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당하는 자의 중보기도
고난당하는 자의 중보기도
욥기 38:1-2; 42:1-8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신음 소리와 상한 자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다. 욥기의 메시지에는 이 점이 간접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욥 24:12).
I. 고통의 연출자
사단은 고통과 질고의 연출자이다. 그는 하나님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겠느냐 대든다. 하나님은 까닭 없이 믿는 신앙의 표본으로 욥이 고난당하는 것을 허용하신다(욥 1-2장).
“죄는 현세에서 형벌을 받는다고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모든 고통은 고통당하는 본인이나 그의 부모의 어떤 잘못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되어졌다.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범법에서 초래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진리는 곡해되어 왔었다. 죄와 죄의 모든 결과의 장본인인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질병과 죽음은 죄 때문에 당하는 독단적인 형벌로서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래서 큰 고통 혹은 큰 재난에 빠진 자들은 큰 죄인으로 간주되는 짐을 더 얹어졌었다.
이와 같이 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절할 길이 준비되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분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사 53:4, 3)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외면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예방하시기 위해 계획된 한 교훈을 일찍이 주셨었다. 욥의 역사는, 고통은 사단에 의해 가해진 것이며 자비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역이용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욥의 친구들이 범한 같은 과오를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다시 되풀이하였다.”(소망, 470-471)
고통을 연출한 자의 책동으로 의인 욥은 그 까닭도 모르고 수난 당하였다. 의인은 자녀도 재산도 다 잃고 악창으로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욥 2:7). 욥은 어느 한 날에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재벌이 하루 동안에 거지가 된 것이다. 그것도 온 몸에 악창까지 번져 기왓장으로 몸을 긁었다. 악창은 문둥병을 두고 사용된 용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것을 두고 상피병이라고도 한다.
II. 주변 친구들의 비판
욥의 친구들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욥의 참상을 보고 한 주일 동안 침묵하다가 드디어 욥의 불행에 대한 일반론인 형벌징계론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직접 그런 불행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흔히 이런 일반론적 시각으로 상대방의 인격을 판단하고 가시 돈친 말로 고통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고통당하는 인간은 철저하게 깊은 외로움에 빠져들어간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이 당하는 고난을 죄의 결과로 보고 불행징계론, 고통징계론, 을 펼쳤다. 그들은 욥이 의인이 아니었기에 그런 불행을 당한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세 친구들과 욥 사이에 3 라운드의 주고받는 대화가 전개된다. 친구들의 시각은 의인이 고통당하는 것을 두고 보는 세상의 눈이다. 또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눈이다. 그들은 의인이라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보고 의인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못 박았다.
1. 엘리바스는 신학적, 철학적, 경험적 시각에서 고난의 벌을 통하여 더 완전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교정 징계론을 내 걸어 탈출구를 제시한다. 그 벌을 잘 받으면 하나님이 축복할 것이라고 하였다.
2. 빌닷은 전통과 역사적, 법리적 시각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인으로 의로울 수 없다는 불행 징계론을 전개하였다.
3. 소발은 인습적, 도덕가적 시각에서 욥이 하는 대답을 헛소리로 몰아세우며 독단적, 교리적 가정에 근거한 형벌고통론을 제시한다. 더구나 그는 욥의 재물도 부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논리를 펼쳤다.
4. 젊은 엘리후는 연로한 사람들이 주고받은 담론을 견제하면서 고통연단론, 고통정화론을 전개하고 대속도 이야기하며 주께서는 불의를 하겠느냐?고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기묘한 일을 궁구하라고 한다. 엘리후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근접하였지만, 그러나 사랑이 결여된 차디찬 권면이었다. 엘리후는 하나님보다 욥이 자신을 먼저 내세운다고 공격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공의롭다. 의로우시므로 전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선악에 따라 벌주신다는 것이다.
조문 온 이 친구들은 하나님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인간 욥을 배려하지 않았다. 욥은 친구들의 신정론을 거부하고 불행은 죄인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한다.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 때문에 욥은 크게 흔들린다.
