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원리와 유보를 생각하면서
판단의 원리와 유보를 생각하면서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because) 유다 사람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대하 24:24, 개정개역).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 13:4).
적은 무리와 큰 군대 사건 배경
남 유다의 여호람과 북 오므리의 손녀 아달랴 사이에 탄생한 아하시야는 친북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 태생이었다. 그는 예후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방북 중이었다가 북 왕과 함께 도륙당하였다. 예후는 사마리아 가까이에 있는 바알예배의 중심지에서 살고 있던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 신상을 깨뜨려 불사르고 바알의 사당을 훼파하였다(왕하 10:11, 19, 28). 예후가 자기 아들을 죽인 사실을 알고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자기 태후로 집정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다. 아달랴는 자기 어미 이세벨의 잔혹성을 물려받은 듯하였다. 이 대학살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는 모든 다윗의 후손은 요아스라는 영아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는 영아 요아스를 성전 경내에 숨겨 보호, 양육하였다. 여호야다는 자기 조카가 7세 된 때 안식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왕자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다. 요아스는 자기의 생명의 은인 여호야다를 배신하고 그의 직계 후손 사가랴를 여호와의 전안 뜰에서 죽였다. 더구나 왕은 우상숭배 하는 일을 자행, 다메섹 아람 왕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때 아람 군대가 적은 수에 불과하였지만 요아스의 큰 군대가 패배당한 것이다. 이는 열조의 섬겨 온 하나님을 요아스가 버린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큰 군대를 적은 군대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문에는 NKJV, NIV 등 번역에 명확하게 나오는 키 워드 “왜냐하면(because, yKi)”이 직설적으로 나와 있지 않아 한참 생각해보아야 짐작할 수 있는 어투로 번역되어 있다. 개정개역판 번역에서 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적은 무리가 큰 군대를 물리친 사건에는 그 이유가 되는 단어에 중심 메시지가 들어 있다.
세상은 다수라는 것이 판을 치고 있지만, 그 다수가 반드시 최후적 승리를 거머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더구나 진리는 다수결과 상관없다. 진리는 다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는 소수가 다수의 횡포를 거부하고 진리에 서는 사건들이 갈피갈피에 이어지고 있다.
의가 승리하고 악이 패배하는 원리
의로운 자는 승리하고 악한 자는 패배한다는 원리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보편적 천하공도에 속한다. 신명기법전이나 시편1편이 이를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 쓰라린 패배가 뒤 따른 사례들이 이 원리를 증거하고 있다. 이런 논리적 추론에 따른다면 선한 백성들에게 좋은 일이, 사악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들이 야기된다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 당연하다. 유다가 신실하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수로부터 구출하셨지만 (20:2, 12), 본문의 사건에서 보여주고 있는 점은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 나라가 많은 군대를 동원, 방어하였다 할지라도 침입해 온 적군의 적은 군대에게 패배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추론의 토대로부터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죄악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또한 동시에 다른 어떤 사람이 매우 착하게 살고 있으면 그 사람을 두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덕망 배후에는 바리새적인 가식이 얼마든지 숨겨질 수 있다. 따라서 의로운 자는 승리하고 악한 자는 패배한다는 원리에 토대를 둔 추론은 너무 단순한 논리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오히려 죄 많은 세상에서는 이른바 신명기 28장의 원리를 모두에게 적용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의인에게는 관이 따르고 악인이 형통한다. 욥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샬롬의 축복인 평화-번영의 삶이 넘친다고 해서 그것을 토대로 하여 내리는 속단을 피하여야 한다.
삶의 고양과 침체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세 가지 가능성
세 가지 시각의 가능성이 있다. 두 사이에 동시적 우연성이냐, 피차 상관성을 지녔느냐, 아니면 원인-결과 관계성을 지녔느냐는 시각들이 곧 그것이다.
