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으로 사는 존재
덤으로 사는 존재
(참고: 1999년 3월 27일 삼육대학교교회 설교 내용입니다.)
(예배로의 초청)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내 영혼의 고통을 인하여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첫찬미:21장/끝찬미: 543장/특창:546장 (구 찬미가)
성경 본문: 사도행전 27:34-37
고향 장날에 배어있는 향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날은 풍성하고 기쁜 날이다. 여느 때에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는 날이며 친척들의 방문이 있는 날이다. 남이 장에 가니까 따라 간다는 말이 생겨 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직도 하였다. 시골의 단조로운 삶에서 해방시켜주는 여러 풍물들이 한 곳에 어울리는 곳, 갖가지 상거래와 교역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의 교차들, 두툼해진 쌈지에서부터 오래 만에 만져 본 뭉치 돈의 흥분,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안사겠다고 가면 붙잡고 흥정하는 상인...흘러간 옛 노래처럼 아쉬운 정경들이다. 싸전에서 풋주간에 이르기까지 상인들은 제 값어치 이외에 덤으로 더 얹어주어 고객의 인기와 정을 끄는 일을 의례히 하였다. 정찰제에서는 찾기 어려운 아기자기한 맛이 풍기는 덤 작전이었다. 제 값도 없는 존재가 덤이다. 팔려 가는데 덧 부쳐 끌려가는 존재가 덤이다. 대게 덤이란 사는 물건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수 십분의 일이나 그보다도 적은 것이 덤이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의인 50명에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의 마지노선을 내려가며 마치 시골 장터에서처럼 흥정하는 일이 있었다. 우리 하나님은 정찰제의 하나님이 아니라, 값을 몇 번이고 깍아 주시는 고마운 상인 하나님이시다. 만일에 의인 10명이 있었더라면 소돔성 안에 살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덤으로 살아났을 것이다. 의인 10명에다가 덤을 그 수 천 배씩이나 올려 주겠다는 하나님의 구속의 상업 전략에 감격하면서도 아연 실색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사람의 의인 때문에 275명이 덤으로 살아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 개요
바울이 세 번째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아가보 선지자 같은 사람을 통하여 바울의 허리띠를 빼내어 자기 몸을 결박하면서 띠 임자의 불행한 앞날을 예고하였다. 바울은 그 후 아가보의 예언대로 체포되어 동족의 집요한 살해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 위기를 전도의 승부수로 삼아 로마 황제에게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여러 해 동안의 재판 과정을 거친 후에 드디어 로마로 호송되는 중에 일어난 사건이 사도행전 27장에 나온다. 지중해를 여러 차례 전도 차 왕래하면서 물 사정에 익숙한 바울의 권고를 물리치고 지중해 겨울 바다 항해를 고집하는 알렉산드리아 배 선장의 주장 때문에 276명모두가 덤으로 사경을 해매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 유라굴로 광풍 속 항해--인간의 삶
인간의 삶은 行船과도 같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배를 타고 가는 모습들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돈을 벌고자, 교역을 하고자 배를 운행하는 사람, 로마 관광 여행자, 더 큰 기회를 엿보고자, 또 다른 자기만의 기회를 잡고자 배를 탄 자, 공무로 여행하는 자, 바울처럼 죄수로 호송되어 재판 받고자 가는 자 등 여러 인간들이 같은 배에 승선하여 가고 있다. 자기들의 목적은 여러 가지이지만 운명은 같았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기 때문이다. 유라굴로(Eurclydon)란 말은 동풍을 뜻하는 희랍어 유로스(euros)와 북풍을 뜻하는 라틴어 아퀼로(aquilo)의 합성어다. 유라굴로는 겨울철에 지중해에 부는 북동풍이다. 강력한 동풍과 북풍이 한꺼번에 몰아 닥쳐오는 때에 배가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표류하다가 암초에 부딪혀 파손되기 마련이다. 삶의 바다에 몰려오는 유라굴로, 그 가운데서 생과 사의 소용돌이에 던져진 속수무책—이것이 인생길이다. 276명이 승선하리만큼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당대 조선술의 발달을 읽어낼 수 있지만, 유라굴로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인생도처에 유라굴로가 엄습하여오고 있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유로굴로 변수가 나타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현대문명은 어떠한 안전장치를 다 동원하여 이에 대처하고자 하지만 결정적으로 취약성을 안고 있다. 모든 인간이 송두리째 볼모로 잡혀 덤으로 죽을 수 있는 죽음의 문명구조다. 네트워크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느 지역에서 한 가닥 선만 단절되어도 우리 모두는 유라굴로에 내동댕이처진 알렉산드리아 배의 신세가 되고 만다. 인간은 유라굴로 위협 아래 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날라 온 하나의 비보가 우리의 장미 빛 미래를 산산조각 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2. 전문가 집단의 오판--백부장/선장/선주
