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후기 행적 (행 12장)
베드로의 후기 행적 (행 12장)
베드로의 투옥
헤롯 대왕의 손자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 분봉왕으로 지내다가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다스려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통치자가 된 헤롯 아그립바 I세(재위기간 AD 37-44)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유대의 종교적 관행을 엄격히 지키며 경건한 유대교도로 보이고자 했다. 그래서 신흥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당시 기근에 대한 사회적 불안의 해소책으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그 제물로 삼아 비밀리에 참수 처형하고 신도들의 재산을 몰수했다(AA 143). 산헤드린회의 재판으로 사형에 처했다면 통상적으로 석살(石殺)형이었을 것이나, 로마 제국의 처형방법을 택한 것이다. 고난의 잔을 마신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이었다. 이 때가 AD 44년 무교절 때 이었다. 이 불의한 일로 얼마 안 되어 헤롯 아그립바는 가이사랴 지방 순행 시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가 먹어 죽었다. 그는 53세의 나이로 통치 제7년인 AD 44년에 죽은 것이다
베드로가 투옥된 암석 굴에는 4명씩 4팀이 교대로 지키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전부 16명이 교대로 그를 지키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간수 2명은 죄인과 함께 묶이어 지키고 나머지 2명은 밖에서 지켰다. 인간의 눈으로는 베드로가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철통같은 구금상태이어서 극한적 절망 상태에 빠진 것이다. 베드로의 처형을 지연시키고 있었던 것은 그의 지도력과 영향력이 큰 상황에서 무교절 기간 운집한 백성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서 이었다. 베드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다가오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롭게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극한은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AA 146). 교회는 베드로 사형집행 전야에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밤 세워 베드로의 구출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누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 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행 12:6-11).
기도의 응답을 믿지 못한 신도들
베드로가 이들이 모여 있는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들겼다. 로데는 베드로의 음성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동안 베드로의 메시지를 열심히 들었던 로데는 베드로의 음성을 잘 분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데가 베드로에게 즉시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은 믿음의 부족이 아니라, 기도 응답의 기쁨에 벅차 침착하게 문을 열어주는 것을 잊고 집회에 모인 분들에게 이 사실을 속히 알리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문에 서 있다는 로데의 확신에 찬 소식을 들은 회중은 조금 전까지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잊고 그녀의 전언을 불신했다. 이것은 기도하고도 그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아이러니 같은 현상이다. 하나님이 자기들의 기도에 응답했다는 믿음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오히려 어린 여성이 제정신이 아니라 하고 천사를 잘못 본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들은 베드로가 자기들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민망하였을까. 교회는 때때로 이러한 잘못에 빠지기 쉽다.
텍사스 술집 주인의 고소 사건
텍사스 주 한 작은 시골(Mt. Vernon)에 소재한 드러먼드 술집(Drummond’s Bar) 주인은 영업 확장을 위하여 새 건물을 건축하고 있었다. 근처 있는 침례교회가 동 신축 건물을 술집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는 청원권 행사도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건축 공사를 다 마치고 다음 날 오픈하고자 한 밤에 갑자기 번개가 처 그 술집 건물을 몽땅 태워버렸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진 일을 보고 교인들은 의기양양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술집을 불나도록 기도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술집 주인은 교회를 법정에 고소했다. 어디선가 술집 망하라고 교인들이 기도했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술집 주인이 법원에 고소를 했다. “저 교회 교인들이 우리 술집 불나라고 기도해서 불이 나서 몽탕 타버렸기 때문에 손해 배상을 청구합니다.” 그는 자기 술집에 불이 나서 도괴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책임이 교회 측에 있다고 주장하며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회 측은 자기들 기도 때문에 건물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주장은 황당하다며 배상을 거부하는 주장을 펼쳤다.
소송 사건을 맡은 판사가 사실 심리를 위해 목사를 불러서 물었다. “당신네 교회 교인이 정말 이 술집에 불이 나라고 기도해서 불이 난 겁니까?” 판사의 말에 목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불이 나라고 기도한다고 어떻게 술집에 불이 납니까? 세상에 별 우스운 사람들도 다 있습니다.”
교회를 대표한 목사의 말이 끝나자 판사는 기가 막혔다. 그가 내린 판결은 이렇다. “술집 주인은 믿음이 있고, 교회 회중들은 믿음이 없다!”
행 12:17의 “다른 곳”
베드로는 그들에게 주의 형제 야고보와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
여기서 베드로의 활동 기사는 끝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눈부신 활동 기사가 여기까지이다. 위기에는 피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다. 이미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
베드로가 급박한 시기에 어디로 도피했는지 그 장소가 표기되지 않았다. 그 장소 이름이 나오지 않은 점에 비추어 그 간곳이 비교적 중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 나오는 ‘다른 곳“이 어디인지에 관하여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로마설 - 로마 가톨릭의 어떤 저술가들은 그가 로마로 갔고, 거기서 교회를 세운 후 행 15장에 기록된 총회가 있었던 시기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
2. 안디옥설 - 다른 이들은 그가 안디옥으로 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좀 더 가능성 있어 보이지만, 예루살렘 총회 후까지는 그곳에 그가 체류한 증거가 없다.
3. 룻다 또는 욥바설 - 이런 가까운 도성이면 도피 장소로 족했을 것이다.
제롬이 유세비우스의 크로니콘(Chronicon)을 의역한 진술 곧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 동안 전파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가톨릭 백과사전 “베드로” 항목에서도 제롬의 주장을 이어 받아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 동안 로마의 주교이었다고 기술한다. 그 기간을 AD 42-67년까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베드로가 총회를 위해 예루살렘에 있었으며(행 15장), 총회 직후에는 분명히 안디옥에 있었고, 소아시아 북서부에서 사역했다(벧전 1:1)는 사실에 비춰볼 때 매우 의문시된다(참조,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iii. 1). 행 8~12장에 비추어 볼 때, AD 44년 베드로가 구출 받은 후에 이러한 소아시아에서의 선교 활동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은 무할례자들인 이방인들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 반면에 주께서는 베드로를 할례자들을 위한 시도로 삼으셨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2:8). 베드로는 안디옥, 사마리아, 욥바, 가이사랴 같은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섬겼다(벧전 1:1-2). 베드로가 이 때 로마로 갔다면, 로마제국의 수도인데 누가가 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AD 57년 또는 58년에 기록한 <로마서> 끝 부분에서 27명의 신도들 이름을 낱낱이 써서 문안을 하고 있지만 그 곳 주교로 있었다는 베드로에 향한 문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Loraine Boettner가 <Roman Catholicism>에서 주장한 것처럼 베드로의 로마 선교 활동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베드로는 생애의 마지막 봉사를 바울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수도 로마에서 끝마쳤다. 바울이 둘째 번 투옥 어간에 네로 황제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투옥되었고 형장에서 주님을 부인하였던 자기가 감히 십자가에 주님처럼 달리는 것을 용납지 못하여, 사형집행자들에게 간청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AD 537-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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