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그리고 하나님의 근심

창세기 6:1-7

A.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6:2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여기서는 복음주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관련된 해석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타락한 천사설

위경 에녹서와 쿰란 두루마리 창세기 외경에 근거를 둔 천사설은 하나님의 아들들“(בְנֵי־הָאֱלֹהִים 베네 하엘로힘)이라는 어구와 베드로전서 3:19-20, 유다서 6-7에 두고 있다. 고대의 유대 주석가들과 초기 교부들, 그리고 많은 현대의 성경 강해자들은 이 아들들을 욥 1:6; 2:1; 38:7에 의거하여,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문맥은 천상적 존재와 지상적 존재의 결연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곧 내리게 될 홍수 심판 문맥에 맞지 않다. 그 심판은 천사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참조 3)으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 때에는 천사들처럼 결혼하지 않는다(22:30)고 한 점에 맞지 않는다.

2. 가인 계열 통치자설

하나님의 아들들을 왕들로 보는 해석은 2세기 유대인 저술가들의 해석에도 나온다. M. Kline“Divine Kingship and Gen 6:1-4," WTJ 24(1962):187-204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인 계열의 왕들이나 왕조의 통치자로, ’사람의 딸들은 그 왕들의 후궁으로 해석했다. 가인계열의 통치자들은 창 4:17-24에 진술된 문명을 이룬 자들이다. 라멕이 일부다처를 둔 것은 그가 소유한 처첩들이었다. 이 견해 주장자들은 고대 왕들이 자기들을 天子로 자처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참고, 삼하 7:14; 대하 29:23; 2:3).

그러나 이 견해는 가인 계열에 통치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성경 문맥을 벗어난 가설일 뿐이다. 또한 왕정 제도는 오랜 시대 이후에 도입되었던 점과 홍수 심판이 모든 인간들에게 다 내린 점에 비추어 맞지 않다.

3. 셋의 후손설(The Sethite Interpretation)

미드라쉬를 포함하여 유대인 주경가 다수가 주장하는 이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들로,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로 본다. 이 시각은 크리소스톰, 아우구스투스 등 교부들,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선호하는 시각이기도 하다.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 두 사이에 혼인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 신앙으로 오는 구원 대 인간의 행함으로 얻는 구원의 콘트라스트를 보여주고 있다. 가인의 제물에는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상향적 특성이 담겨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벨의 제물은 오실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를 믿는 신앙을 예표하고 있었다(4:1-15). 셋은 최초의 순교자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다. 4:25부터 5장에 나오는 셋의 톨레도트(toledot, 계보, 족보)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거의 규칙적으로 나온다. 이 계보를 시작하는 단락에서 셋은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공중예배를 암시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4;26). 아담-셋의 계보에서 아담 7세손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셋 계보 끝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6:8) 의인이고,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가 나온다(6:9).

다음으로 하나님의 형상 대 인간의 형상의 콘트라스트가 나온다. 아담의 톨레도트는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는 긴 서론으로 시작하고(5:1-2), 셋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전달된 기사가 나온다(5;3). 반면에 4:16-24 에 나오는 가인의 톨레도트는 가인 중심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 결여되어 있다. 이 결여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대조는 아담과 가인의 아내 기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 아담의 아내 이름이 하와로 나오지만, 가인의 아내 이름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아내 하와는 인정받고, 존경 받으며 평등한 한 인격으로 비쳐지고 있지만, 가인의 아내 이름은 거론도 안 되고 있어서 가인의 목적 달성을 위한 무명의 도구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또한 두 계보에서 “~ 낳고의 과정을 서술해 나가는 문맥은 하나님의 아들들사람의 아들들이라는 콘트라스트가 함축된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 셋을 통한 아담의 계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등뼈나 산맥처럼 이어지고 있는 점에 대조적으로 가인의 계열은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연계성이 깔려 있다. 그리하여 성경의 문맥에서 가인 계열은 단순히 사람의 아들들로 나올 뿐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자주 언급되어 나온다(14;1; 32;5-6; 1:2; 삼하 7:14 ). 하나님께서는 훗날 이스라엘을 그분의 장자”(4:22)라고 말했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14:1)라고 불렀다. 또한 창 26:34-35에는 에서의 동족이 아닌 여자와 혼인이 야곱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 3:38이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한 점에 비추어 창 5장의 아담의 계보의 연속선상에서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엘렌 화잇도 사람의 딸들을 경건치 못한 가인의 후손들로 보았다(PP 81).

