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2 풀이
<다음 자료는 오래 전에 마련한 자료에 지난 주 입수한 최신 재림교회 창세기 주석서인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Jacques B. Doukhan의 Genesis, Seventh-day Adventist International Bible Commentary (Pacific Press and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n., 2016), 48-53 을 엮어 만든 것입니다.>
창세기 1:1-2 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개역개정판, 창 1:1-2).
Jacques Doukhan 박사는 이 본문을 창조조일 기사(창 1:1-2:4a) 전체의 서언(prologue)으로 보고 있다. 먼저 창세기 1장과 2장의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A.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
절대적, 초월적, 우주적 권능의 시각이 강조된 엘로힘 기사(창 1:1-2:4a)는 관계적, 내재적, 인격적 시각을 강조한 YHWH 기사(창 2:4b-25)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 우주의 시작과 동시에 미시적 지구행성의 시작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어떤 분의 말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와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 둘을 대비시켜 놓고 보면, 이 둘이 문자적으로 이해되는 한, 도저히 서로 양립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라는 사실"이라고 한 주장(인용)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과연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사가 P 자료와 J자료의 편집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는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1978년도에 나온 Jacques Doukhan의 박사학위 논문 <창세기 창조 이야기의 문학적 구조(The Literary Structure of the Genesis Creation Story)>를 참고하면 기본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재림교회는 오래 전부터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의한 창조설화 해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처하여 왔다. Gerhard F. Hasel의 <현대 성서해석(Biblical Interpretation Today)도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 외에도 여러 학술지나 잡지에서도 동 주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회의주의적 문제제기도 오래된 것들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1. 통시적 접근법과 공시적 접근법
역사비평 방법(자료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을 성경해석에 적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경문서의 역사적 발생 및 진화 발전과정에 초점을 둔 통시적 접근방법을 기본적인 척도로 삼고 있다. 그들은 원 자료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수정 및 재해석되어 왔다고 하면서 그 배후의 사회 문화적 배경(삶의 정황) 등을 파헤쳐 그것이 성경 해석의 결정적 요인이 된다고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G. Maier는 <The End of the Historical-Critical Method>에서 이같은 역사비평방법이라는 패러다임에 파산선고를 내린 바 있다.
각종 문서설을 만들어 낸 통시적 접근 방법에 대응하여 공시적 접근방법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성경상의 상이 또는 반복적 본문들을 상호보완적 문학 장르로 이해하여 왔다. 또한 상이하게 보이는 기사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상이한 편집자의 편집이나 수정이 진화 발전한 것이 아닌 같은 시대에 같은 저자가 쓴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하여 호응을 받아 왔다. 이들은 상이한 기사를 써야 하였던 저자의 내적 의도를 탐색하므로 상이한 문서들을 상호 보완적 내지 밀접한 관계로 이해하고자 하여 왔다.
2. 성경본문의 반복적 보완
같은 의미를 각기 다른 말로 전달하는 평행법은 히브리 성경 문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정교한 형태는 교차 평행법으로 나타난다. 성경은 반복적 표현이라는 방법을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반복적 표현 양태는 창조 사건을 묘사하는 창세기 1장과 2장에도 나타난다. 그 외 홍수 사건, 사라와 리브가의 이야기 등에서도 나온다.
