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과 크리스천

역사 : 2018. 7. 18. 20:54

콜로세움과 크리스천

 

콜로세움 (Colosseum, 이탈리어로 Colosseo)는 고대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이다. 관객 5만 명~7만명 수용 가능한 4층 구조로 되어 있다. 아래층은 로열 석, 2층은 기사 계급, 3층은 일반 서민, 4층은 천민 계층 용도로 나뉘어 있었다. 콜로세오는 높이 57m, 둘레 527m의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원기둥 80개의 아치)의 집합체로 타원형 돔 형태다.

72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축 계획 및 착공했지만, 그 아들 티투스(Titus) 황제 때 이르러 80년에 건축이 끝나 개막식을 올렸다고 한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정복 시 포로 10만 명을 이 사업에 투입시켰다고 하니 유대인들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이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완공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초대형 건축 자금 출처는 대부분 아들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보물들로 충당했다고도 한다. 따라서 콜로세움은 예루살렘 파멸의 변환 증거물이기도 하다.

이 원형 경기장(또는 극장)은 경기장, 극장 등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경기장은 로마인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검투사와 맹수는 지하 12m에서부터 수동 엘리베이터로 끌어 올렸다. 검투사끼리의 대결, 검투사와 야생동물과의 대결로 경기장 바닥은 항상 피로 물들여 있었다. 검투사들이 이 경기장에 등장할 때 황제 폐하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곧 죽게 되는 저희 검투사들이 황제께 인사드립니다(Ave, imperator, morituri, te salutant.)"라는 인사를 올렸다.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체력이 출중하고 용맹한 자들을 검투사로 싸우게 했다. 검투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이 있었지만, 일단 검투사가 되면 다른 노예들보다 특별 대접을 받았다.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게 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나는 기둥과 벽들이 미로처럼 이어진 지하를 거닐면서 피로 얼룩진 잔혹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을 체감하였다. 처음 개장 당시 희생당한 5000여 마리의 야생 동물들의 피를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검투사와 노예, 이민족,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피가 '콜로세움'에서 흘려 내렸다.

재림교회 로마사경회에서 배포한 콜로세움 소개 자료(Tour Book)는 그리스도인 순교지로서의 콜로세움을 생략하고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엘렌 화잇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처형 이유와 장소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바울이 순교당한 당시의 네로 황제 때부터 시작된 박해는 그 정도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마는, 그 후 몇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무서운 죄목으로 거짓 고소를 받았고 기근, 질병, 지진 등의 재난도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원망을 들었다. 그들이 일반 사회의 미움과 의심의 대상이 되자 밀고자들은 이()를 얻기 위하여 무죄한 사람들을 무고(誣告)하였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반역자, 종교의 적, 사회에 해를 끼치는 자로 정죄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형극장에서 짐승의 밥이 되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거나 짐승의 가죽을 씌워서 투기장(鬪技場)에 던져짐으로 개에게 찢겨 죽은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처형은 축제 때 자주 오락거리로 삼아졌다.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와서 그 광경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고, 그들의 죽음의 고통을 보고 크게 웃고 손뼉치며 기뻐하였다.” (GC 40).

 

콜로세움이 종교적 성소로 여겨지게 된 것은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가 난 성소라고 선포하면서였다.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되어 있다. 내가 참여한 영어 투어 가이드의 설명에도 이 점이 미흡하였다.

 

3세기 동안 로마 제국의 10 대 박해는 유명하다. 특히 황제 디오클레치안 시기의 대 핍박(303-313)은 잔혹하였다. 당시 황제 디오클레치안은 제국을 연합하기 위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Sol Invictus) 사상을 고양 증진시켰다. 그는 주피터와 헤라클라스와 같은 전통적 신들을 섬겼다.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먼저,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신성 모독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유대지역으로부터 그들을 추방시켰다. 한편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네로 시대에 방화범으로 혐의를 뒤집어 씌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증오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 황제 디오클레치안은 그리스도교를 박멸시키는 일에 있어 악명 높은 인물이다. 당시에 17,0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신자들이 한 달 동안에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로마 제국의 고발 내용

(1) 무신론자로 비판 -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신상이나 우상을 경배치 않아 무신론자로 취급 되었다. 그들에게 성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로마 제국의 신들에 대한 경 배를 거절했다. 고문당하며 피를 흘릴 때에라도 자기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주장했다.

(2) 국가에 대한 충성심 결여 -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경배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에 향한 충성을 공여하는 일(애국심)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Justin은 우리는 세금 을 납부한다고 응수하였다.

2. 일반 민중들의 고발 내용

(1) 살인자로 낙인 - 주의 만찬에서 어린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유언비어 유포, 아테나고라스 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의 살육 행위도 보지 않는다고 응수했 다.

(2) 근친상간이나 난교 누명 - 이른바 애찬(agape feast)'을 두고 한 비평이었다.

(3) 인간 혐오분자로 낙인 - 일반 사회와 분리되는 삶의 방식에 대한 비평

(4) 사회에 무용지물로 지탄

(5) 재난의 원인 - 자연재난이 일어날 때 마다 그리스도인을 사자에게 제물로라는 대책을 들고 나왔다.

3. 철학자들의 고발 내용

(1) 그리스도교는 최근에 탄생한 종교라고 매도했다.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창조 때, 최 소한도로 모세 때로 거슬려 올라가는 역사를 무시한 것이다.

(2) 그리스도교의 내용의 비합리성 비판 - 신유 기적, 부활 등 교리들의 허무 맹랑성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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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