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셀(Azazel)

종말 : 2016. 10. 4. 05:20

아사셀(Azazel)

 

아사셀 칭호는 레위기 16:8, 10, 26에 나온다. 대속죄일 의식에서 두 염소에 관련된 행사는 그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아사셀 칭호의 어원적 의미에 관하여는 명확치 않다. NKJV 같은 영어 성경에서는 “scapegoat”로 번역되어 있다. ”scapegoat (escape-goat)”는 벌게이트 역의 caper emissarius(보내진 염소)를 번역한 것으로 흔히 속죄양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이 아사셀이 인격적 존재인지 아니면 비인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지 논란이 되어 왔으나, 16:8에서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로 구분한 점에 비추어 인격적 존재인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맞다. 유대 전승에서도 인격적 존재로 보아 왔으며, 위경서이긴 하지만, 에녹서 10:8에서도 온 땅이 아사셀의 가르침을 받은 행위를 통하여 부패하여졌다. 모든 죄가 그로부터 기인된다하여 인격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아사셀을 인격적 존재로 보는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이어져 내려 왔다.

 

역사적 고찰

교부들의 해석을 일별하면 문맥 등 주석적 원칙을 통한 해석이 아닌 상상적 추측으로, 또한 즉흥적으로 풀고 있는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Justin Martyr (c. 100-165)는 아사셀을 그리스도의 재림의 상징으로 보았다. Tertullianus (c. 160-220)는 아사셀을 그리스도의 인성과 卑下로 풀었다. 알렉산드리아의 Cyril (d. 444)은 이른바 속죄양(scapegoat)을 우리 죄를 지고 승천하는 그리스도로 묘사했다. 이에 비하여 Origen (c. 185-254)은 이른바 속죄양(the scapegoat)을 아사셀과 동일시하면서 타락한 천사로 보는 색다른 특이성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이른바 속죄양의 의식을 속죄 교리 형성에 사용, 이어져 내려 왔다그러나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아사셀을 마귀로 보는 추세에 있다. 이런 경향은 아사셀을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표상으로 풀이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대척적인 모양새가 된다. 극과 극의 해석을 하여 온 개신교 신학의 성경 해석은 결국 자가당착이라는 난국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사셀 염소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논리적 근거

이른바 속죄양을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적용하는 그 주된 논리적 주장 근거와 그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 첫째 주된 근거를 다음과 같은 본문에 두고 있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16:22).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이 주장에서는 위 두 본문을 단순 비교하여 아사셀이 모든 불의를 지고라는 구절을 이사야가 예언한 예수께서 죄악을 담당한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사셀 염소를 지칭하는 레 16:22 기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이른바 에벧 야훼(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의 한 대목인 사 53:6과 비교하여 그 유사성 때문에 아사셀이 그리스도를 표상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 점에 관하여는 후술키로 한다.

둘째 논거로는 속죄양이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데려 감을 받은 것은 히브리서 13:12이 진술한 예수께서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에 상응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둘째 논거는 이른바 속죄양이 광야에 산채로 보내져 희생제물로서 피 의식이 결여된 점이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9:22)는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대속죄일 의식 행사에서 아사셀은 속죄와 관련이 없다. 피 흘림 없이 구원 가능성을 주장하는 모순을 범하는 그 외에도 히브리서가 문맥적으로 정규 속죄제를 다루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도 이 주장의 문제점으로 들 수 있다.

 

죄 담당과 죄 운반 처리

그러면 레위기 16:22에 나오는 메시지가 첫 번째 주장 근거에 따라 그리스도를 표상할 수 있는가?

성경연구에서는 특수 단어의 용례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단어가 문맥 안에서 다른 단어들과 결합되어 나타내고자 한 함의를 추출하여 내야 한다. “죄와 불법을 짊어진다는 구절은 범한 죄에 대한 법적인 형벌 죄책을 져야 될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28:43; 19:8; 20:17).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 구절의 주어가 되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담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그 대신 회개한 죄인을 용서한다는 것을 뜻한다(14:18; 25:18). 특히 고대 성소 의식 문맥에서는 죄인들이 자기 죄를 책임져야 한다(5:1, 2, 5, 6). 그래서 죄인들이 용서 받기 위하여서는 각각 자기들의 희생제물들을 여호와께 가져와야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물들을 여호와께 드려야 했다. 이 때 죄인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제사장은 그들이 고백한 죄가 제물에 전가되었다고 하며 희생제물이 죄인 대신 죽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죄인은 희생제물을 통하는 조건 하에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구원의 원리가 되었다. 제사장은 희생제물을 이용하여 속죄하였고, 각 개인은 죄 용서를 받은 것이다(6, 10). 죄가 희생제물에게 전가 되어 그 사람 대신 죽어야 했던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었다(53:4, 12).