자료 또는 전승 비평자들처럼 창세기 1장과 2장이 각기 다른 출처를 지닌 한 쌍의 반복된 설화들로 보고 있는 것은 근시안적인 접근방식에 불과하다. 같은 예언자가 다니엘 2장, 7장, 8장의 평행적 예언들을 취급하였지만 마지막 때 사건의 양태를 더욱 구체화시키면서 그 종교적 국면을 부각시키는 보완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장과 절 구분은 후대의 소산물이며 현재의 구획은 사실상 2장 4절을 중심으로 재구분하여야 문맥의 흐름과 내용에 걸맞는다. 모세는 창세기 1:1-2:4a에서 6일 창조의 전체적 국면을 진술보도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일을 준수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사건에서 안식일 제도의 기원이 있다는 것으로 창조 기사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 후에 창세기 저자는 1장의 창조사건의 기술을 보완하는 2:4b-25을 서술하고 있다. 이 2:4b-25은 창세기 1장의 단순한 반복 기사나 별도의 자료의 이중적 제시가 아닌 것이다. 2장은 1장 창조 기사에서 인간 창조와 그 환경 부분을 확대 보완한 것이다. 2:19p 나오는 “...지으시니라”는 동사의 히브리 문법 상 (wau-consecutive-imperfect) 의미는“...지으셨었느니라” “...만드셨었느니라(...had formed)"로 보아 1장의 창조 기사를 보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야지 새로운 별도의 창조처럼 이해하는 독법은 문법적 의미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2:4b-7까지는 비가 오기 전 또 인간이 땅을 경작하기 전의 지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 창세기 1:1-3과 모순되는 별다른 창조 기사로 보는 것은 창세기의 구조와 문법에 충실하지 못한 해이된 설명에 불과하다. 요컨대 2:4b-7은 세계 창조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인간 타락과 홍수 이후적 상황에서 기록한 것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상이한 하나님 이름을 근거로 자료 내지 편집비평을 두둔하는 방식은 단세포적 발상에 불과하다. 마소라 사본이나 쿰란 사본에는 하나님 이름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정황과 목적에 따라 다른 이름을 사용하게 하시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엘로힘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 세계에 초월적 존재, 즉 창조주를 묘사하는 이름이다. 동 2장에서는 인격적 이름 야훼가 엘로힘과 함께 나오고 있다. 야훼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이름이다. 하나님 이름이 다르게 나온다고 하여 각기 다른 문서의 결성이라고 보는 비평적 주장은 Jean Austin의 <추측>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B.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1. “태초에 (bere’shit)”
강조어법인 이 구는 창조 기사에 관한 의 기술적인 표현으로 히브리문법구조(離接的 접속사 악센트)와 전승 모두가 지구 행성 창조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창조까지도 이중적으로 포괄 지층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중적 독법을 지지하는 것은 창 1:2, 7;14-17에 나오는 물, 하늘들, 해, 달, 별들의 기사에 근거를 둔 풀이이다.
2. 하나님(Elohim)
엘로힘 칭호는 ‘alah 어근으로부터 파생된 단어로 권능성과 탁월성의 의미를 지녔다. 엘로힘의 복수적 어미 형태는 우주를 초월한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엄성과 强度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다. 이런 어법은 엘로힘 단어의 위치가 7개 단어로 된 1:1의 문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점과 엘로힘 발음의 독특한 억양에 잘 나타나 있다.
3. 天地(the heavens and the earth)
이 천지 표현은 수사학적으로 두 개의 대조적인 단어를 하나로 결합시킴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기법이다(merism). 따라서 “천지”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창 1:1의 본문의 의도는 전 우주가 창조주일 동안 동시에 창조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 창조 순서, 시간, 방식 설명 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점만을 시사하고 있다. 본문에 비추어 우리 지구 행성은 우주에 외롭게 있지 않고 광대한 창조의 일부에 속한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행성의 창조는 이어서 죄로 오염되어가는 행성이어서 종말론적인 재창조(사 65:17)가 필요하다.
4. 창조하시니라(bara’)
bara’ 단어는 bere’shit의 bere’와 어근은 다르지만 같은 br’ 세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바라(bara’)는 “태초에(bere’shit)”라는 단어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태초와 창조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bara’는 특별하고도 독특한 신적 태초의 창조 행위를 기술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bara’ 의 주체(주어)가 되신다. 이 단어는 창조주일 기사에서 7회 나오고 있다(1:1; 21, 27<3회>; 2:3; 2:4a).
C. “땅이 혼돈하고(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1. 땅(the earth)
“땅”은 문장 서두에 나와 강조어법으로 되어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행성에 초점을 둔 표현이다. “waw”라는 “and” 가 “땅”에 선행하고 있어 이하의 기술이 선행 1:1의 기술과 대조를 이루는 특성을 지녔다. 즉, “혼돈,” “공허,” “흑암,” ‘깊음“의 묘사를 선행 1절의 아름다움과 선으로 찬 창조 시사와 대조를 시키고 있다.
