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고통 받는 이유

  욥은 고통 받는 모든 인류를 상징한다. 욥기에 나오는 의인의 고통 문제를 2016년 제4기 동안 연구하면서 이제 그 마지막 과에서 욥기에서 배울 교훈들을 살펴보면서 의인이 고통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의인의 고통의 문제는 이 세상에 악이 허용되고 있는 이유라는 거대 담론과 연계되어 있다.

철학자들은 우주 안에 있는 악의 실존을 그리스도교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흔히 연역추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상호 모순된다는 주장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그 연역추리의 예를 하나들면 이렇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선하신 분이어서 악을 파멸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분이어서 악을 파멸시키실 수 있다. 그런데 악이 파멸되지 않고 있으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선하시고 전능하시어 고통을 막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에게 고통과 고난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는 비밀에 속한다. 이른바 신정론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변호한다. 그러나 욥과 같은 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재난을 당하는 현상을 신정론적 시각으로 보자는 주장은 언 듯 보면 공허한 소리로 들려온다. 그만큼 인간의 통찰이라는 것이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경륜을 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포괄적으로 전 성서를 통하여 의인에게 고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살펴봄으로 우리 눈을 더 넓고 높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하나님의 경륜에는 죄악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고통에 어떤 목적이 들어 있다. 어릴 때 집에 베틀이 있어서 천을 짜는 것을 보고 자랐다. 직조하여 가는 베의 뒷면은 앞면에 비하여 다소 거칠어서 보기에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였다. 오늘 이 시대는 고도의 기계로 안팎이 차이가 옛날처럼 울퉁불퉁하게 짜 내지 않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면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흔히 직조되어가는 베의 뒷면을 보면서 판단하듯 이 고통 문제를 판단한다면 잘못된 시각이 되기 쉽다. 잘못된 시각을 고쳐 매끄러운 앞면을 보고 만족, 감사와 찬탄을 하는 시각이 마땅한 바른 시각이 될 것이다. 인생살이 직조에 있어서도 마치 베 뒷면에 거칠게 얽힌 것 같은 것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분이 내 인생을 짜 나가는 직조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다.

 

I. 네 가지 중요 지반이 되는 법칙들

A. 하나님은 주권을 지니셨다. 이 우주에는 그 분의 관장에서 벗어난 어떤 원자도 있을 수 없다. 이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따른다. 욥기가 주는 교훈에는 고통의 세상 위에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고, 삶이 결코 헛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약속이 담겨 있다.

B. 오늘날 이 세상은 정상적이거나 창조 당시의 상태가 아니다.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오늘의 세상은 죄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 창세기 3:14-19에는 죄악이 들어오면 이런 비극적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예고되었으며, 로마서 8:19-23에는 불행하게도 그 예고된 대로 일어난 현상을 적나라하게 지적되어 있다. 모든 고통 배후에는 원초적 타락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

 

C. 비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내리는 현상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 일어난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천연계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재난들을 당하게 마련이다. 의인이라고 해서 천연 재해로부터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D.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에는 목적이 있고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이 보기에는 우연한 사고라고 할지라도 섭리적 차원에서 보면 결코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사람이 자기 스케줄에 따라 살아가는 동안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고통에 관한 직답을 곧 주시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틀에서 직조되어 가는 베의 앞면을 바라보도록 권고하신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II. 중요한 약속들

 

A.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한계와 연약함을 아신다. 하나님 백성은 시험(peirasmov")’을 만날 것이다. 또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시련)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B.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당하는 고통과 고난의 종국은 선을 빚어낼 것으로 약속하셨다. 신자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에는 목적이 들어 있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참아내고 꼴 지어 가기를 바라시는 거룩한 목표를 지향케 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목적 없는 고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고난은 뜻과 목적이 없는 불합리한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C. 고통과 고난을 야기 시킨 죄악의 저주는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 걷혀질 것이다. 곧 다가 올 그 날 승리가 예정되어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재림의 날까지 고통에 대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III. 고통의 세 범주들

악은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으로 나뉜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죄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고통은 불가피하다. “죄악이 존속하는 한 고통과 사망은 불가피한 것이다”(PP 522).

 

A. 천연계의 범주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있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을 다 피할 수 없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악은 지진, 홍수, 전염병과 같이 자연재해로부터 생기는 악이다. 몰아쳐 오는 태풍이 농부가 애써 땀 흘려 가꾼 농작물들을 휩쓸어갈 수 있고 전염병 바이러스가 아이들을 해칠 수 있다. 이런 모든 현상을 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수 없다. 모든 고통은 원천적으로 죄악의 결과이지만, 고통당하는 당사자의 죄의 결과로 판단하는 일은 금물이다.