5. 과거에 욥의 은혜를 받은 비천한 젊은 자들이 욥을 천대하고 기롱하였다(욥 30:1). 그들은 가시나무 아래 모여 고난당하는 의인에게 가시고통을 안겨주는 자들이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욥 30:7). 뜻 밖에 모진 고난에 난도질당한 욥은 위로자들의 가시나무 같은 채찍에 휘둘려 만신창이가 된다. 그런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내가 소망이 없노라(나는 그를 의뢰하리니)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욥 13:15)한다. --> 이 얼마나 큰 믿음인가! 그러나 아직도 그는 하나님께 맞선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여야 하느냐고?
III. 고통당하는 자의 신심 심화와 성숙
에덴 요양병원에서 며칠 자면서 보니까 환자들이 동병상련하고,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들이 역연하였다. 모진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의인은 깊은 신앙의 심성으로 돌아간다. 고난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남에게 모진 짓을 하지 못한다. 고난은 남을 돌보는 심성을 낳는다. 고난의 신비는 고난이라는 불행이 선이라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겪는 고통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 점에서 고난은 선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오히려 고난의 파괴적인 고통 한 가운데서 가장 건설적인 생명의 본질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IV. 침묵을 깬 하나님의 음성 그리고 욥의 반성적인 응답
1. 하나님의 음성
드디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인간의 언어는 언제부터인가 무지한 말이 되었다. 욥의 친구들은 경건한 믿음을 가졌지만 세상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모르면서도 무지 하고 헛된 말로(38:2) 자기들의 앎을 늘어놓았다. 인간은 참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말이 많아졌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알고 싶었고, 고난의 부당함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당함으로 보았는데, 하나님은 삶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이 자기에게 좋은지를 모른다고 ‘네가 아느냐?’고 반복하여 물으신다(38:4-7). 38:1-42:6까지 80개의 수사학적 질문들이 나온다. 특히 천연계 현상을 보라고 하신다(38-39장). 사람 사이를 떠나 천연계를 보면 은총의 세계를 안다. 그리고 천연계의 생명들을 보라고 하신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고 생명의 거룩함이 있다. 쓰러져 가는 생명이라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천연계로 시선을 돌리도록 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항변을 감사와 찬탄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늘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현상과 일들을 기적처럼 놀라워하며 감탄하는 연습을 자주하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나 한다. 이런 자세는 일상의 삶이 매 순간마다 축제의 장으로 바꿔준다. 욥이 아침에 일어나 신발을 신는 것도,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보는 것도,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큰 감동으로 다가 온다. 만나는 사람마다 가족처럼 느껴지고 앙상한 나무도 껴안고 싶어진다. 이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오늘 이 시간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며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임을 새롭게 기억하면서 하루 하루를 감격적으로 산다.
2. 욥의 반성적 응답
42:2 - 주께서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전지성을 이제 바로 보게 된다.
42:3 - 잘 알지도 못하면서/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23:10에서 고백한 대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내 앎이란 것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이제 고백합니다. 저는 그동안 잘 깨닫지도 못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욥의 심정이 묻어난 고백을 보여준다.
42:4 - “내가 말하겠사오니.” 3절에서 욥이 38:2의 질문을 되풀이한 것처럼, 여기서는 38:3의 질문을 반복한다. 그는 하나님의 질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드디어 그는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게 된다.
42:5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죄의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고, 절망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부터는 참 듣는 경지로 들어 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풍문과 전언에 기초한 신앙을 벗어나 이제는 친히 하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적 신앙 경지로 들어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의지를 주시고 희망을 기대하신다. 그리하여 인간은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선택의 자유를 통하여 희망을 본다. 인간 편에 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 편에 서는 법을 배워 나간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으로서 욥을 보게 된다.
42:6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고통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생각할 때 자신이 당한 불행에 대하여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회개의 핵심은 죄 보다는 죄스러움 또는 죄송함에 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함부러 말을 하였습니다./제가 알기에는/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은 이렇게 자기의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우주의 본질을 본 것이다.
3. 중보기도의 권능
암 환자가 그러듯이 욥은 새벽에 문득 입에서 쓴맛을 느끼며 한 모금의 달콤한 음식을 그리워하고, 어느 순간엔 곁에 있는 옷가지 하나 집기 싫은 무력증에 빠지고, 주변의 한마디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고, 예측불허인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의기소침해지면서 우울증에 빠져든다. '암환자의 고통에서처럼 설명 불가능한' 고통 속에 지내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 42:7)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는 나의 고난이 부당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고난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 욥기의 결말에 들어 있다.