첫째는 재난, 질병 및 죽음이 당사자의 도덕성 사이에는 아무런 연계성이 없다는 시각이다. 불행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죄를 범하면서 죽거나 그 결과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연계성이 없이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한 아이가 저녁참에 집에 돌아가는 길목에서 박대기로 전신주를 쳤다고 하자. 그런데 그와 동시에 그가 살고 있는 마을 전체에 전기가 끊겨 암흑천지가 되어버렸다. 전기가 나간 것이 그 소년이 전신주를 쳤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연히 동시적으로 발생한 사건일까?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둘째로는 재난, 질병 및 사망과 인간의 도덕성 사이에는 상관관계성이 있다는 시각이다. 물론 이 상관관계는 원인과 결과로 단정하기에는 훨씬 미약하지만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 여성이 파란 눈과 금발의 머리카락을 동시적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란 눈이 금발을 일으키는 원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상관관계가 없는 병렬적 현상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셋째로는 인간의 나쁜 도덕성이 재난, 질병 및 죽음을 야기케 한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원인 결과를 증명하기는 아주 어렵다. 그 불변적 논증을 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과학적 조사 연구에서 조차도 그 원인 결과를 얼마든지 조작하여 연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데이터나 지식으로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또한 사태의 원인 결과 관계가 성립되지만 수많은 다른 요인들이 개입될 수도 있어서 덮어놓고 원인-결과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윤리와 종교 영역에서는 사실관계에 관한 시비선악에 관한 지식을 다루지 않고 있다. 윤리와 종교 영역에서는 판단의 원리나 신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판단의 원리나 신조체계는 재난, 질병, 및 죽음을 곧장 도덕성에 연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그 바른 연계성 이해를 위하여 예언적 권위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아스 왕의 큰 군대가 패배한 사건에서처럼 예언적 시각이 그 연계성을 확인하고 있다면 그 판단에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희생자에 관한 판단을 하지 말고 유보 중단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수없이 많은 증거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죄 없는 자들이 강제 동원 되어 죽거나, 악으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 13:4).
총독 빌라도는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자주 일어날 때마다 이를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한 번은 그의 군대들이 성전 뜰 안까지 침입해 들어가 거기서 제물로 드릴 짐승을 잡고 있던 갈릴리인 순례자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살육 당한 자들이 자기들 죄 때문에 받은 천벌로 생각했다.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살해당한 사람들 보다 훨씬 선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예수께서 정죄하시는 말씀을 하시기를 기대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어떤 재해나 사고로 인하여 덤으로 죽은 사람들을 놓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의견을 들을 때까지 저희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주께서는 다른 사람의 품성을 평가하는 일과 사람의 좁은 판단력으로 다른 사람의 처벌을 헤아리는 일에 대하여 날카로운 교훈을 주신 일이 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비난하기를 기대했다. 예수의 대답은 저희를 몹시 놀라게 했다.”(COL 213).
“주께서는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이 깜짝 놀랄 재난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저희 죄를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다. 보응의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으며 머지않아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를 찾지 아니한 모든 사람을 덮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예언적 안목으로 예루살렘이 적군들에게 포위되는 것을 보셨다. 그는 이 택하신 성을 향하여 진군하는 이방 군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그 포위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셨다. 유대인 중의 많은 사람은 그 갈릴리 사람들처럼 성전 뜰 안에서 바로 제물을 드리다가 죽임을 당했다. 개인들에게 내린 재앙은 또한 죄가 많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되는 것이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잠시 동안 은혜의 시기가 연장되었으므로 아직 저희에게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COL 214).
사건은 우연히도 일어날 수 있고, 미약한 상관관계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상당한 원인-결과라는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의 소금을 쳐서 풀어가는 시각도 있다. 정죄의 판단을 유보하고 은혜의 개입으로 풀어가는 공동체가 마음 붙일만한 사회가 된다. 시간에 은혜라는 소금을 더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기다림은 회개케 하는 은총의 개입의 시간대이다.
인간은 날마다 회개하며 살아가야 하는 죄인들이다. 누가 더 의롭고 더 착한가 하는 비교는 마치 도토리 키를 재자고 하는 것과 같다. 남은 백성은 그 회개가 더 깊어가고 넓어가 자기의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며 살아가는 백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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