이런 셋의 후손이라는 해석은 신자의 자녀와 불신자의 자녀들 사이의 신성치 못한 결혼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셋의 계열은 모두가 의롭고 가인의 딸들은 모두가 악하였느냐는 물음에 답을 내 놓아야 한다. 이 점은 다음 항목의 서술을 통하여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판단된다.

 

B. <보고, 좋아하고, 취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אָהרָ, 주목하다) 자기들이 좋아하는(בָּחַר 결정하다)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לָקַח 취하다)”(6:2). 이는 인간들의 결혼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참조, 11:29; 24;48; 14:3 ). 예수께서도 혼수 전 인간들의 결혼의 문란상으로 풀이하였다(24:38). 그래서 본문을 천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결합이라는 해석하는 것을 성경과 거리가 먼 해석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 나오는 <보았다...좋았다...취했다>는 창 3:6의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 백성들까지도 하나님이 창조 시에 계획하신 결혼제도의 거룩한 의도를 짓밟아 버리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간 것이다.

셋의 자손과 가인의 자손 사이의 이런 거룩하지 못한 결연(結緣)의 증가는 급속히 증가하는 죄악의 원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불신자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그로 인해 수반되는 심각한 위험 때문이었다. 대개의 경우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게 되면 배우자의 요구에 굴복하기 마련이다(7:3, 4; 23:12, 13; 9:2; 13:25; 고후 6:14, 15). 신앙이 해이하여진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 말씀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그들의 신앙은 죄악적 세속 문화에 융합되어 갔다. 그들은 육욕적, 감각적인 매력에 이끌려 건실한 신앙적 판단력이 둔화되어 갔다. 그들은 경건한 집안의 아름다운 딸들과 경건한 결혼생활을 따분하게 여기고, 가인 자손의 여인들의 매혹적 아름다움에 이끌러 갔다. 더욱이, 그들이 모든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6:2)는 점에 비추어 일부다처 제도가 셋의 사회에 파고들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인간 결혼생활을 탄식하며 떠나는 상태로 전락되어 버렸고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6;3). 성의 타락은 인간이 스스로 멸망의 길로 나선 것이 되어버렸다. 가정의 해체는 문명의 해체와 인류 종말의 길이 된다.

當時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子息을 낳았으니 그들은 勇士古代名聲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6:4).

성스럽지 못한 결혼의 결실들은 네필림이었다. 네필림은 육체적인 거인들을 뜻하기보다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the fallen ones),” “난폭한 자들," 또는 "폭행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네필림의 어원 나팔(napal)타락하다를 뜻한다. 네필림을 거인(giants)으로 번역한 것은 70인역이 네필림을 기간테스(gigantes)라고 번역한 것으로부터 유래했는데 홍수 전 시대에는 인류가 다 기골이 장대하였으므로, 이 말은 신장보다는 도덕적 성격을 가리킨 것이 바람직 해 보인다. 홍수 전 사람들은 대체로 대단한 신체적 및 정신적 능력을 소유했었다. 지혜와 기술력이 뛰어난 이 사람들은 그들의 지력과 신체적인 능력을 교만심과 정욕을 만족시키고 동료 인간들을 압제하는 일에 끊임없이 바쳤다(PP 80 84, 90). 이들의 자식들은 명성이 있는 용사들(gibborim)"이었다(6:4). 여기 명성은 부정적 의미에서 악명을 떨치는 자들로 보인다. 깃보림(용사들)은 가인계열 자손 라멕의 특징인 포악스런 성품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4:23-24).

