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의 종말론 사조 개요

 

18세기 이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이성, 자율, 자연, 조화, 및 진보를 앞세웠다. 이런 사상적 기류에 영향을 받은 19세기 그리스도교계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을 낳았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종말론이란 영혼불멸론 정도를 다루고 신약성경의 종말론적 사상을 약화시켰다.

 

A. Friedrich Schleiermacher

1. 삶과 신앙관

Friedrich Schleiermacher(1768-1834) 독일이 낳은 현대신학 사상의의 비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복음주의적 독실하고 경건한 모라비아 교도들의 신앙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개혁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지만 낭만주의에 심취하여 진정한 신앙을 하나님께 향한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보았다. 1821-22에 출판, 1830년에 개정한 Der Christliche Glaube (Christian Theology)는 전통적인 신학적 설명을 뛰어 넘는 저술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칼뱅의 기독교강요에 필적하는 저작으로 본다. 그는 모라비아교도들의 경건한 신앙과 낭만주의적 배경 속에서 신앙의 출발점을 개인의 자의식, 구속 받은 자의 종교적 자의식 및 신의식으로 보고 있다. 그는 교의적 신앙체계 같은 것보다는 인간 중심의 직관을 통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성찰에 역점을 두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는 교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교의를 형이상학이 종교 안에 혼합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교의는 종교 자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종교는 교의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교의는 단지 종교적인 직관을 추상적인 것으로 표현 한 것에 불과하거나 종교심의 본래적인 작용에 대한 자유로운 반성이거나 혹은 종교적인 견해와 일반적인 견해를 비교한 것이다.

 

2. 종말론

슈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인간론에 함몰된 상태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험은 그의 부활, 승천, 재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통하여 온다. 사후의 영생 문제도 별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와 교제로 들어 올 것이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의 종말론은 일종의 비종말론적인 것이다.

 

B. 고전적 자유주의의 근대화된 종말론

고전적 자유주의의 대표적 신학자들은 개신교 고전적 자유주의 원조 꺗, Adolf Harnack(d. 1930), Walter Rausenbusch이다.

이들은 전통적 기독교 신조들을 비평하면서 그것들을 현대적 지식의 빛 아래에서 재구축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윤리적 측면에 초점을 두었다. 이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해체하고 비평의 도마에 올려놓는다. 성경의 초자연주의적 요소를 거세하고 소위 영원한 알맹이 복음을 탐색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윤리적, 역사적 사회에서 구현하는 일에 투신하다.

 

19세기 미국 자유주의의 7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내재성 강조

(2) 인간성에 대한 성선론적 접근

(3) 무지의 소산물로 보는 안이한 죄관

(4) 대속자보다는 모본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강조

(5) 윤리적 접근에 우위를 둔 그리스도교관

(6) 계시성 보다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류의 기록으로 보는 성경관

(7) 지상왕국 건설에 역점을 둔 교회 사명관

 

1. Albrecht Ritschl

Albrecht Ritschl(1822-1889)은 근대화된 종말론의 기수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정수는 사도적 사상 체계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었다. 이 나라는 의와 윤리적 가치의 영역에 에 속한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인류의 통합이다. , 곧 이기심은 하나님 나라에 배치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재림은 껍질에 속하고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에 있다. 예수는 소명적 순종으로 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순수한 삶의 방식을 성취하였다. 이러한 리츨의 진보주의적인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이 살아 있을 수 없는 외피에 불과하다.

 

2. Adolf von Harnack

Adolf von Harnack(1851-1930)은 베를린대학교 신학자 및 교회사가로 세계 제1차대전 시작을 알리는 황제의 대국민 전쟁포고문을 작성하여 그의 전쟁정책을 지지하는 등 권력자와 친밀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문하생 Karl Barth는 그로부터 돌아섰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What Is Christianity?)에서 기독교의 중심적인 알맹이가 되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fatherhood), 인간의 사해동포적인 형제 관계, 인간의 영혼의 무한한 가치, 고차적 의와 사랑의 계명로 보았다. 하나님이 피조적 존재인 인간을 최고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사랑을 배풀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같은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미래의 그리스도의 지상통치로 보아 왔지만, 하르낙은 왕국의 현재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10:9)는 말씀에 따라 왕국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에 역점을 둔 왕국을 전파하는 것으로 보았다.