지금 바울은 율리오라는 로마제국의 엘리트 관료(백부장)의 호송을 받고 있었다. 바울은 백부장에게 겨울 항해의 심각한 위험성을 알렸다. 그러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행 27:11). 백부장은 선장을 지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장과 선주의 결정을 믿어 주었다. 바다 여행에 있어서는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전문 지식도 나침판이 없는데다가 항해를 해와 달과 별들의 천체관측에 의존하는 취약성을 안고 있었는데, 취약성을 안고 있는 소위 전문가들의 말에 생명을 맡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진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 된 것이다.
또한 미항이라는 항구가 월동하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저들의 판단은 수많은 선객들의 유익에도 부합하였다. 이른바 다수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인간은 당장 눈앞에 불편을 감수하기를 원치 않는다. 조금 더 안락한 곳이 있다는 정보에 귀가 솔깃해진다. 경험과 상식 그리고 대중의 유익에 부합한다는 논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이 다수의 소리는 소수의 정확한 판단과 소리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안락을 찾아 베닉스 행 여정에 올랐고 더구나 남풍이 순하게 불어주어 의기양양한 행선이 된 듯하였다. 바울 일행 3명(27:1-2, 바울, 아리스다고, 누가)을 빼고는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한 것이다. 다수의 결정은 항상 기쁨과 평화, 그리고 안전을 보장해 주는가?
그러나 얼마 못되어 그들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다. 당시 276명과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던 배라면 상당히 큰 배였을 것이다. 이 큰배가 광풍에 밀려 이리 저리 떠내려 가 생사의 기로에 놓인 상황에서 화물과 항해 기구까지 바다에 버릴 정도로 구원의 여망이 없었다(27:20). 배 멀미가 너무 심하여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고통 가운데 표류하기를 14일 동안이나 하였다. 만신창이가 된 배와 이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체념 중에 물고기의 밥이 되는 순간만을 바라보게 되는 절망뿐이었다. 타이타닉 호의 선장은 빙산 출현 경고를 무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을 앞두고 하와이 주재 일본 영사가 하와이 주변의 미국 전함 정보를 본국에 전한 것을 미리 탐지한 FBI가 정부에게 타전한 긴급 보고를 무시하여 수많은 미국 전함들이 격침당하였다.
소수의 초자연적 또는 양심적 판단을 무시한 소위 전문가 집단의 결정에 의하여 한 사회는 도매금으로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전문가 집단이 예측하지 못한 돌풍이 엄습하는 곳이 이 세상이다. 오늘 우리는 소위 전문가 집단의 잘못된 결정으로 온 나라가 고통 가운데 빠저 있다. 유라굴로를 만나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외환위기를 통하여 절실하게 깨달았다. 오늘 이 세상은 전문가 집단이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하기 쉬운 상황이다. 인생의 바다에 이는 유라굴로 광풍에 대처하는 이 땅의 철인들, 학자들, 정책 입안자들의 식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 사회는 여실이 보여주었다. 소위 전문가 집단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고 세상적인 안목과 정욕에 따라 당장의 편익과 실리를 추구하다가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통하여 인간 세계의 리더들의 허약성과 한계성을 여지없이 들추어 내셨다. 성도들이여,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누구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결국 누구를 의지할 것인지가 인생의 항로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Dependance 문제입니다. 예수께서는 광야 시험이나 겟세마네 피땀 흘린 고뇌에서 하나님의 의지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사명완수에 집착하는 삶--바울
바울은 지금 외견상으로는 죄수로 끌려가는 중에 있었다. 그러나 로마로 향하는 길은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인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이 약속과 사명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나간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모함과 술책을 가해오는 세력을 피하기보다는 그 위기를 선교의 기회로 삼아 세계 대제국에 선교하고자한 웅지를 품고 기도하면서 지중해의 풍세뿐만 아니라 시대의 풍세를 살피는 자였다.
