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단상
안식일 단상
1980년대 초 안식일 시간이 다 지나고 난 후 한 참 지난 다음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예루살렘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시내버스 행렬을 참으로 인상적이었었다. 안식일에 공항도 멈추고 시내버스도 멈추게 하는 제도적 장치 위에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정신적, 영적 힘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하는 강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1990년대 여름 대학원생들 및 몇 분의 장로님들과 함께 투어버스를 함께 타고 여행의 마지막 길인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의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투어 버스 안에서 당시 히브리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 중인 한국인 기자출신 투어 가이드가 전해 준 이야기 한토막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는 당시 정통파 유태인들과 이웃하면서 살고 있엇다고 한다. 안식일이 시작되었는데도 전기 스윗찌를 올리거나 내리지 못하는 유태인들을 여러 번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자기 방에 켜진 에어컨을 꺼 달라 청하기도 해서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였다. 토요일, 즉 자기들의 안식일에 불을 켜거나 끄는 일, 에어콘 작동이라는 노동을 하지 않기 위하여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이야기에 우리 모두는 웃었지만, 이 이야기가 남긴 여운은 길었다. 또 어느 유월절 직전 제일 높은 라비가 자기를 찾아 만났더니, 이스라엘 내의 모든 빵 가게의 빵들을 모두 사라는 요청을 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황당하기까지 한 이 제의에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고 거절하자, 굳이 계속 매입 요청을 하면서,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 유학생은 세겔 얼마를 가졌다고 하니, 그것이라도 내 놓으라고 해서 내 놓고, 이스라엘 나라 모든 빵을 모두 자기 이름으로 매입하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인 투어 가이드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지불한 것이고, 어린애 작란 같은 황당한 계약이어서 잊고 지냈다. 무교절 기간이 끝난 후 유대교 최고 지도자가 자기를 찾느라고 백방으로 애를 섰다고 한다. 유학생이 유대교 지도자를 만났더니 일주일 전에 지불한 세겔을 내 놓고, 계약을 해지하겠다며 빵 소유권을 내 놓으라고 해서 내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여행 중 보고 들은 이야기를 두고 유대인들의 안식일 성수란 단지 하나의 율법주의의 소산물에 불과하다고 치부하여야 할 것인가? 성스러운 시간을 보존하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안식일이라는 제도 속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고품격 인간을 빚어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갈파했듯이 ‘시간은 실존의 핵심이다.“ 그리고 거룩한 ”시간은 변장된 영원이다.“ ”안식일은 영혼을 황홀하게 하는 복을 타고났다.“ 안식일은 낙원을 미리 맛보는 날이다.
선(善)이란 성(聖)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선이 산기슭이라면 성은 산마루이다.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들은 선하였지만 (보시기에 좋았더라. -God saw...it was good), 거룩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일곱째 날 뿐이다.
구약에 나오는 안식일의 규정을 이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해가 안 되리만큼, 아니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만큼 중차대하게 여기고 있다. 안식일에 쉬고 노동을 금하는 국법규정은 생사가 달린 문제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 31:14-15에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세 번씩이나 사형으로 다스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법 규정은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살인, 간음, 우상숭배 등과 마찬가지의 수준의 중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하는 문제가 중죄에 해당하는 이유는 그 범법행위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대적하기 때문이다. 즉, 안식일이 하나님이 정하진 천연질서에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제도는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에 세워진 제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과정에서 죄와 상관없이 주신 천지 창조의 기념일이 된다. 범죄 전에 세워진 제도는 안식일과 결혼제도이다. 결혼제도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세워진 제도인 것과 마찬가지로 안식일도 하나님의 창조권능에 토대를 두고 세워진 것이다. 인간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그 존엄성이 부여된 것처럼, 안식일도 하나님이 6일 창조를 마치고 7일째 안식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하여 국법 체계에서 중죄로 처벌하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 비 신정국가 체제인 우리 형법이라는 국법체계에는 고대 안식일 성수 규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왜 안 죽이느냐고 비웃듯이 힐난하는 분에게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 도덕법이면서서도 창조법에 속하는 안식일 성수 여부는 하나님이 처리하실 영역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주제가 십계명 자체 안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출 20:2; 신 5:6)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난미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5).
소유를 추구하고자 억압과 속박을 일삼고 있는 세상에서 신음하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 그리고 성화를 지향케 하는 존재로 이끄는 제도가 안식일 제도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게 하는 제도가 안식일이다. 고대 유대인들이 이 점에서 실패하고 외형적 준수를 복잡다단하리만큼 자세하게 규범화시켰지만, 인간이 만든 제도와 규정들은 인간을 압살시키는 역기능의 우상으로 둔갑시켰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서 안식일의 7대 이적 사건들을 통하여 안식일의 참 정신을 살려내어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속죄를 마치시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무덤 속에서 쉬셨다. 안식일은 선악 사이의 투쟁에서 선으로 승리하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구원 받은 재창조의 질서를 기억케 하면서 이 안식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사업의 완성을 미래적으로 이루실 것을 표상하는 의미까지 담아내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하루에도, 순간에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주님께서 7일을 주기로 삼으신 이유는 인간의 영적 건강과 육체의 활력을 위함에 있다. 하나님은 피곤하거나 곤비하여 안식일에 쉬신 것이 아니다. 안식의 필요성은 무엇보다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질서를 기억하며 이마에 땀이 나도록 힘써 일하는 6일의 노동으로부터 하루의 거룩한 휴식을 통하여 우리의 신체적 건강을 지켜 나가도록 처방하신 것이다. 하루를 쉬는 것은 미래에 있을 오는 안식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다. 땅에서 안식하는 자가 미래의 하늘 안식에도 들어간다.
안식일이 주일이다. 주님이 이 날의 주인이시다. 안식일은 우리 마음대로 사용하는 날이 아니다. 안식일은 시간 속에 주신 지성소이다. 지성소는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공간이므로, 우리는 이 날을 하늘의 보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고 경건하게 만드는 안식일은 영혼의 이상(理想)이며 삶으로 번역된 신앙이다. 안식일의 넘치는 거룩함이 평일에도 흘러넘쳐나서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삶을 이어가고, 죄악으로부터 참된 자유와 해방(구속)의 은혜를 받아 영육 간에 건강하고 경건한 재림성도들의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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