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붕괴

종말 : 2018. 8. 9. 18:54

바벨론 붕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14:8).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18:1-6).

 

영원한 복음 메시지

첫째 천사 메시지 선포와 동반하여 바벨론 붕괴 선포는 역사의 마지막 때 온 세상에 큰 소리로 외치는 영원한 복음의 메시지에 속한다. 붕괴될 바벨론으로부터 속히 나오라는 메시지는 인간 역사 상 최후적 엑서더스 명령이다.

 

위 본문은 사 21:9의 역사적 바벨론 멸망의 예언의 메시지를 마지막 때에 적용시키고 있다. 붕괴의 반복적 표현은 강조어법에 속한다. 요한계시록에는 큰 성 바벨론6회 나온다(14:8; 16:19; 17:5; 18:2, 10, 21). “6”이라는 숫자는 바벨론 비밀을 엿보이게 한다. 바벨론어로 바빌루(Bab-ilu[바벨, 혹은 바벨론])라는 어휘는 신들의 문을 뜻한다. 히브리인들은 이 어휘를 경멸적 의미 혼잡케 하다를 담은 발랄(balal)과 연결시켜 사용했다(11:9). 잡신들이 들끓는 바벨론, 혼잡스런 바벨론 붕괴가 <영원한 복음>에 속한다.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 역사적 바벨론은 이미 멸망하여 황폐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바벨론 붕괴 메시지는 고대 바벨론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진리에서 떨어져 나간 참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그의 뜻에 도전하는 비밀스런 세력으로 상징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사적 바벨론이나 영적인 바벨론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진리와 백성에 대한 전통적인 원수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이 명칭은 고대에서 종말까지 모든 배도한 종교적 조직체나 그 지도자에 대한 상징으로 나온다.

 

바벨론 역사

가인은 최초로 을 쌓았다(4:17). 하나님의 창조 시의 원 계획은 사람들이 지면에 퍼져 땅을 경작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1:28). 따라서 성들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 계획에 대한 역행의 길이 된다. 도시는 매혹적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도시에는 사고 싶은 물건이 가득하고, 즐거운 오락과 흥겨움이 넘친다. 그러나 인간이 도시에 운집하여 살아가는 일에는 항상 죄악과 부도덕과 여러 가지 悖惡들이 수반되는 혼잡을 피할 수 없다. 도시들은 항상 범죄의 온상이 된다.

바벨론 도성의 역사는 그 건립자 니므롯(Nimrod)으로부터 시작된다(10:8-10). 니므롯은 메소포타미아의 첫 번째 도시 국가 바벨을 건설하고 그 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바빌로니아의 전설들이 그 성읍의 건설을 세계 창조와 동등하게 다루고 있는 점에 비추어 니므롯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여호와 앞에서LXX )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믈의 문바벨은 역사상 첫 배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벨탑의 건축이 하나님의 언어 혼잡개입으로 인하여 와해된 역사(11:1-9)라는 심판을 당하였으나 인간은 신전고탑들(지구랏)을 계속해서 건축한 역사로 나아갔다. 느부갓네살 왕이 통치한 고대 바빌로니아는 그 영화와 권능의 절정을 이루었다(4:30).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배도의 절정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파멸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 바벨론의 붕괴를 마지막 역사의 진상을 밝혀주며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는 길잡이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체제는 끊임없이 바벨론을 지향하여 왔으며, 하나님의 개입으로 무너져 왔다. 현실 세계는 늘 바벨론 지향적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판이 협잡꾼들이나 사기꾼들에 의하여 요동쳐 왔다. 정치판은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바벨론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부정부패 척결이나 적폐 청산은 바벨론 정치의 비장의 카드로 정적을 때려잡는 요술방망이가 되었다. 뻔뻔한 자들이 더 날뛰며 출세하는 바벨론은 이리떼의 소굴이다. 다니엘을 중상 모략하여 타도하고자 한 자들의 이야기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6). 현대판 바벨론주의자들은 경제를 인기나 표심을 잡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예술은 이런 일에 대한 바람잡이 역할을 한다. 방송과 언론은 이 행렬의 가장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밴드왜건이나 뚜쟁이 역할을 한다. 넒은 의미에서 바벨론은 죄악적인 세상나라의 정치, 경제, 문명, 문화의 총체를 두고 일컫는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져 내릴 운명을 지녔다.