그는 위험을 알리고 시대의 징조를 예견한 선구자였다. 위험을 감지하고 기별을 전한 바울은 메신저였다. 9-10절에서 바울은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우리는 자가 없었다. 묵살 당한 의인의 소리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였다.
사람들은 심판의 기별을 듣기 싫어한다. 여행길이 위태롭다는 소리는 집단 안보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가 더 우세한 세상이다. 참된 삶의 길, 생명의 길이 외면당하는 세상이다. 이 무지한 생명을 참아 버리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메신저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탄원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어 보였다. 선교의 비전에 따라 살아가는 바울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자기의 경고 기별을 백안시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해야될 일이 있었다. 저 멀리 있는 로마만을 위하여서뿐만 아니라 당장 같이 하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삶의 길을 구하였다. 바울의 선교에의 갈 길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275명이 살길이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의 약속을 받은 바울은 위로와 보증의 기별을 전하였다.
21-24절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번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삶의 목적이 시시한 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한 바울은 그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갈길은 살길이었다. 사명 완수가 없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비장한 결심이 필요하다. 얼마전 8순 노모가 숨을 거두기 전에는 내가 죽을 수 없다는 60대의 암투병 환자의 효성은 그를 버티어 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노모가 숨을 거두자 그도 이제는 됐다하는 심정으로 돌아가자, 얼마 안 되어 그 아들도 숨을 거두었다는 얼마 전 보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갈길 의식은 생명을 버티는 힘이 되게 한 것이다.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하기에 행선하는 275명까지 다 주었다는 하나님의 기별을 받고 몇번이고 “안심하라”는 기별을 전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다. 말씀에 확고히 서서 삶의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님께서는 왜 바울에게 그 토록 험난한 유라굴라 광풍을 맞도록 하였을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대의 최고 권력자 앞에 나서야 되도록 말슴에 의지하는 믿음을 강화시키시고자 하신 것이다. 살아가는 인간들이 최후적으로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행 27:34)
바울의 이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바라보십시오. 수많은 유라굴로가 아무리 이 세상에 몰아쳐 와도 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염려할 아무 것도 없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확실한 보호와 구원의 기별을 증거한다. 바울이 유라굴로를 이기는 뛰어난 항해술을 갖지 못하였다. 신비한 이적으로도 위기를 극복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겼다. 승리의 원천이고 능력의 원천이 되는 이 믿음을 우리도 가지고 권고하고 안심시키며 나누어주자.
4. 덤으로 살아난 존재--275명
광풍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확실이 바울의 사명완수 때문에 덤으로 살아났다. 한 사람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275명은 덤으로 살아난 것이다. 275명은 바울의 생명의 덤이었다. 1:275의 비율이다. 덤이 275배나 되는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구속의 덤은 엄청안 배율이 된다.
275명은 이 다음에 살아나서 자기들의 사주팔자가 좋아서 살아났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들의 운이 억세게 좋아서 살아났다고 하면 착각이다. 이들의 남은 인생 여정은 확실히 덤으로 얻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심각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후의 삶이 이전과는 뚜렷하게 다른 길을 걷고자 결심한다. 그러나 뱃사공들과 군사들의 그 다음 행동을 보면 덤으로 살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행 27:30).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행 27:42).