욥기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견하는 책이다. 의인의 고난은 세상 사람들을 대속하는 일이다. 욥의 정체성은 의인이라는데 있다. 그는 곧 모든 고통당하는 의인의 대표자이다. 수난 받은 의인 덕택에 나머지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수난 당하는 의인은 이 원리를 잘 모르고 자기의 무죄함을 변호한다. 사단은 의인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불신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그 유혹의 지렛대로 불행을 사용한 것이다. 부자이기 때문에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부자와 의인이 한 사람에게 같이 갈 수 없다는 논리가 배어있다. 세인들의 시선도 불행한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욥의 친구들은 번제물을 바쳐야 했다. 욥은 중보자로 선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요구하던 욥에게 용서의 주체가 되는 길을 보여주셨다. 수난은 죄값을 대신 받는 것이다. 수난 받는 의인은 자기도 모르게 대속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 맞섰던 자가 이제는 용납하는 자가 된다. 그의 기도는 세상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정의가 없다면 강자들이 억압하는 혼란스런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용서가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태초에 중보자가 있느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제 태초에 용서가 있느니라는 뜻을 안고 있다. 하늘회의에서 인간이 범죄하기 전 은혜 언약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욥의 참혹한 불행의 돌파구는 고난당하는 자가 용서의 주체로 나선다는데 있다. 무심한 세상을 살리는 것은 수난 받는 의인의 마음 속에서 피어난 용서의 기도이다.
전에는 내가 왜 고난을 당하여야 하느냐고 맞섰지만 이젠 감사로 찬 말을 한다. 무엇을 달라는 청원기도보다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더 많이 한다. 감사할 일들이 갈수록 더 많아지고 나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으로 괴로움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가끔은 위로의 편지를 쓰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방문한다. 환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렇게까지 큰 도움을 주진 못할지라도 마음을 읽어주는 작은 위로자가 되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눔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욥은 전에는 자기가 완전한 줄 알고 약점을 고백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한 마디 말에도 깊은 상처를 입으리만큼 연약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회개하였다.
욥은 자기를 몰아세우던 자들, 가시 고통을 안겨주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하나님처럼 완전해지는 완전에의 길은 용서의 길이고 중보의 길이다. 욥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대속적 기도의 구약적 모델이 된다. 그는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희생 예표가 된다. 고통당하는 자의 중보로 인간에게 소망의 문이 열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바로 이런 고통이다. 그 예수님의 고통의 중보에 동참하는 욥의 고통의 중보는 가장 고상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완전을 내 안에서 체험하는 길은 욥처럼 용서의 중보기도를 올리는 일에서 완성된다.
이것이야 말로 욥기 결말의 중요 메시지를 이루고 있다.
4. 욥의 경우는 중보기도자 자신이 축복 받은 사례에 속한다.
욥이 자기를 책망하고 비난하며 죽어 마땅하다고 퍼부은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할 때 그 자신이 축복을 받았다. 욥기의 이 역발상적 전환은 고통문제의 돌파구를 열어 준다.
기도의 결과로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된 사람이 있다. 중보기도의 능력을 조사연구한 보고서가 있다. 의학박사 Dale Mathews(조지타운대학교 의과대학 내과 교수)와 전문간호사(Nurse practioner) Sally Marlowe는 플로리다 Clearwater 관절염 및 통증치료센터에서 환자들을 두 군으로 나누어 조사연구를 하였다.
한 무리는 집중적인 중보기도를 받고 있는 무리들이었다. 환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멀리서 중보기도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다른 무리 환자들을 위하여는 약물처방만 있고, 중보기도가 없었다. 이 두 무리의 환자들에 대한 임상의학 전문가들이 혈액검사 등 몇 가지 표준 진단을 하였다. 열심히 중보기도 대상이 된 환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도의 내용대로 들어주시는 놀라운 치유 결과가 나타났다. 중보기도의 축복은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났다.
고통을 당한 현재만 보지 말라. 섭리의 손길 속에서 욥이 고통을 중보기도로 승화시킨 그 끝을 보아야 고통을 이겨낸 축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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