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복(地雷復) 음미
지뢰복(地雷復) 음미
- 하늘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길이 열린다 -
주역(周易)은 이학(理學) 즉 형이상학에 속한다. 역학(易學)을 의리(義理)의 주역, 즉 도학(道學)으로 보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주역을 신비하고 어려운 내용이라는 신화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나, 점치는 책 정도의 미신서로 경멸하는 접근방식을 기피하여야 한다. 주역은 인생문제를 64 괘(卦)로 망라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들 괘는 상호간 친화와 협력이라는 관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는 제칠일을 설명한 괘도 나온다.
주역의 64괘 중 제칠일을 비치고 있는 괘가 제24괘이다. 그것을 지뢰복(地雷復)이라고 한다. 지뢰복 구조에서 위는 곤(坤) 괘이고, 아래에는 뇌(雷) 괘이다. 위에는 땅이고 아래에는 우레가 있는 형국이다. 땅 밑 깊은 곳에서 우레 같은 큰 힘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위 괘 그림에서 보 듯 육효(六爻) 중 위의 5개는 전부 음(陰)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맨 밑바닥에 한 가닥만이 양(陽)으로 되어 있다.
이 지뢰복 괘 형상은 천지가 온통 칠흑 같은 절망스런 밤이라 할지라도 아궁이에서는 장작을 밀어 넣고 불을 붙이기 위해서 부싯돌로 불을 채취하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미세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으면서 그 전체 효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지뢰복 괘이다. 지뢰복 괘는 양이 땅 밑에서 생겨 땅속에서 우레가 울리는 상이다.
일반적으로 이 지뢰복 괘를 1년 24절기 중 동지를 상징하는 괘로 보고 있다. 즉, 계절의 변곡점이 되는 괘이다. 그러나 지뢰복 설명에 나오는 反復其道 七日來復 天行也이 보여 주듯이 이는 반복되는 7일 주기의 도가 천도의 순환법인 것을 말하고 있어 반드시 동지에 국한 시켜서는 안 된다. 지뢰복은 복(復)이 말하고 있듯이 회복이 천행과 인생의 근간 원리로 자리 잡고 있어 그 끊임없는 주기적 연속성과 불변성을 말하고 있다.
지뢰복을 신학적으로 부활의 괘로 보는 분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제1일이나 제8일, 즉, 일요일이 되어 맞지 않는다. 7일 주기의 순환 왕복 원리를 나타내고 있는 지뢰복은 지나간 6일 동안에 죄로 얼룩져 소진된 에너지를 다시 회복, 축적시키는 한 가닥 밑바탕에 깔려 있는 천지를 삼킬 수 있는 지뢰 같은 힘을 지닌 창조주의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생성 화육하는 천지의 원리와 구속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 말한 대로 한 주일의 6일이 제칠일 안식일을 지향하는 원리와 비슷한 것이 지뢰복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지뢰복은 정도에서 벗어난 궤도 이탈의 삶을 정리하고 새 출발을 하게 하는 희망을 주는 불빛이 있다. 그것은 절망이라는 수렁 밑바닥에서 회복시키고자 꿈틀거리는 은혜의 힘이 지뢰에 빗대어 지고 있다. 인간은 이런 지뢰 같은 은혜가 꿈틀거리는 제칠일에 성스러움의 안식이라는 축복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제칠일에 이 축복의 문 안에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 천지 운행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는 변곡점이 되어 새롭게 시작할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제칠일에는 하늘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길이 열린다.
주역의 제 24괘인 지뢰복를 가지고 운수 대통으로 풀이하는 문제점들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또한 창세기 2:1-3에 함의되어 있는 1주 7일 제도와 제칠일 사상의 원초형태 흔적이 담겨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반계시 속에 담긴 특별계시의 편린 같은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이 지뢰복이 혼돈과 공허한 세상에 창조의 빛이 있으라는 창세기 서두의 사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음은 혼돈이고 공허이며 악이다. 양은 선이고 인간 내면의 모습을 본래의 형상으로 회복하는 거룩한 빛이다. 광명한 빛이라는 양의 기운이 아직 미미하게 여길 수도 있으나 그것은 혼돈과 공허를 가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인간 마음에 비춘다(고후 4:6)는 바울의 이해가 지뢰복 괘에 어울린다.
루돌프 오토는 인간이 윤리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과의 만남이 분명히 있다고 하였다. 그는 그것을 ‘누미노제(Numinose)’라고 불렀다. 모세는 바로 이 누미노제를 체험하였다. 그것은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출 3:5)는 음성을 발한 경탄의 대상을 만나는 황홀한 체험이었다. 이 체험이 이른바 거룩함(das Heilige)의 체험이다.
누미노제를 체험한 모세는 절망스런 현실의 어둠과 압제에 익숙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강한 고집을 설득하여 창조의 기념일 빛줄기를 찾아 나서자고 하였다. 까맣게 잊어버린 성스러운 축복의 날, 신인 연합의 날, 즉 안식할 날이라는 한 가닥 희망의 양효를 구현하기로 한 사건이 이집트 탈출의 물꼬를 트게 하였다. 잊어버린 안식( katapausis)할 때를 찾아 나선 것이 성경역사의 변곡점 역할을 한 것이다. 모세는 거룩하신 분의 명을 받고 하늘 성소를 본 떠 축소형 모델 지상 성소를 짓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거소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매 제칠일이라는 시간의 지성소에서 성스러운 경험인 이 누미노제를 체험하도록 하였다.
본래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가나안 안식으로 인도하길 원하였지만, 백성들의 반역으로 출애굽 광야 세대는 가나안 안식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히 3:18). 여호수아는 다음 세대를 가나안으로 인도했지만 그들의 불신으로 영적 안식 누미노제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준비가 안 된 이스라엘은 성스러움의 안식에 진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에게 안식(sabbatismos 안식일의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히 4:9)고 하셨다. 이어지는 세대들이 실패했음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저 안식으로 들어”가라는(히 4:11, 16) 저자의 간절한 호소의 초청이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므로…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11절). sabbatismos와 katapausis는 동의어로 보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두 가지 기본적인 존재양식을 설명하면서 안식일을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틀로 보았다. 소유적 삶의 방식은 권력의 종, 죄의 종, 물질의 노예, 탐욕의 종으로 전락된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역시 그에 못지않은 또 다른 것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청산하고 용서와 치유를 받고 아가페 사랑의 성스러움에 참여하므로 원래의 존재방식으로 회복되는 존재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이루어질 때가 바로 안식할 때인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의 구원의 안식의 세계를 지향하는 재림신도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주역에는 이런 메시야의 구원의 안식과 성스러움이 나오지 않지만 행간에 넣어서 미래 영원한 안식 포구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진뢰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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