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을 준비하는 믿음

종말 : 2018. 11. 15. 17:03

재림을 준비하는 믿음

소망의 백성

재림신도들은 하나님의 오심에 소망을 둔 백성들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 인간이 소망(elpis)의 터전 위에서 살아간다고 갈파하였다(2:26). 이 소망은 미래의 좋은 일과 연결되어 있다. 플라톤은 인간 존재란 단순히 현재를 수용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약성경의 엘피스는 좋은 일에 그 맥이 연결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 ἐλπίς (elpis)소망으로 번역되고 있다. 소망은 믿음, 사랑과 함께 그리스도인 존재를 구성케 하는 요소가 된다. 이 소망에는 헛된 기대나 두려운 예상 같은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호프만(E. Hoffmann)이나 바우얼(Walter Bauer) 등 여러 학자들은 신약성경 상 소망은 항상 어떤 좋은 것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또한 엘피스는 세상에서의 인간의 꿈의 구현 같은 것이 아닌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객관적인 유익(benefit)"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5:5; 1:5; 2:13). 이런 점을 감안하여 ”elpis“를 가변적이고 안 이루어 질수도 있는 희망으로 번역하지 않고 소망으로 번역한다. 이 소망은 절대적으로 인간중심적이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와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 본질은 종말론적으로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왕의 통치를 이루시는데 있다(고전 15:28)(참조,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2).

이전에 우리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다(2:12).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으며 세상 풍조를 따라가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던 자들이었다(2:1-2). 우리는 마치 파우스트 전설에 나오는 낭만주의적 악마의 대표인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의 지시에 따라 살아온 존재들로 전락되어 살았다. Mephistopheles 뜻은 '빛을 증오하는 자', '교활한 파괴자'라는 별명도 있다

물론 이방 세계에도 이데아의 세계 같은 형이상학적인 미래에 관한 사상이 있었으나, 죽음의 공포로부터 안위와 해방을 주는 소망에 대한 사상은 없었다. 이방의 문화 문명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림신도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품고 사는 존재들이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9:12)이다. 소망의 포로가 되어 있는 자들이 재림신도들이다. 초기교회 신도들은 재림신도들이었다. 그들의 소원과 소망은 마라나타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 있다(고전 15:22). 아람어 마라나타“maran atha”로 읽으면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s!)”의 뜻이 되고, “marana-tha”로 읽으면 우리 주님께서 오십니다(Our Lord comes!)”가 된다. 초기 재림신도들은 자나 깨나 소망의 백성들이다.D-dayV-day

D-day라는 말은 194466일 제2차 대전 이래 유행된 말이다. D-day 란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개시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D-day”에서 “D”가 무엇의 약자이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결정적인 날(decisive day), 지정된 날(designated day), 상륙의 날(disembarkation day), Decimal-day 등이 거론되어 왔다. 아이젠하워 장군 측근이 “D”의 의미를 묻는 편지에 “Departed-day”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194466일은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전세를 결정적으로 승세로 돌린 날이 되었다. 이 결정적인 날 독일 롬멜 장군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을 예상은 하였으나 기상악화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아내의 생일잔치 참석 차 베를린 행 비행기를 탔다. D-day 때문에 연합군은 드디어 194558일 베를린을 함락시킨 역사적인 V-day 곧 승리의 날을 맞게 되었다. D-day가 있었기에 V-day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마찬 가지로 인류 역사상 두 개의 큰 날이 있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날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재림의 두 사의의 관계를 흔히 D-dayV-day 라는 말로 설명해 왔다. 순서는 D-day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V-day가 온다. 재림교회 안에서 완전주의자들은 V-day에 너무 역점을 둔 결과 D-day가 흐려져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경우도 있어 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선행한 후에, 몸의 구속(속량)(8:23)이 일어나는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온다. 재림 준비도 이 순서를 따라 설파되어야 한다.

D-dayV-day 사이에 시간적 간극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사건은 D-day 에 해당된다. 이미(already) 십자가에서 마귀는 결정타를 입었다. 그러나 사단의 권세 패배와 성도의 결정적 승리가 확보되었지만, 노르망디 상륙으로 1년이란 세월이 걸려야 하였듯이 아직도 그리스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는 이어지고 있다((not yet). 조만간 V-day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도래할 것이다. 이 소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재림신도들은 소망의 포로들이다. V-day 가 오기까지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이어지는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 감당하면서 살아가야한다. 완벽한 승리의 날 V-day를 기다리는 재림신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삶의 전 목적을 걸고 있다.