구원의 여망이 도무지 없어 보이는 중에 살아 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 은혜를 쉽게 잊고 자기들만 살아남고자 하는 오늘의 얄팍한 세상인심 같은 것을 엿보게 한 말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누구의 은덕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275명은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은덕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은덕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아내의 헌신 속에 오늘의 내 건강이 지탱하고 있는데도 나는 그 것을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나 반성할 때가 많다. 교회의 축복 속에서 오늘 우리는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깨닫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하늘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누군가의 의인의 중보 기도로 오늘의 평안과 축복을 향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누군가의 열심있는 기도와 그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 사회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독자, 유두고는 덤으로 다시 얻은 생명을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하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시 나귀의 고삐를 잡고 환호하는 열정을 보였다. 아담/하와는 범죄 후에 곧 율법대로 죽음의 삯을 지불하지 않고 덤으로 살 수 있는 은혜의 언약을 받았다. 가인도 아벨을 죽이고 곧장 사형 당하지 않고 덤으로 사는 생명을 연장 받았다.
오늘 우리는 예배로의 초청에서 히즈기야의 감사의 기도를 교독하였다.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기 700년전에 유대 왕 히스기야는 죽을 병 종기에 걸렸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그에게 보내 네 집을 정리하라고 하며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최후통첩도 보냈다. 히스기야는 낯을 벽을 향하고 여호와께 통곡하며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아직 성읍 가운데까지도 가지 못한 이사야를 다시 그에게 파송하여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하시면서 그의 병을 낫게 하시었고 3일 만에 성전에 가서 감사의 제단을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15년의 덤으로 더 준다고 하였다(왕하 20:1-11; 사 38:4-6). 기도를 그렇게 하고도 이 엄청난 축복을 믿기 어려워 징조를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해 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나는 놀라운 징표가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 감격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히스기야가 고민하였던 죄의 무거운 짐을 자기 등 뒤로 던지시고 용서하시며 병을 고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감격하여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겠다고 서약하였다. 특히 암 투병을 하는 분은 이 덤을 안겨주시는 하늘의 중보기도를 바울처럼 확실히 믿고 유라굴로 광풍을 이기기 바랍니다.
이사야 38:10-20 내가 말하기를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이 사건은 국제적 뉴스거리로 퍼저 나가 당대의 대제국인 바벨론이 외교 사절을 파송하는 일이 전개되었다. 불행한 것은 히스기야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바벨론 외교사절들에게 잘 증거하지 않고 왕궁의 보물들이나 보여주어 외국 사절단의 침략의 화를 자초하였다는 점이다.
(덤으로 살아가는 삶에 관한 개인적인 간증 -1998년 5월부터 일어난 신병에 관한 고투, 기도 그리고 병원 진료와 기도 응답 간증--나는 히스기야의 감사 기도에 매료되어 남은 삶을 은혜의 덤으로 여기며 살아가기로 하였다.)
원천적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기간의 연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이란 개념에서 은혜를 빼거나 중단시키면 덤으로 사는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덤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오늘 우리의 생명은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은총 아래에서 지탱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AD 2000년이 되도록 지연시키시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소돔성 사람 들처럼 또는 노아 홍수 전 사람들처럼 송두리채 덤으로 멸망당하는 것이 애처로워서, 아니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의 은혜의 덤으로 구하고자 하신 그 구속적인 아가페 사랑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덤을 듬뿍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부모가 어린아이의 조그마한 진보를 보고 춤을 출 듯이 기뻐하며 남은 인생 전부를 아이를 위하여 투자하고자 하듯 우리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뛸 듯이 기뻐하시며 그 사람의 기도와 선행을 기회로 온 교회, 온 도시, 온 나라를 살리고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1+2+3과도 같이 더하기 법으로 살아 갈 때 하나님께서는 1×2×3×4와도 같은 곱하기 법으로 덤을 기하급수적으로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축복의 덤을 받고, 의지하고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사는 것에서만 인생길에 널려 있는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호소: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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