 

3. Walter Rausenbusch

Walter Rausenbusch(1861-1918)은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탄생하였고 거기에 주로 거주하면서 침례교 세미나리 교수로 활동을 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독일 이민자 교회 목사로 그들과 애환을 함께 나누는 성직자와 사회개혁자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사회복음(social gospel) 운동의 아버지 역할을 하였다. 당대 미국이 당면한 엄청난 빈부의 격차를 파헤친 Christianity and Social Crisis (1907)에서 그리스도인은 가난을 영속화시키는 질곡을 깨트리는 일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는 주요 산업체들을 사회주의화, 노동조합의 지원, 탐욕과 이기심 충족, 경쟁이 중심이 된 경제 체제를 폐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7년에는 사회복음의 신학(A Theology of Social Gospel)을 출판하여 사회 개혁을 위한 신학적 지반을 체계화시켰다.

 

C. Albert Schweitzer의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

(신약성경상의 재림의 소망 참조)

Albert Schweitzer(1875-1965)Johannes WeissJe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영향을 받았다. Weiss는 이 책에서 예수의 왕국이 현재적, 윤리적 왕국이라는 자유주의 사상을 배척하고, 예수는 철저하게 종말론적, 미래적, 묵시적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설파하였다. 또한 예수는 인간 마음에 윤리적 통치를 하는 것으로 왕국을 선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극적 행위로 도래할 미래 왕국을 선포하였다고 보았다. Albert SchweitzerWeiss가 예수의 왕국사상에서 종말론적인 것과 묵시문학적 측면을 옹호한 점을 더욱 강화 완성하였다. 슈바이처는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예수를 윤리 왕국의 교사로 선포하는 입장을 배격하였다. 그는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에서 예수의 천국 사상의 핵심을 급격하고 철저한 종말론을 보여준다고 설파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그의 종말론 사상을 이른바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으로 명명한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은 그의 미래 오심이었다. 슈바이처는 ‘future coming'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사로잡혀 임박한 종말을 믿고 가르쳤다. 예수의 회개 호소는 왕국의 급박성을 준비시키는 메시지였다. 예수께서 선포한 산상보훈 윤리는 왕국 설립 직전에 적용될 중간 윤리(interim ethics)이었다. 예수의 이 종말은 자기 당대 사람들에게 임하며 자기는 이 종말을 가지고 올 메시아이며 세상의 종말과 함께 자신이 인자로 강림할 것을 믿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16-23에서 제자들을 갈릴리에 제1차로 파송할 때 예루살렘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을 천명하였다. 강림 전에 핍박과 우주적 대격변이 이 일어 날 것이고 마지막 때 까지 참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일러주기도 하였다(10:22). 그러므로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피해야 한다(10:23). 그러나 예수가 일어나리라고 예언했던 핍박은 일어나지 않았고 제자들은 오히려 성취감을 가지고 돌아왔다(6:30). 그는 백성들로 부터 숨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그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인자의 계시를 기대했으나 허사였기 때문이다. ...그 후 예수는 심판을 수행할 때가 지금 온 것으로 알고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을 심판한(11:20-24) 후에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만찬으로 신비의 종말론적 성례전을 베푼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과 변화산에서 하늘소리 들은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는 고난 없이 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고난을 향해서 진행한다. 그는 오리라는 그 환란이 자기에게 집중되어(10:23) 많은 사람을 섬기며 그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생각했다. 이런 고난이 자기에게도 와야 한다는 사실은 엘리야인 침례 요한의 죽음에서 이해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메시아 됨을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아 죽었다. 왕국의 도래 사업에 실패한 예수는 순교자로 죽었다. 슈바이처는 이를 두고 예수가 친히 오실 인자임을 자인하고 세계사의 수레바퀴를 움켜잡고 모든 보편사를 끝내려는 최후의 혁명적인 노력을 쏟았으나, 그 수레바퀴는 멈추기를 거절하므로 그는 자신을 그 바퀴위에 던졌지만, 그 바퀴는 멈추기는커녕 돌면서 그를 으깨었다고 비평하였다. 슈바이처의 예수의 종말관 이해에는 이런 한계가 있다.

 

D. Charles.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Charles H. Dodd(1884-1973)은 영국 회중파교회 목사 및 신약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1936The Parables of the Kingdom에서 슈바이처의 철저적 종말론 사상에 반기를 들고, 1936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에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를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종말론이 그 주된 주제라는 점에서 슈바이처와 입장이 같았지만, 그 풀이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실현된 종말론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와 그의 활동 안에서 이미 왔기 때문에, 미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의 요체는 그의 미래적 오심이나 미래적 왕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가까운 미래와 관련된 듯한 모든 텍스트를 현재적 성취로부터 이해하였다. 오히려 과거주의적 성취로 보고 그 성취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임하였느니라”(12;28).