 

바벨론과 예루살렘

바벨론과 예루살렘은 서로 대척(對蹠)적이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을 파멸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붙잡혀 갔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바벨론은 하나님 백성과 진리의 원수 세력이 되어 왔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백성들을 핍박하고 진멸시키는 일을 자행한 로마제국을 바벨론이라는 은어로 묘사했다(벧전 5:13).

 

유대인의 저작, 위경 시빌의 신탁집(Sibylline Oracles) 5권은 계시록의 영적 바벨론의 운명에 대한 묘사와 로마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어떤 의미에서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지를 알려 준다. 로마를 마술을 좋아하며 간통에 탐닉하고 피에 굶주린 마음과 신을 믿지 않는 정신을 가진 악한 도시라고 말하면서, 또한 로마 때문에 히브리인의 많은 충성스러운 성도가 죽었다는 사실을 관찰하면서, 저자는 로마의 궁극적인 황폐를 예언한다.

 

이레내우스, 테르툴리아누스 등 교부들도 로마 제국을 바벨론으로 보는 시각을 지녔었다. 바벨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대적 권력 체제로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대상이 되었다(18:5). 바벨론의 죄악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분야를 망라한 포괄적 특성을 안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루스벨을 바벨론의 보이지 않는 왕으로 넌지시 비쳤다(14:4, 12~14).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통하여 일하기로 의도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사단은 바벨론을 인류에 대한 지배권을 얻으려는 총체적 계획의 중심지와 대리자로 삼으려고 설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 시대에 그렇게 두 도시는 세상에서 역사하는 악과 선의 세력으로 상징되었다. 바벨론을 세운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정부를 세우기를 열망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은 바벨론과 아무 관련이 없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말은 이런 원리를 저변에 깔고 있을 것이다.

 

큰 창녀 바벨론

신약성경에서도 바벨론은 예루살렘 반대 세력으로 군림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참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를 높이는 예루살렘과는 다르게 바벨론은 자화자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배도와 혼잡의 주도세력이 된다. 예루살렘은 평화, 신실함, 통일성을 추구하지만, 바벨론은 침략, 반역, 분열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을 큰 음녀로(17:1), 예루살렘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로 대비하고 있다(21:2).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벨론이 여자로 의인화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백성(교회)은 정숙한 여자로, 바벨론은 거룩한 남편을 배반한 음녀와 기생, 즉 배도한 교회를 일컫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을 두고 음녀의 모습으로 자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대의 바벨론이 무너진 이후 줄곧 사단은 잇따라서 세상의 권세를 통하여 세계를 지배하고자 해왔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의 큰 음녀 이미지에 잘 부각되어 나온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17:4-5). 천사는 요한에게 이 여자가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17:15).

 

바벨론은 호화로운 음녀혹은 창녀”(prostitute)로 표현되며, “모든 창녀들의 어미라고 묘사되어 있다. 바벨론의 역할은 창녀의 역할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더러운 이름을 가진 도시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요한 당시 로마라는 도시의 역할이 바로 창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녀 로마는 외견상 압도적인 호화로움과 사치로 치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는 음녀일 뿐이다. 종교적으로 로마는 온갖 종류의 잡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정없이 성도들의 피를 흘리고 그것에 취하여 있기 때문(17:6)이다. 정치적으로 창녀 로마는 적그리스도인 짐승, 곧 타락한 황제의 등에 타고 있다(17:3). 즉 로마는 타락한 정치질서에 편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이 바벨론 즉 로마는 모든 땅의 왕, 온 땅의 군주들을 자신이 가진 진귀한 상품으로 미혹한다. 본문은 바벨론의 범세계적 영역과 그 전제적 통치권을 행사할 것을 보여준다. 현란하게 꾸민 여자가 땅의 임금들과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있다(17:2). 이는 교회와 세속국가가 하나로 결탁되어 가는 모습이다. 일찍이 플로리스의 요아킴, 중세의 끝자락에서 요한 후스, 사보나롤라 같은 개혁자들은 바벨론화되어가는 이 현상을 예리하게 지적하므로 프로테스탄트의 등장을 준비시켰다. 특히 배도한 교회(17:5)와 지상의 나라들 사이의 종교적-정치적인 불의한 결속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국가 통치자들, 땅의 임금들은 종교적 권위와 자원을 의존하며, 마성을 발휘한다. 음녀는 그들을 공범자들로 만들어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살육하려는 계획을 세워 추진하므로 범세계적인 반역 세력으로 군림하는 체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음녀는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한다(17:2). 백성들이 음녀가 제공한 사상적 술에 마취되어 따르는 위험한 실상이 전개되어가는 현실 세계를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14:8). 이는 바벨론의 거짓 가르침과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종교적 세력들이 법령을 강요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마지막 때의 바벨론의 정체

