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후의 첫 강화 (욥 32-33장)
엘리후의 첫 강화 (욥 32-33장)
욥기 개요
서언 (1:1-2:13): 첫 천상 장면; 욥의 재난; 두 번째 천상 장면; 욥의 신체적 고통
욥의 저주-탄식 (3:1-26)
대화 (4:1-27:23)
제1차 주기 대화 (4:1-14:22): 엘리바스-욥; 빌닷-욥; 소발-욥
제2차 주기 대화 (15:1-21:34): 엘리바스-욥; 빌닷-욥; 소발-욥
제3차 주기 대화 (22:1-27:23): 엘리바스-욥; 빌닷-욥
욥의 지혜 찬양 (28:1-28)
욥의 무죄 공언 (29:1-31:40)
엘리후의 강화 (32:1-37:24)
신적 현현 (38:1-42:6): 여호와의 첫 강화-욥의 반응; 여호와의 둘째 강화-욥의 반응
끝맺는 말 (42:7-17): 친구들에 대한 심판; 여호와의 욥에 향한 축복
I. 엘리후의 강화 서설(32장)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대담한 무죄 주장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모두가 당황스러웠다. 하늘의 응답을 기다리는 일 외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을 하고 계신다. 이 때 엘리후라는 젊은이가 곧 터질 것 같은 봉한 포도주 부대 같은 심정으로 분연히 일어나 변론권을 얻어 하나님의 명예의 수호자로 나선다.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욥32:1~5)
그는 이전의 세 분의 주장과는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의 논지는 이중적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인생길의 과오에서 돌이키기 위하여 연단하신다는 점과 하나님은 예외 없이 의롭게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엘리후의 논조는 이전의 세 사람의 처벌하기 위하여 고통을 주신다는 응보형벌론 논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엘리후는 세 사람의 주장과는 달리, 가르치기 위하여 고통을 주신다고 보고 있다. 불행은 인간의 어떤 의도적으로 빗나간 행동이나 무의식적인 과오를 각성시키므로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보다는 자비의 표출이란 점에 역점을 두고 전개한다. 이렇게 하므로 의인이 고난을 받는 자세가 하나님의 주권적 시각으로부터 무엇인지를 천명해 나간다.
엘리후의 강화의 시작은 나이가 더 들었다고 진리를 다 깨닫는 것이 아니라고 핀잔한다. 나이와 지혜가 정비례하는 것 아니란다. 전능자의 기운으로 피 끓는 젊은이의 돌발적 대시이다.
II.. 엘리후의 강화1(33장)
엘리후는 4개의 강론을 토설하였다. 이에 대한 욥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는 제33장을 중심으로 옐리후의 강화에 나타난 세 가지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보다 의롭다고 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엘리후는 욥이 자기는 죄가 없고 허물도 없는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고 한 말을 붙잡고 몰아세운다. 그래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보다 의로운 자라고 폄론한다(33:9-11).
욥은 친구들의 신정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신정론이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변호한다. 하나님은 옳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재난을 당하는 자에게 이 말은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그토록 비정하단 말인가? 고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언어로 고난을 설명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의가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가 아닌가. 원래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가 되신다. 신뢰와 사랑의 시각이 설명과 논리의 재단을 앞서야 한다. 알 수 없는 고난에게 그 까닭을 알려주려고 나서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
세 친구들처럼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고난은 죄의 열매이므로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케 할 수 있다. 고난 문제가 이해 안 될 때는 설명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설명은 오는 세상에서나 가능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원인을 따져서 밝힌다고 욥의 울음이 그쳐질까? 인간은 재앙과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다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고난을 품어주고 믿음의 순례 길에서 몸부림치는 욥과 동행해 주면 될 것이다.
욥이 친구들의 신정론을 거부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재앙을 당하리만큼, 또는 고난의 훈련을 받으리만큼 파렴치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고 자신의 무죄함을 피를 토하듯 토설하여 왔지만, 또한 하나님의 의로움과 선하심에 대하여 의문을 피력하긴 하였지만, 자기가 옳고 하나님은 틀렸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수평적으로 다른 인간과 비교한 것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자기가 더 의롭다고 해석하는 주변 사람들의 눈이 문제이다. 한계선상에 있는 인간 실존이 어떻게 하나님과 맞설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대결하려는 듯 하는 욥의 항변은 벼랑에 몰린 상황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한 몸부림으로, 그리고 비통한 자기 상황을 두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싶어서 나온 것으로 포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욥의 신앙의 언어를 엘리후가 비록 성령의 이름을 빌려 논박하며(33:4), 논리의 언어로 다가가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다고 퍼부은 것은 젊은 혈기의 남용일 뿐이다.