Dodd가 관심을 둔 구약성서적 표현은 여호와의 날이었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신비한 여호와의 날을 미래적 사건으로 예고하고 있지만, 신약성서에서는 그것을 현재적, 역사적 사건이 된 것으로 나와 있다는 것이다. , 종말이 성취되었거나, 실현 중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자신의 삶,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에서 현존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여러 개의 사건들로 볼 수 없고, 예수의 사상에서 하나의 복잡한 사건의 여러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비유들은 심판의 위기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오랜 기간의 성장은 끝났고 결단의 시간이 도래했다. 남아 있는 것이란 낫을 대어 추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승리의 개념은 예수께서 사단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 (10:18) 분명하여졌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심판은 일어났다(3:19). 영생은 이미 신자의 소유가 되었다(5:24).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 시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2:16-17)미래적 격변이 현재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파악하였다고 한다. 천국의 의미를 무시간적 사실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령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은 승리를 일어주는 상징이다.

 

그러나 나중에 DoddJ.Jeremias의 비판을 받아들여 자기의 견해를 조정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초월한인 미래성을 인정했다.

 

D. Rudolf Bultmann의 실존적 종말론(Existential eschatology)

Rudolf Bultmann(1884-1976)20세기에 가장 신학적 영향을 끼친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신정통주의 노선에서 인간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양식비평을 사용하여 선포된 그리스도와 진정한 역사적 예수를 구분하였다.

불트만은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예수의 메시지의 부록정도로 처리하여 그 중요성을 위축시켰다. 불트만은 Weiss와 슈바이처의 연구 결과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실현이 부도난 점을 들어 신약의 종말론을 재해석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신약의 종말론은 미래 왕국의 도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이며 실존주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상당한 부분이 신화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신화는 객관적 사건의 묘사가 아니다. 2000년 전의 유대주의, 영지주의, 기타 세계관이나 역사적 자료들에서 자기들에게 실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표현하고자 빌려 쓴 글에서부터 오늘을 위한 영적인 의미와 그 실체를 도출하여 내지 않으면 신약 기사는 우스개거리로 전락되고 만다. 여기에 오늘 현재에 맞게 푸는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이 필요한 소이가 있다. 자유주의에서는 신화를 제거하였지만, 그는 그 신화를 비신화화시켜 의미를 탐색한 것이다. 불트만은 당시 Martin Heideggar의 실존주의 철학 사상을 빌려 신약성서의 기사를 조명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신약의 신화적 기사를 무엇이 일어났느냐를 기록한 역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 실존적인 것으로 재해석하여 현재적 만남(encounter)과 신앙의 반응을 일으키는 촉매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어떤 사건이 미래에 일어 날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푸는 전통적인 접근 방식을 벗어나, 즉 미래성을 거세하고, 현재적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Dodd와 다른 점은 세상의 끝날이 현재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구원이란 미래적 사건이 아닌 고린도후서 5:17에서 말하듯이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현재의 경험이다. 부활도, 심판도 모두 역시 현재적 경험이다(12:31).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전 15:54) 역시 현재적 경험이다. 예수 부활, 오순절, 예수의 파루시아는 모두가 하나의 사건으로 파악된다. 적그리스도의 등장도 각 시대에 있어 온 반복적, 현재적 현상이다.

 

E. John A. T. Robinson

Bultmann의 실존론적 종말론을 더욱 현재적,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성공회 신부 John A. T. Robinson (1919-1983)Honest to God(1963)에서 공관복음은 원래 예수 재림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재림 기사는 후대 가필 내지 편집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울의 재림 사상도 아직 예수가 메시아성 유무를 확신하기 전 단계의 사상으로 보았다. 그의 세속신학은 이 세상에 계신 하나님의 내재성을 극단화시켰다. In the End, God (1950, 1968)에서는 eschaton은 이미 도달한 것으로 보고, 성경 종말론은 역사 과정의 끝을 말하고자 함에에 있지 않고 역사의 목적(telos)에 관계된 것으로 풀이하였다. 종말에 관한 모든 진술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시인함에 있다는 것이다. 종말론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인식하는 경험에 지반을 두고 있다. 심판, 재림, 부활, 천년기 등 종말론적 기사는 미래 사건의 정보를 주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새 시대의 삶 안에서의 현재적 실재들이다.