재림 소망 준비

개인과 교회의 신앙은 끊임없는 개혁과 갱신의 역사로 나가야 한다. 죄악이 지배하는 세상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인 믿음의 삶을 침식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21세기 달라진 시대와 달라진 환경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적 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새로운 도전이 신앙을 주관화, 인간화 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피를 요구한 박해시대에 접어들면 꿋꿋한 상록수 신앙을 보게 되지만, 신앙적 굴절이나 타협도 나타난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타협적 이론들이 교회를 파란의 상태로 몰고 가기 마련이다. 박해가 지난 후 교회는 곧 지나간 시대의 순교자적 얼을 담아 키워내지 못하고 세찬 세속화의 침식 파도에 휩 쌓인다. 세속화 파고는 별난 혁신적 이론이나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달려든다고 해도 소용없다. 교회가 교권적 계층구조를 강화시켜 나간다고 해도 그 침식 파고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배교자들에 대한 교회의 느슨한 대응에 반대의 기치를 내세운 주동자들(Montanus, Priscilla, Maximilla)과 이들을 따르는 무리들은 순결한 삶을 치켜세우며, 순교자의 길을 찬양하며 금욕주의적 신앙을 고취하는 영성운동을 전개해 갔다. 마찬가지로 현대판 몬타니스트들은 교회를 파고드는 세속화 물결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개혁이나 갱신 운동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집단의 독선의식이 매우 강한 기류를 보여 준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기들의 신념이 정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함정에 빠진다. 세속화 침식의 파고를 넘어서기 위하여 흔히 성령운동이나 은사운동을 전개하며 교회를 갱신시키고자 힘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유형의 갱신운동이든지 간에 여러 가지 신학적 오류 내지는 신념의 극단성을 피하지 못한다. 이러한 극단성과 오류는 현재까지 거의 모든 이단적 영성운동들이 보여주어 왔다. 세상의 끝 날에 교회의 갱신운동은 성경이 강조한 재림운동에 그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신앙의 경성을 촉구해 나가야 한다.

 

約束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께서는 너희를 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滅亡하지 아니하고 다 悔改하기에 이르기를 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物質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行實敬虔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하기를 바라보고 懇切思慕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物質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約束대로 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앞에서 도 없고 도 없이 平康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9-13).

 

종말시대의 영성운동은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종말이 임박했다고 하며 그 종말에 대한 대비로서, 지나친 금욕주의적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구원론적 극단성을 피하여야 한다. 방언 등 신적 직통계시 같은 신비주의적 체험을 강조하여 복음적 구원론의 내용을 희석시키는 일도 피하여야 한다. 과도한 갱신주의는 흔히 교회론적 통일성을 깨는 탈선도 불사하여 왔다. 특히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정결한 자들만으로 교회가 구성된다는 옛 도나티즘(Donatism)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

또한 예수의 재림이 매우 급박하게 임할 것이라고 전파하면서 급기야는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으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사실 예수 재림의 급박성에 대한 신념은 사도교회 시대부터 지도자와 신자들에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성급한 재림 임박론을 교정시키는 메시지를 주었다(, 살후 2:2-4).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시기에 관하여는 소상하게 예언하였고 그대로 성취되었지만, 그의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는 제자들이 알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인자도 모른다. 파루시아를 재촉하는 일은 세계선교와 신도의 완전과도 관련되어 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하나님의 섭리의 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나간 역사를 통하여 그 시기를 알아내고자 안간 힘을 쏟은 일이 빈번하였다. 앞으로도 재림의 시간을 설정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현상은 이어질 것이다.

구속자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구원의 날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오늘"로 나타났다. 전에는 미래였던 것이 이제 구속자 안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현재가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신분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6:16)이 된 우리는 성령님의 내재하심과 그 역동적 권능에 이끌려 살아간다. 이 체험 속에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재림준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날마다 체험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D-day에 참여하며 나가는 일이야 말로 재림의 소망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 재림신도들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 나누어 주신 의를 삶의 현장 속에서 뿌리 내리며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거룩한 삶을 진전시켜 나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을 받아야 한다”(1;28). 소망이 신앙에 밀착되어야 한다. 믿음, 소망, 사랑은 늘 함께 가야 한다. 소망과 믿음이 분리되면 영적 삶이 겉돌아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3:3).)야 소망이 참 날개를 펼 것이다. 결국 참된 재림 준비는 역동적 믿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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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