죄를 범한 후 회개하고 고백한 자를 위하여 피를 번제단 곁에 뿌리기도 하였고(5:9), 족장의 경우 제물의 피를 향단 뿔에 바르기도 하였으며, 회중의 죄 경우에는 제물의 피를 휘장에 7번 뿌리고 여호와 앞 단 뿔에 바르는 등등의 의식을 거행하였다(4). 피 뿌림이 그들의 사함을 가져와 죄인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4:20). 이는 죄인의 죄가 안수를 통하여 희생제물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죄가 제물에 전가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 결과 죄인은 용서받아 정결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피의 의식을 통하여 성소는 오염된다. 죄인이 성소에 들어가서 정결하게 되어 나오고, 그 대신 성소는 부정과 오염이 누적되어 간 것이다. 정결과 오염이 교환적으로 일어나는 셈이다. 그리하여 대속죄일이라는 정결의 날에 대제사장의 성소봉사를 통하여 지성소를 위한 속죄가 이루어져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16:16). 이 경우에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속죄의식의 피 뿌림이 성소를 정결케 한다.죄를 담당하여야 한다는 구절의 표현 이해에 있어서 이런 성소봉사의 독특성이 담겨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이 경우 이 표현은 죄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운반하는 일에 역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죄를 담당한다는 표현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형벌을 받는다는 의미가 그 절대적 함의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의미의 유일한 예외 현상이 레위기 16:22에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에서만 나온다. 여기서는 NIV 역에 나온 번역과도 같이 죄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운반하는(to carry sin) 것이 그 특징이 되고 있다. 이 경우 염소는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것이 아닌 단순히 광야로 운반하여 죄와 불결의 창시자인 아사셀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구절의 용례는 성소에서 매일 제사드리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어서 우리의 대속자로 우리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를 지칭할 수 없는 것이다.

 

속죄의 광의적 개념

10:14그리스도의 한 제사”(one offering of Christ)가 지상의 성소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드리는 제사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협의적 의미에서 속죄 개념은 희생제물(sacrifice)드린 십자가 속죄에 있다. 이 십자가 속죄는 희생제물을 드린 것에 그 요체가 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희생제물의 속죄를 하늘성소에서의 중보(mediation) 속죄와 최후적 회복(restoration)으로 구속사업이 완결된다. 광의적 속죄개념은 이런 일련의 전개 과정을 포괄하고 있다. 속죄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범죄 전 에덴의 최후적 회복을 지향하는 것이다.

재언컨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는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리는 속죄이다. 그 후 지상성소 의식에 예표되었듯이 제사장이 번제단에서 희생제물을 드린 후 그 피의 의식을 성소에서 거행하였다. 예수께서는 제물도 되시고 중보하시는 제사장도 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 후 대제사장으로서 간구와 중보 속죄하시는 일을 하여 오고 있는 점은 속죄의 넓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하늘성소 법정에서의 조사심판(재림 전 심판)은 십자가에서 친히 희생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께서 그 공로를 적용하여 십자가속죄를 계속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일을 하시고 있다 (Keeping the Cros all alive!!!). 특히 속죄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7:9-11, 228:14은 십자가 속죄를 전제로 하고 그 속죄를 적용시키는 일을 말하고 있다. 갈보리 십자가와 그 공로를 믿고 회개하한 자기 백성을 옹호하시는 중보를 한 짝으로 연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요한복음 3:16을 근거로 예수께서 지성소에서 나오셔서 중보사역이 없어질 때 인간이 죄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을 두고 믿기만 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비평하는 시각은 천견에 불과한 일부 개신교적 논리에 편승하는 것이 되어 구속의 광의적 의미가 포괄된 성소 사역을 무력화시키는 꼴로 전락시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53:4)에 기초하여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 의 모든 죄를 지고 슬픔을 당하는 것이고 사단의 죽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 이 아니라 사단 자신의 죄 때문으로 보는 견해는 성소의식에 나타난 성경 전체를 통합시켜 주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라는 성서적 역사철학을 망각한 것에 불과하고 사단의 일을 축소지향적으로 보는 우를 번하는 것이 된다.

위에서 일별했거니와 레 16:8-10에서 여호와에게 속한" 염소와 아사셀에게 속한염소(16:8)는 상호간 대칭적인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바나바와 테르툴리아누스 등 일부 교부들의 추측대로 산 염소를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본이래 이 해석에 따르는 견해가 이어져 왔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희생제물인 여호와에게 속한 염소로만 상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레위기 16:8에 나오는 la‘azazel"아사셀에게 속하다(belong to Azazel)"의 뜻으로 여호와와 대칭이 되는 초자연적 존재인 마귀로 보는 것이 문맥에 맞다. 그 산 염소를 이른바 scapegoat(속죄염소)로 번역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피 흘림이 없는 아사셀에게 속한 염소는 속죄하는 대속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대속죄일 의식에서 아사셀을 위한 염손는 인간 대속이라는 것과는 무관하였다. 그 염소가 광야로 추방된 것은 그에게 죄책을 묻는 처리로 보인다. 이런 죄책을 지워 광야 추방, 그리고 죽음이라는 형벌로 보는 시각에서 레 16:10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산 염소는 적대자를 상징하는 아사셀에게 보내졌기 때문이다.

아사셀(사단) 해석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는 이론은 장로교 학자들이 해 왔다. 사단이 자기 죄만 책임진다는 것은 그에게 인류를 불행으로 몰아넣어 엄청난 비극을 초래케 한 것을 보지 않는 것이 될 뿐이다. 이는 죄의 장본인인 사단이 인간 역사 이래 전개되어 온 모든 죄악과 질병, 재앙과 죽음의 뿌리인데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물어야 되는가? 거시적 의미에서 아사셀 마귀가 그 책임을 지는 일이 없이도 구속 역사가 완성될 수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는가? 역사철학의 기조인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오도하여 하나님 폭군론을 전개하고 거룩한 율법의 폐기론을 주도하여 온 아사셀 사단에게 자기가 퍼트려 온 독이 가득한 쓰레기 차(garbage truck)를 운반하도록 하게 하므로 죄악의 역사를 책임지게 하여 끝장내게 하는 것이 광의적 구속의 완전한 회복을 이루어 가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죄악의 쓰레기를 책임지게 하여 그 형벌을 받고 멸망당하게 하는 시각에서만 우주적인 구속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통찰이야 말로 대속죄일에 아사셀을 통한 최후적 의식이 보여준 진면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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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