 

F. Paul Minear

Robinson의 맥락에서 재림 등 종말에 관한 성서적 사상들을 상상적, 시적, 극적 상징으로 표출하고 있다고 보고 문자주의적 풀이를 배격하였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소망 표시의 한 가지 방식으로 그 신학적 의미가 중요하고, 그 문자적 표현은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그 신학적 의미는 미래 사건도 아니고 희망의 내용도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목표를 묘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G. Karl Rahner

Karl Rahner91904-1984)20세기 로마가톨릭 최대 신학자로 Theological Investigations 20권 대작을 남겼다. 그의 전 작품에 비하여 종말론 분량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다. 그는 로마가톨릭 호교론자로 연옥교리 같은 중간상태 도그마를 옹호하였다. 성경의 종말론 기사는 현재 경험의 투사로 본다. 미래적인 것 보다 현재적인 것에 역점을 두었다. , 미래 발생할 사건 보고서가 아닌 현재의 구원을 투사 표출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H. Schubert M. Ogden

불트만 제자로 그 좌파에 속한 Schubert M. Ogden은 미국 자유주의신학자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이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아 철저히 비신화화을 추구하였다. 그리스도인 희망에 관한 고전적 언어는 철저하게 비신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신화(myth)란 과학적인 것이 아니고 실존적이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본질적으로 신화적인 것으로 그 본래 의도는 지상 역사의 마지막 때 사건에 관한 사실적인 정보 제공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종말론의 진정한 의도는 현세에 있어서 인간의 현재적 삶의 본질적 구조와 의미를 조명함에 있다. 옥덴의 종말론의 열쇠는 하나님 개념과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 개념은 세계 속에 친근히 개입하시는 최고의 존재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시는 존재의 지반이 아닌 수 많은 존재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분이다. 죽음의 문제는 부활의 소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모든 국면이 영원한 상실 없이 하나님에 의하여 견지된다는 하나님 안에서의 확신(confidence in God)이 그리스도인 소망의 핵심이 된다.

 

I. Jürgen Moltmann의 정치적 종말론(Political eschatology, or Proleptic eschatology)

Jürgen Moltmann(1926- )1967년에 희망의 신학(The Theology of Hope)을 출판하였다. 이를 두고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 때문에 기반을 잃어버렸다"고 논평했다. 1967년에 잡지 "슈피겔"(Der Speigel)"그리스도인의 창백한 피 속에 철분을 공급하였다"고 논평했다. 비록 몰트만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역사와 종말론"이 차지하는 중심적인 비중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를 가장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대변한 신학자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바이쓰(J, Weiss)와 슈바이처(A. Schweitzer)가 자유주의 신학의 둑을 무너뜨리고 묵시적 종말론의 태풍을 몰고 왔지만, 결국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 이해로 되돌아갔다. 불트만 류의 의미를 캐는 비신화적 종말론은 인류와 교회에게 종국적 희망의 위로를 줄 수 없다. 묵시문학적 소망을 증발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종말론 신학의 흐름에서 새로운 희망의 물꼬를 터놓았다.

몰트만은 구약성서의 약속의 종교를 중심으로 희망의 신학을 펼쳤다. 그는 새로운 미래를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약속된 종말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신약성서의 복음도 약속으로 본다. 그는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신학,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usia)의 신학, 네덜란드의 사도직의 신학과 혁명적인 윤리 자료들을 활용하여 종말론적 방향과 메시아 중심의 희망의 신학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희망의 신학의 집필에 결정적인 동기를 준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무신론자) 에른스트 블로흐(E. Bloch)희망의 원리(Prinzip Hoffnung)가 그 촉매가 되었다. 몰트만은 Barth 신학에서부터 허기진 종말론적 이상을 탐색하는 개척자로 나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 중심적 주제가 되어야 할 이 희망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현대 신학계에 제기하였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바르트, 불트만 등 당대의 신학자들의 주제를 놓고 비판적 시각을 들어냄으로 자기의 종말론적 역사이해를 천명한다. 그는 계시가 약속과 희망의 성격을 갖고 있는 점을 중심으로 약속과 계시의 상관성과 그 특징을 설명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종말론, 미래의 지평을 세계에 열어 주는 교회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핵심, 즉 신학의 중심 모티브는 "다가오는 하나님(the coming God)"의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에 있다. 그는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세계의 미래의 주님으로 삼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 성서의 증언에 토대를 둔 희망을 일깨우고, 이를 사회적 유토피아와 정의의 유토피아의 토대로 삼으려고 했다. 희망의 신학은 문제 많은 현재에서 미래의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약소의 미래를 현재로 불러와 새로운 희망적인 현재를 창출하는데 있다. 약속된 미래야 말로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 된다.

