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도시 카타콤베(Catacombe)
죽은 자들의 도시 카타콤베(Catacombe)
고대 로마의 카타콤베 (Catacombe di Roma)은 로마 내 혹은 근처의 지하 매장 장소였다.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부터 존재하여 왔다. 로마 제국이 황제 같은 특별한 사람 이외에는 사자의 매장을 로마 도시 내에서 법으로 금했고 로마 교외에서 화장하거나 매장했으나 과밀과 땅의 부족으로 매장지 한계가 있어서 자연 동굴 같은 곳을 지하 묘지로 삼아 매장했다. 자연 동굴도 한정이 되어 지하 터널을 만들어 무덤을 만들었다. 특히 카타콤베는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한 경우 그들을 안장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교 박해시대 (2~4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신봉하기 때문에 시신을 훼손치 않고, 어두운 동굴에 안치하는 일을 선호했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 세바스티안 카타콤베, 도미틸라 카타콤베가 유명하나 그 밖에도 많다. 어떤 것들은 수 킬로미터의 길이로 이어지며 깊이가 5층이 넘는 경우도 있다. 총 길이는 900km나 된다고 한다. 따로 분리된 카타콤도 있고, 서로 이어진 것들도 있다. 로마의 연질화산응회암(tuff) (volcanic rock) 바위를 뚫어 터널을 만들었다. 이 화산응회암이 처음 공기에 노출될 때 연화되고 후에 경화되어 무너지지 않는 항구성을 지닌 장점 때문에 그 활용도가 높았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가장 보존이 잘된 지하 무덤이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몇 교황이 묻혔기 때문이 아니라, 성녀 체칠리아 때문이다.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2세기 말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했다. 박해자들은 뜨거운 수증기로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의연히 찬송하였다. 결국 그녀는 목이 잘려 죽었는데 목과 몸이 분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무덤은 9세기까지 이 곳에 있다가 그녀를 기념하는 성당으로 옮겨졌다. 1599년에 그녀의 무덤이 개봉되었을 때 놀랍게도 시신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조각가 스테파노 마데르노가 그 녀의 신신 모습을 대리석으로 조각해 두었다. 현재 칼리스토 카타콤베에 있는 조각은 복제품이고 원작은 체칠리아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한국어 각 시대의 대쟁투 1997년 번역판 42쪽은 동 조각품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또한 카타콤베는 박해기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은신 장소로 사용되었다. 2018년 재림교회 국제 로마 성경연구회가 배포한 투어가이드북은 박해시대 피난처로 사용되었다는 인식은 바르지 않다고 하였지만, 이는 사실과 어긋난 판단이다.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는 ‘죽은 자의 도시’라는 뜻이다. 카타콤이 바로 죽은 자들의 도시가 된다. 그러나 산 자들이 피난 간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엉켜 지냈던 곳이다. 산 자들은 거기에서 예배처를 마련하여 예배 드렸다. 약 10평 정도의 작은 넓이의 땅에서 400명이 찬송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나 피난 생활이 길어져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나올 때에는 거의 장님이 되어 나올 정도였다는 보고도 있다. 시신 부패 악취를 참고 지내야 하는 곳이었다. 전염병이 돌면 삼분의 일이 죽었다는 보고도 있다. 카타콤에서 나왔다가도 부패한 세상과 그리스도교 일부의 모습에 후회한 신도들이 다시 들어가 생활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다.
<각 시대 대쟁투>는 “카타콤”(塋窟)에 피난한 성도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묘사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어디로 피난하든지 맹수처럼 추적당했다. 그들은 불가불 황량하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 은신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히 11:37, 38)다. “카타콤”(Catacombs) 은 무수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로마 성 밖에 있는 언덕들 밑에 흙과 바위를 뚫고 만든 긴 굴들이 있었다. 그물 모양으로 이리저리 뚫린 굴은 성 밖 멀리 수 십리의 지점에까지 뻗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하의 피난처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체를 묻었다. 또한 그들이 의심을 받고 그들에게서 법률의 보호가 제거되었을 때 여기서 살았다. 생명의 시여자께서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들을 깨우실 때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 음산한 굴속에서 나올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깨끗이 보전하였다. 그들은 온갖 편리한 것들을 다 빼앗기고 햇빛조차 볼 수 없는 어두운 땅 속에서, 그러나 부드러운 땅의 품속에서 지내는 동안, 한마디의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과 인내와 희망이 가득한 말로 서로 격려하며 궁핍과 괴로움을 견디었다. 온갖 세상적인 축복들을 잃어버리는 것도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도록 만들 수 없었다. 시련과 박해는 그들을 그들이 받을 안식과 상급을 향하여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발걸음에 지나지 않았다.”(쟁투, 40-41).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곳에 지하 예배당을 만든 이유는 로마법상 어떤 경우라도 묘지는 신성불가침의 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로마군이라도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로 황제 박해 시절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을 피난처와 예배 장소로 사용했다. 예배 장소로 사용된 공간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카타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미로처럼 어둔 터널들이 이어져 있는 상황에서 당국의 정보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안내한 투어 가이드는 로마 병사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코자 진입했지만, 칠흑처럼 어둡고 거미줄처럼 얽힌 미로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맨 경우가 허다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오히려 살려 내 보내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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