2. 엘리후는 경건한 자의 자세는 따지며 달려드는 자세가 아니고 침묵하는 자세라고 한다.
욥이 절벽 같은 극한 상황에서 주권자 하나님에게 불평, 원망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이 미주알 코주알 모두 밝히시는 분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말없이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욥 33:13-14).
엘리후는 말이 앞서는 인간과 말이 없으신 하나님을 대비하고 있다. 그는 욥에게 되어가는 일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 이해 안 되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결국에는 아귀가 맞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논쟁할 생각을 버리라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사람의 자세란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 상대가 아니다. 필요한 경우 하나님은 밤에 꿈과 환상 속에서 알려 주신다고 한다(33:15-16).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어는 상호 교류가 아닌 일방 통보식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엘리후 강화 직후에 이어지는 신적 현현(theophany)조차도 여호와의 강화와 욥의 반응이 교차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는가!
엘리후 강화에서 역점을 둔 점은 하나님은 꿈과 고통을 통하여 가르치신다는 점에 있다. 이 점은 맞다. 그러나 엘리후가 꿈과 환상을 통하여 받은 말씀이었던가? 엘리바스처럼(4;13-15)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라고 선포하였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제한시키는 엘리후는 하나님 위에 군림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가슴아파하신다. 자기 백성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고통당하는 인간에게 위로와 구원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대는 하나님의 고통의 시간대이다.
3. 엘리후는 인간이 재난을 당하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것을 두고 훈련(disciplinary)으로 풀이하고 있다(33:8-30).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16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17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18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19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욥 33:15-19)
고난 징계론이 고난 연단론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돋보인다. 그는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비취려 함에 있다”(33:30)고, 회복의 길을 설파함으로(33:26) 앞의 세 사람의 강론보다 진일보 하였다. 그는 고난을 통해 의와 성숙을 이루고자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엘리후가 지적한 말은 의인 욥의 고통을 두고 “꾀”나 “교만,” “구덩이”와 “멸망” 운운 하는 것은(33:17-18) 인정머리가 없어 보인다. 또한 엘리후의 시각은 그가 말한 대로 (꿈과 이상 언급)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이란 장면이 전개 되었을 때, 욥의 친구들의 변론이 우매한 것에 불과하여 정당치 못하다고 한 점(42:7-8)에 걸맞지도 않는다. 성경의 갈피갈피에 나와 있는 사랑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도 상치된다. 더구나 욥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불행의 본질은 하나님의 징계라는 논리가 아니다. 징계하고 은혜로 징계를 푸시는 하나님이라는 메시지(33:26) 보다는 위로와 은혜의 메시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욥이 받는 징계를 위한 중보자로 나선 듯 하는 엘리후의 대속 사상(33:23-24)을 더 돋보이게 할 것이다.
III. 나가면서
욥이나 그와 변론하는 자들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고난 이슈에 관하여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이 쉬울 때도 있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욥의 경우처럼 그렇지 않은 때가 너무 많다. 그래서 고통의 문제는 여전히 미결 상태로 남아있다. 인간의 이해력과 판단력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제한된 이해력 범주에서 각기 자기의 주장을 펼칠 뿐이다. 우리가 욥기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에 대해 말할 때에 겸손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이 많이 든 자의 지혜도 젊은이의 신앙적 혈기와 분노도 이 겸손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면 설령 맞는 논리라 할지라도 구원과는 거리가 멀 뿐이다.
인간의 언어로 고난을 설명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의가 다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이다.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상대이시다. 그래서 신뢰와 사랑의 구원 시각이 설명과 논리의 재단을 앞서야 한다.
<참고서: (John E. Hartley, The Book of Job, 36-37; Roy B. Zuck, Job,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양명수, 욥이 말한다 (분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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