 연약성을 극복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시각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의 절정은 세 번이나 거듭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죄인이 당하는 둘째 사망을 당하므로 아버지와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결단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를 두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고 하였다. 이 기도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로 한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 결단과 함께 되돌아 갈 수 없는 비행기처럼 일로 매진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키로 한 것이다. 거룩한 율법을 범한 인류가 무력하여 죄의 세력으로 멸망당할 절박한 운명을 보시고 이런 결단을 내리신 것이다.
세 제자들은 기도하라는 말씀을 뒤로하고 잠에 빠졌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기도의 실패는 위기의 때 영적 준비의 실패로 이어진다.
변화산과 겟세마네 비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변화산에서의 기도에는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두 사건 모두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 이 세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셨다. 그러나 세 제자들은 두 사건에서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예수께서는 두 사건 모두에서 위로부터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변화산상의 사건에서는 그리스도의 미래의 영광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주어졌지만, 겟세마네에서는 인간의 가장 낮은 굴욕과 죄의 가장 깊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저속한 사건에서 예수의 위엄성은 방해를 받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테러리스트 같은 폭력자가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요한복음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각하고 있다. 폭도들이 모두 쓰러졌고(요 18:6-8), 제사장들이나 빌라도의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해할 권세가 없었다(요 19:10, 11). 심지어는 그들이 제자들까지라도 어찌할 수 없었다(요 18:9).
예수의 체포
밤이 깊어간 시간대 (11.00-12.00 경) 예수께서 기도하신 곳을 잘 아는 가룟 유다가 돈으로 매수된 폭도들을 인솔하여 감람산으로 왔다. 당대 유대의 고관들, 대제사장, 바리새인들, 장로들, 성전 경호인들, 로마 병사들도 함께 왔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는 질문에 그들은 다시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내로라(ejgwv eijmi[/, ego eimi)”라고 답하셨다. 그 때에 구주께서는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다. 수종 천사가 개입하고, 거룩한 빛이 구주의 얼굴을 비추고, 비둘기 같은 모양이 그분을 가리웠다. 이 거룩한 영광이 나타날 때에 살기등등한 군중들은 잠시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제사장들, 장로들, 군사들, 그리고 유다까지도 죽은 사람들처럼 땅에 엎드러졌다. 아무리 검과 몽치로 무장한 폭도들이 달려들었어도 “내로라”하는 신적 권능의 칭호를 사용하고 거룩한 권능의 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은 예수께서 자의로 체포당하신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유다가 예수께 입마춤으로 체포 당사자를 알리려는 일을 하자, 예수께서는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셨다”(눅 22:48). 유다의 문안 키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탄식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베드로가 준비한 칼을 빼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리”는 (눅 22:50) 방어행위를 하자,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눅 22:51)고 하셨다. 베드로가 도망치자 다른 제자들도 같이 도망하였다.
예수께서는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하시면서도 줄기차게 성경이 예언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가시므로 우리의 구원의 창시자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의문을 가진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답하신 것이다. 굴욕과 수모를 당하시면서도 구원의 길을 걸으신 이것이야 말로 겟세마네의 참 모습이 된다.
'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마스 (0) | 2018.12.25 |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법 재판1 (1) | 2017.01.18 |
십자가 주변의 세 신앙 고백 (0) | 2016.10.01 |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0) | 2016.05.24 |
祈願 第5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0) | 2016.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