2. 혼돈과 공허(tohu wabohu), 흑암과 깊음(tehom), 물(수면)
“tohu wabohu”는 의성어(onomatopoeia)이다. 개정개역판이 “혼돈”을 “형체가 없고”로 번역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서 선행적인 어떤 것의 존재로 오해하기 쉽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그것은 “비존재, nothingness,”를 뜻하는 말로 “헛된”(사 29:21) 나 “삭막한”(욥 6:18)으로 사용되고 있다. 혼돈은 무(無) 또는 비(非)존재(사 40:17, 23; 49:4)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욥기 26:7은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나타낸다. 욥 26:7의 하단은 하나님이 “땅을 공간(nothing)에 다시며”라고 진술하고 있다. 상단은 “그는 북편 하늘을 토후[허공]에 펴시며”라는 평행절로 되어 있다. 욥기의 이 본문은 창 1:2에 나오는 토후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데, tohu와 짝을 이루고 있는 bohu는 “텅 빔(emptiness)”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tohu의 동의어가 되는 보후(bohu)는 땅이 형태가 없고 생명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두 개의 단어가 같은 의미 즉, “無”로부터 창조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흑암과 깊음(tehom) 역시 무존재, 비존재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ex nihilo(무로부터의 창조를 시사하고 있다. “깊음(tehom) 위”는 “수면 위”와 평행구로 되어 있어서, 수면 위 역시 “무(nothingness)”를 나타낸다.
필자가 박사과정 시절 Jacques B. Doukhan 박사의 창조에 관한 특강을 듣고 질문시간에 물은 언제 창조되었느냐고 한 질문에 위와 유사한 답을 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TDOT 8:279역시 물(mayim)이 형태 없음과 사라짐(formlessness and evanescene(消散)을 상징하는 말로도 풀고 있다. 이런 맥락은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시 58:7)와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같이”(욥 14:11 등)에도 나타나 있다. 요컨대, 흑암- 깊음(tehom)과 마찬가지로 “수면 위”도 無, 생명 없음의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표현들이다. 후기에는 흑암과 물이 죽음이라는 사상을 결합되어 있다(욥 10:21; 시 144:7). 이처럼 창 1:2는 지구가 창조 되기 이전에 형체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로부터 어떤 것을 창조하였다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물은 땅의 부정적 표현어로 사용되어 있다. 따라서 無, 텅 빔의 상징성을 띄고 있는 물을 어떤 요소를 지닌 물이 선행적으로 존재한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근동 신화에 나오는 갈등 구조로 된 창조 이야기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어떤 선재적 물질에 의존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3. 하나님의 영(j'Wr,, ruakh)의 운행
구약성경에서 “루아흐(ruakh)”는 “바람,” “영,” “공기”로서 생명의 원리 또는 素因이 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j'Wr)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j'Wr))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29-30).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공기가 인간 창조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창 2:7; 참조, 욥 32:8).
이 루아흐는 영적으로 생명을 뜻하고 있다.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는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기”(시 115:17) 때문이다. 하나님의 루하흐가 인간에게 지혜와 깨달음을 준다. “사람의 속에는 영(j'Wr,,, spirit)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hm;v;n_, 네솨마 breath)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욥 32:8). 여기서 루아흐와 네솨마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욥 4:9에 관한 Andrews Study Bible 해석 참조). 하나님의 영(j'Wr)) 없이는 영적 생명을 지닐 수도, 영적 삶을 살아갈 수도 없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하나님의 루아흐(영/바람/공기)의 임재가 생명도 없고 빛도 없는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운행하시니라”는 “품다,” “떨다”, “흔들다”의 뜻을 지녔다. 시 104:30은 창조 행위가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과정에서 성령이 능동적인 역할을 감당하셨음을 암시한다. 이런 사상은 창 1:2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일한 히브리어가 신 32:11에서는 둥지를 감싸고 있는 독수리 같으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성령은 지구 생명 창조에 밀접히 관여하시며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이제 막 지음을 받을 피조물들을 돌보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루아흐가 無의상태에 있는 것 위에서 생명의 약속을 수행하고 계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생명의 약속에는 단순히 생명의 선물이라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까지도 비록 흑암과 죽음이 몰려와도 계속적으로 그리고 충성스럽게 지지하고 피조물을 유지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예기케 하고 있다. 이렇게 창 1:2에는 하나님의 현현의 이 소망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시편 18:10-11에는 이런 풀이가 가능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1 그가 흑암을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시 18:10-11).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16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시 18:15-16).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루아흐-성령 하나님께서 흑암의 無의 심연인 물에서 창조사건을 터뜨리시는 모습을 상기하며 절망적 상황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시 18:16-18 참조). 우주와 지구 행성의 창조 사역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뿐만 아니라 (창 1:1, 골 1:16~17), 성령께서도 함께 참여하셨다. 이 성령 하나님은 피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 특히 어둠과 절망적인 혼돈과 공허처럼 되어 버린 삶에게 희망을 안겨 주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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