종말론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교의 선포, 그리스도의 실존, 온 교회의 성격을 지배하는 희망을 제시한다. 이는 또한 현재의 혁신과 변화를 유도한다. 종말론적인 것은 그리스도교 종교의 부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리의 중추가 되고, 그로부터 다른 모든 것을 풀어내는 길잡이가 된다. 성서의 하나님은 세계 앞에 있는 하나님, 즉 희망의 하나님(15:13), 밤중의 불기둥처럼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13:21), 미래의 약속에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다.

종말론은 아직도 오지 않은 미래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미래 일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현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현실에서 출발해서 그 미래, 미래의 가능성, 미래의 힘을 알린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야말로 종말론적 정신과 유토피아적 정신의 토대요, 그 시금석이 된다. 특히 십자가는 미래를 보는 출발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이 땅의 희망이다. 희망은 고난 중의 위로일 뿐만 아니라 고난과 불의에 맞선 저항이기도 하다.

몰트만에 의하면 종말론적 희망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중심이며, 모든 음들 중에 주 조음이 되고, 새날의 여 명의 빛이 된다. 그리고 이 희망에 사로잡힌 교회는 죄와 불의로 찬 현실에 저항하기를 시작한다. 종말론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영혼이 구원받는 것, 시련 받는 양심이 위로 받는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정의의 희망의 실현, 인간의 인간화, 인류의 사회화, 전 피조물의 평화를 추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 희망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그리스도인 노력과 행동에 달려 있다. 믿음은 행동이다. 그리스도인 희망은 역사 안에서 창조적이고 전투적이다. 종말론적 기대의 지평은 구체적 역사적 주도권에 의미를 부여하는 윤리적 직각의 지평이다.

이런 점에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재림(the second coming)보다는 그리스도의 미래의 오심을 강조하면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정치적 종말론 내지 혁명론을 발전시키는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종말론이 현재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결국 약속의 사건이 되는 그리스도의 미래적 오심을 종말론적 천년론(eschatological millennialism)의 변조음 내지 미래가 현재 속에 이입하는 종말론적 존재론(eschatological ontology)으로 비쳐내는 역할에 머물러 있다.

현대 그리스도 교회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묵시문학적 패러다임을 껍데기, 신화 같은 천덕꾸러기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리스도교의 원래의 모판에서 나온 이 묵시문학의 패러다임에 대하여 푸대접을 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가 초기 사도교회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자처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트만은 그리스도교적 참된 종말론의 성서적 근거와 의미를 규명함으로써 초기교회의 소망을 일깨우는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신약 묵시문학적 소망의 미래성을 바로 살려 내고 있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다.

 

J. Wolfhart Pannenberg

Wolfhart Pannenberg(1928- )는 독일 루터란 출신의 신학자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희망의 신학의 전위로서 종말론을 신학의 열쇠로 중심부로 본다. 미래가 과거와 현재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가 미래에 의하여 결정된다. 하나님은 미래의 권능, 미래의 양식, 미래 발원체가 된다.

종말론의 핵심 개념은 종국적 미래(the final future)’이다. 종말론에 있어서 실존주의적 해석을 반대하고 우주적 역사 개념과 역사의 종말을 인정한다. 역사란 그 종말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따라서 최후적 참된 미래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역사적 미래는 종말론적이다. 역사를 신성한 역사(Geschichte)와 세속 역사(Historie)로 구분하는 것을 반대한다. 초월성과 내재성을 공간적 개념이 아닌 시간적 관점에서 이해를 추구한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종말론적, 예기적 사건이다. 예수의 봉사는 역사의 궁극적 의미를 예기적으로 들어낸다. 예수의 사명은 종말론적인 선구자(eschatological herald)로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적이 되게 한다. 종국적 미래(The final future)는 예수의 봉사에 이미 현존한다.

