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 임레 (Nagy Imre)

역사 : 2018. 5. 20. 18:15

나지 임레 (헝가리어Nagy Imre, 1896~1958)

훈족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종횡무진 활동 역역을 펼쳐간 역동적인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이들 한 무리가 세운 나라가 헝가리(Hungary)이다. 헝가리 이름의 뜻은 5세기 Attila 통치한 훈족의 땅(영토)(land of the Huns)," ”훈족의 나라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아틸라의 백성들을 마자르족(Magyars)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우리와 같이 성 다음에 이름을 쓰고, //일 순서로 표기한다고 한다.

2차 대전 중 독일편에 가담했던 헝가리는 전쟁이 끝나자 소련의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1949‘M. 라코시’(Matyas Rakosi, 1892~1971)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나지 임레는 라코시가 인솔하는 헝가리 근로자당 간부로서 농림수산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9536월에는 라코시의 후임으로서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스탈린의 사후, 느슨해지기 시작한 헝가리의 공산주의에 대해 헝가리 민중은 저임금 문제나 식량난에 허덕이는 조직적인 파업을 결행하였다. 또 그는 부다페스트 중공업, 경공업 지대에서도 파업이 잇따랐는데, 이러한 자국의 위기 상황을 중요하게 보고 정책 노선을 새롭게 바꾸었다. 우선은 곤궁한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방법으로 공산주의 상징의 하나이기도 한 농업 집단화 제도를 폐지했고, 그 밖에 종교적 관용과 강제 수용소 폐지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나지 임레의 이 같은 서방 시장경제 진영적인 방식은 곧바로 스탈린주의자들과의 대립을 불렀다. 그 결과, 19554월에 실각에 몰렸고 같은 해 11, 근로자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53년에 스탈린 사망이후 1956년 열린 소련 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일기시작하자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던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반()스탈린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폴란드에서 반소 항거운동이 발생, 폴란드 정부가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 스탈린주의자에 의해 추방된 고물카가 당 제 1서기에 취임하였다.

이런 반 스탈린주의 여파는 헝가리에 미쳤다. 그러나 헝가리 사정은 달랐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지도부 내부에 강력한 지반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만 민주화를 하는 척하여 지식인과 일반 국민 대중의 자유화 요구를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조성하였다. 1956년 사회주의 정권을 이끌어 가던 라코시는 작은 스탈린이라고 불릴 정도로 반개혁적 성향의 사회주의 정권 체제이었다. 이 라코시의 친소정책에 항거하는 민중의 항쟁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헝가리 정부는 소련정부에 시위대를 진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부다페스트 진격 명령을 받은 헝가리 주둔 소련군은 곳 시내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에 들어갔지만, 시민들은 각지에서 자발적인 저항조직을 결성하여 소련군의 전차에 화염병을 던졌고, 노동자들은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하며, 일부 헝가리군 병력도 시위대 편에 서서 항쟁한다. 1023, 부다페스트 바므 광장에 모인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은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거, 헝가리 주재 소련군의 철수, 표현과 사상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등 16개 항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렸다. 시위대는 시내에 서있던 스탈린의 동상을 파괴하는 등 그동안 억압적인 체제에 억눌려 왔던 불만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게뢰수상과 각료들은 모스크바로 망명하였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시위대의 지지를 받는 개혁적 성향의 사회주의자 나지 임레를 정권에 복귀시키자는 국민들의 의견이 높아지면서 1956년 당에 복귀하였고, 같은 해 헝가리 이어 다시 수상이 되었다. 그가 수상에 취임하고, 일주일간의 시가전에서 곳곳에 고립되어 있던 소련군은 1030일을 기해 부다페스트에서 철수하였다.

나지 임레는 부다페스트의 지식인, 학생, 노동자들은 철저한 비스탈린주의 화를 요구를 수용, 일당 독재 체제의 해체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의 탈퇴 선언, 그리고 헝가리 중립화 정책의 표명 등 차례차례로 민주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56114일 소련은 나지 임레의 일련의 정책을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이탈과 공산주의를 배반한 반당 분자로 몰아 17개 사단 약 15만 명의 군대를 보내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 헝가리 혁명을 무참하게 무력 진압하였다. 서방을 향해 헝가리를 구원해 줄 것을 애타게 호소하던 자유 코슈트 라디오도 침묵시켰다. 주요 관공서들도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나지 수상과 각료들은 헝가리 주재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몸을 피하였다. 이 때 13일 동안 소련군의 인명피해는 사망 772, 부상 1,251명이었고 헝가리인 들의 인명피해는 사망 25, 부상 1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에 국외 망명도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흐루시초프 정권이 폴란드의 정변은 인정하면서도 헝가리 혁명을 가차 없이 탄압한 이유는 사회주의가 쟁취한 것을 지키겠다는 것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이 때 나지 임레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대피하였다. 그 후에 신변 안전을 보장 받고 대사관을 나왔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나지는 루마니아로 신병이 옮겨져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의한 비밀 재판에서 1958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은 부다페스트 교외의 시립 묘지에 매장되었다. 나지 임레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 영향에 의한 헝가리 민주화 운동 이후였다.

1989, 나지 임레 시체의 재매장식이 치러져 당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머르티르시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프랑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그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헝가리의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소련군 침략의 위기에 몰렸을 때 서방으로부터 도움을 기다리는 그의 동상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지 수상은 소련 대사를 불러 헝가리 영토에서 모든 소련군대를 철수 시킬 것을 요구하지만, 같은 시각 소련군을 주축으로 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동맹국들의 군대가 헝가리 국경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중립국 오스트리아와 약간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곤 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남으로 유고슬라비아 동으로 루마니아와 접해 있는 헝가리 정부는 서방세계를 향해 필사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소련의 무력 개입이 훨씬 더 빨랐다.

헝가리정부는 국립박물관에 나지 임레의 특별전시실을 마련,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56년의 비극과 헝가리의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 나지 임레 특별전시실을 지나면 곧바로 나타나는 전시실이 헝가리 서기 1000년 건국영웅 성 스티븐 왕의 왕관전시실이다. 스티븐왕은 헝가리에 첫 왕국을 건설, 외침을 물리치며 국가를 세우고 기독교를 받아 들였었다. 이처럼 헝가리 최초의 영웅과 최근의 영웅을 기리는 전시실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헝가리의 탈 공산주의 잔재 의지를 엿보게 한다.

예전의 거칠 것 없이 동서남북을 내달리며 제국들을 무너뜨린 그 기세가 헝가리 국민 대중의 항소운동과 나지 임례에게도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은 1856년 소련군 침입 당시 상황을 엿보게 하는 시 한 토막이다.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서방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나지 임레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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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