천연계의 법칙(자연법칙)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예컨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살면 고통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도덕법칙과 같은 랭킹의 건강법칙은 자연법칙에 속한다.

 

B. 도덕적 범주

천연계에 물리법칙이 있듯이 인간 사회에도 도덕법()이 존재한다. 인간사회에서 이 하나님의 도덕률을 짓밟고 살아가면 커다란 악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살인, 절도와 같은 도덕적인 악은 인간의 고의적인 행위로부터 나온다. 도덕률을 유린한 결과로 고통이 온다. 우리는 가정이 파괴되는 결과로 얼마나 큰 고통이 수반되는지를 늘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C. 형이상학적 범주

모든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과 고통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다. 욥기 서두는 이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사탄은 세상을 움직이는 악의 배후 세력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욥의 역사는, 고통은 사단에 의해 가해진 것이며 자비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역이용되었음을 보여 주었다”(DA 471).

사탄이 유다를 꼬드겨 배신의 길을 걷게 했다. 사탄이 유다 속에 들어갔다는 언급은 (22:3)(13:2)에 나타나고 있다. 누가는 사탄이 유다 속에 들어가서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게 만들었다고 한다. 요한은 사탄이 유다 속에 들어가는 단계를 둘로 나누었다. 그는 사단이 첫째로 유다에게 예수 팔 생각 넣었으며(13:2),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두 번재로 다시 유다 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13:27). 이렇게 누가와 요한은 유다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사단의 움직임을 지적하고 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심킬 대상을 찾고 있다(벧전 5:8).

 

IV.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허락하신 성서적 이유

 

궁극적으로 고통을 통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하늘 품성으로 빚어내는 성화의 방편으로 삼으신다.

 

A.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에서 승리하면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슬픔과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주제를 담고 있다. 고난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란 사상이 관통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6; 2:12, 18; 3;14; 4:4, 12-14). 욥기가 보여주고 있는 점은 고통이 인간을 하나님에게 향하게 한다는 점이다.

 

B. 신자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도록 하기 위하여

고통을 통하여 영적으로 더 성숙하여 간다. 고통은 인간의 심령을 정화시키고 믿음을 강화시킨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끗케 하는 일은 그들의 고통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불순물을 태우기 위해, 가치 있는 것으로부터 무가치한 것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순수한 금속이 빛을 발하도록 시련의 불을 허락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시험하시며 우리가 차례로 불을 통과하게 하신다”(4T 85).

 

 

C.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본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신자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워 나간다. 바울의 고백은 이 점을 증거하고 있다(고후 12:7-10). 예수께서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 대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을 얻으셨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8-9).

 

 

D. 신자로 하여금 더욱 감동적이고 효율적인 봉사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역사는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조지 폭스는 <순교자의 사화>에서 지적한 것처럼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된다. 스데반의 순교는 바울의 심령에 지울 수 없는 복음의 감동이라는 씨앗을 심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신자의 봉사와 증거는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감정이입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고후 1:3-4).

 

E. 개인적 죄 때문에 연단, 즉 사랑의 징계를 받게 하기 위하여

벌카우워 말 대로 고통은 영원의 위대한 미 완성품이다. 어떤 고통은 개인이 범하는 죄를 중단시키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베푸시는 연단이며 징계가 된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12:5-10).

 

F.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죄가 남긴 고통은 연대성을 지녀 무고한 사람까지도 고통에 휘몰아 넣는다. 교회의 중책을 맡은 사람이 타락하여 죄를 범하면 온 교회가 고통을 당한다.

.

G. 고난을 통하여 구원 받게 하시기 위하여

고통의 왕이신 예수(da 752)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삶을 선택하셨기 때문이 우리를 구원하시었다.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9-12).

죄악이 존속하는 한 고통과 사망은 불가피한 것이다. 다만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의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인류는 자신에게 닥쳐올 죄악의 무서운 결과에서 피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PP 52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1:29).

'성경으로부터 풀어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1:1-2 풀이  (0) 2017.01.15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0) 2017.01.02
엘리후의 첫 강화 (욥 32-33장)  (0) 2016.12.01
고난당하는 자의 중보기도  (0) 2016.10.23
순례자들 Pilgrims  (0) 2016.08.24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