 

K. Gerrit C. Berkower

Gerrit C. Berkower(1903- )은 개혁 신학자로 The Return of Christ에서 그리스도교 소망은 현재적 실현과 미래적 실현의 양면성이 있다고 보았다. 현대신학의 종말론의 대부분이 현재성에 역점을 둔 것에 대하여 미래적인 국면을 보완한다. 종말론의 실존적 해석이나 비신화화 작업을 배척하였다. 초자연주의, 미래적 재림, 심판, 부활, 지구 회복 사건들의 문자적 성취를 인정하고 있다.

 

L. George E. Ladd

George E. Ladd는 천년전 재림론자로 종말론적 왕국이 역사 속에 투입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영적 통치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전히 성취될 미래적, 영광스러운 통치의 두 국면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은 가시적, 개인적,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래드는 휴거를 반대하고 있지만, 지상 천년기 통치를 주장하고 있다.

 

M. Oscar 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론(redemptive eschatology)

Oscar Cullmann(1902- )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정적인 날인 D-day, 그의 재림은종말론적인 V-day로 보는 이중 구조가 이미(already)”아직도 아니(not yet)"의 구도로 파악되고 있다.

 

N. 근대 세대주의 천년전 재림 2단계론 (Systematized eschatology)

(1) 발원 - John Nelson Darby (1800-1882) Plymouth 형제단 운동

(2) 지지자들 - C. I. Scofield(1843-1921), Lewis Sperry Chafer, John F. Walvoord, Charles C. Ryrie, Frank E. Gaebelein, J. Dwight Pentecost

(3) 기본원칙

a. 철저한 문자주의(文字主義) (如字主義)적 성경 해석 - 성경 자체가 철저한 문자주의적 해석을 용납지 않는 표현들과 예언에 나타나는 상징 사례들 무시

b. 이스라엘과 교회 이원론 - 세대주의 전 성경 해석의 기조가 되는 입장

c. 이원론적 언약관 - 모든 언약에 공통적인 조건적 예언과 무조건적 예언 구조 무시

d. 7세대론 -> 무죄-양심-인간통치-아브라함 언약-모세 율법-은혜(교회)-왕국 구분 방식 의 자의성

e. 휴거론 - 2단계 재림론

f. 환난 전 휴거론

g. 다니엘 9:24-2770이레에 관한 gap 이론적 해석

h. 율법폐기론, 율법과 복음의 대립론

i. 현대이스라엘의 팔레스틴 복귀의 종말론적 중요성

j. 구속사관 보다는 왕국 역사관 경도(傾倒)

(4) 사용성경 -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O. Jehovah's Witness

여호아 증인들은 종말론에 역점을 둔 종파이다. 이들의 종말론의 중심 주제는 마지막 때(세계 역사의 끝)에 하나님의 하늘 왕국 수립에 있다. 이들 종교집단의 본질적인 목적은 이 왕국 건설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증거하는 일이다. 그들의 예언적 계산에 따르면 하나님의 왕국 수립과 세상 끝은 느부갓네살 왕의 ‘7 ’(4:16)의 끝인 1914년에 시작되었다.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멸망시킨 607 BC에는 나무로 상징된 하나님의 통치권은을 대표하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607 BC열국의 지정된 때,” 또는 이방인의 때기간이 시작된 해가 된다. 이 연대에 7 때 기간, (360 x 7) 2520년을 가산하면 1914년이 된다는 것이다. 1914년에 그리스도에게 하늘 왕국이 주어졌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1914년에 하나님의 하늘 정부의 왕으로서 통치를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 파루시아, ,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사건은 하늘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불가시적이다. 1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가시적 지상적 징조들이 마지막 때가 하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인간의 운명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그 하나는 선택된 문자적인 수144,000명 그룹으로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통치할 것이다. 이들은 참된 회개를 하고 회심을 체험한 무리이며 신명을 바쳐 증인의 일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적 부활을 한 무리로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이며 영적인 이스라엘이고 적은 양 떼이다.

다른 한 그룹은 허다한 무리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다른 양 떼이며,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나 144,000 증인들처럼 충성을 다하지 않은 무리이다. 이들은 지상에서 아마겟돈 전쟁을 통하여 정화되어 지상적인 존재로 살아남을 것이다.

 

P. 현대 종말론의 특색들 구분

(1) 현재성 강조--C. H. Dodd, Moltmann, Bultmann

Ogden, Minear, Rahner, Robinson, Berkower, Ladd

(2) 미래성 강조--Schweitzer, Weiss, Millennialists, Jehovah's Witness

(3) 현재와 미래 강조--Ladd, Berkower, Cullmann, G. Vos, Hans K. LaRond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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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