재림운동의 선구자들은 프로테스탄트 교계까지도 음녀가 건네는 술에 취하여 가고 있다고 한 통찰을 하였다. 조셉 베이츠, J.N. 앤드루스 등을 위시하여 여러 선구자들은 이미 존재하여 온 세속 권력과 결탁관계에 있는 부패한 종교단체들 범주에 타락한 교황권과 희랍교회들 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권을 모방해 가는 거대 프로테스탄트 단체까지도 포함시켰다(RH, Feb. 21, 1854, p. 36). 엘렌 화잇도 <각 시대의 대쟁투>에서 같은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 은비(隱秘)한 바벨론을 구성하는 배도한 종교단체들과 그들이 전개하고 있는 운동이 점진적이고 누진적으로 이 무너짐의 길을 걷다가 그 영적인 붕괴가 종말론적으로 완결될 것이다. 특히 영혼불멸론, 악인에 대한 영구 징벌론, 일요일 신성설 같은 성경과 상반되는 진노의 포도주 같은 거짓 교리들의 무게 아래 산산조각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붕괴를 앞 둔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부도덕이 사방에 넘치고, 음란의 죄악의 파도가 넘실대며,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는 노아 홍수전의 세상과 소돔 고모라의 세상과 너무나도 빼어 닮았다.

 

하나님의 이중주

하나님의 의는 두 가지로 현현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정의롭고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시다(32:4).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의롭다는 것은 언약 백성에게 하신 은혜로우신 약속을 구속적으로 이행하신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실제의 이스라엘 역사적 사건 중에서 권능으로 구원하고 인도하며 지도하시는 행위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의 구속적 현현이라고 볼 수 있다. , 하나님의 의의 현현은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는 구원 행위나 돕는 행위로 나타나지만, 반대로 하나님 백성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 즉 하나님 백성의 원수들에게는 저주와 파멸의 보복적 심판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의롭게 심판하신다(9:4, 5;, 119:7)고 찬양함으로 심판(판단)이 의로 말미암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의 의의 이중적 현현인 구속적 의와 보응적 의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기본적 특색이 된다.

 

바벨론의 붕괴와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옴은 이러한 죄악의 역사를 마무리시키는 하나님의 의의 찬란한 사건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거로 우리 인간에게 새 예루살렘이 펼쳐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향악으로서 역사”(divine symphony of history)를 기대하게 한다.

 

역사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의의 초합리적인 지평을 보여줌으로 믿는 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킨다. 인간 사회의 기술혁명은 엄청나게 발전해왔지만, 인간의 도덕적 품성과 영성은 마지막 때에 피폐하여갈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포수(捕囚)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의 발악적 죄악의 역사에 기적적, 초합리적으로 개입하신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다. 죄악의 역사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종결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성육신과 십자가로 임하셨으며, 부활과 승천으로 그리고 재림으로 소망을 심었다. 그래서 어둠의 역사가 그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소망의 지렛대와 초자연적 개입이 숨 쉬고 있다. 그래서 바벨론 역사도 신비이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도 신비(mystery)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대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망의 포로가 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간다. 바벨론의 붕괴와 심판은 하나님의 도성의 내려옴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으로 연결된다심판과 복음은 손바닥 안과 밖이 서로 연결되듯이 하나님의 의의 이중적 현현에 속한다영원한 복음이 바벨론 심판을 포함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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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