C. 성령 철수 예고와 하나님의 근심

나의 永遠히 사람과 함께 하지(통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肉身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百二十 年이 되리라 하시니라”(6:3).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 하리니(shall not strive)"'그가 사람들과 다투거나 설득하지 아니할 것이다'를 뜻한다. “함께 하다”(NKJV에는 애쓰다<strive>”로 번역)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다스리다”, “심판하다의 뜻으로, 통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당대의 인간들은 정욕의 포로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배척하여 성령께서 비집고 들어가 권고할 없어져 버렸다. 성스러워야 할 혼인제도가 무너져 내렸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포악스런 자들인 네필림들은 성령이 더 이상 역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성령께서는 집요하게 회개를 거절하는 인류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도 곧 끝나야만 했다. 베드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사단에 포로된 이들(베드로는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함)에게 전파했다고 말한다(벧전 3:18~20). 이 세상은 창조 시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아름답고 선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그들이 肉身(basar)이 됨이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면서 죄된 욕망에 포로가 되어 버린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굴복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더 이상 성령이 계실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들이 거룩한 감화에 완전히 무감각해져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은 떠나게 된다. 그들을 제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더 이상 애쓸필요가 없게 된다. 홍수 전 사람들로부터 성령께서 철수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날에 관한 예언을 하시므로 아직도 인내하시는 유예의 시간대를 주셨다. 홍수 때 까지 120년간은 자비의 시간대, 은혜의 시간대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罪惡世上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計劃恒常 惡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恨嘆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본문은 인간의 마음, 계획혹은 생각과 행위 가운데 악이 극도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거의 예외 없이 사악하였다.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고 몇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사회가 전면적으로 사악했다. 이런 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러 잊으려”(벧후 3:5)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한탄(nakham)했다는 말은 이어져 나오는 그분의 마음이 근심했다(‘astab)”는 해설에서 그 진의를 엿볼 수 있다. “한탄은 기쁨의 반대어이다(8:10). 하나님의 한탄은 그분의 예지력의 부족이나 그분의 본질 또는 목적의 가변성을 전제하는 표현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결코 무엇을 후회하지 않는 분이시다(삼상 15:29). 하나님의 한탄은 인간의 죄악으로 야기된, 거룩한 사랑의 고통을 나타내는 은총과 위로의 표현이다. nakham의 어근의 기원은 '깊이 숨 쉼' 따라서 사람의 감정, 주로 슬픔, 동정, 위로의 육체적 표출이라는 개념을 반영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불변성을 유지하시면서도 멸망해가는 변화된 환경과 관계에 적음, 대처하시는 은혜로운 자비와 위로, 및 구원의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진리를 이렇게 나타내신 것이다. 인간의 타락상으로 인한 하나님의 비탄에 관한 언급은 하나님이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감동적인 암시도 된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은 슬픔과 연민으로 채운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죄짓는 인간들에게 따르는 보응을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연민의 바다를 온통 끓어오르게 한다(18:6~10; PP 630).

근심하는 아버지 이야기

<예언의 소리> 부장인 분스트라 목사의 딸이 외과수술 날짜를 잡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의젓하고 활달하던 아이가 달력에 표시된 수술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의기소침하여 지며 풀이 죽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인 나는 딸이 갈수록 침울해져 가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딸은 수술 받았을 어땠느냐고 여러 번 물어 왔다. 아버지인 나도 지나간 삶을 통하여 여러 번 수술을 받았던 일을 상기시키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아무도 수술 결과를 예단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이 수술실에 실려 갈 때, 이야기를 하였지만, 딸의 수술을 앞 둔 아버지의 길을 처음 당하고 있어서 나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였다.

사실상 나는 딸이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딸을 마취과 의사에게 인계한 다음 100%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모란 없다. 수술 날짜가 드디어 이르렀다. 나는 근심 걱정으로 위통을 앓아 딸을 배웅할 수조차도 없었다. 인간 아버지도 이럴 진대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철수시키며 홍수를 예고하였을 때 그 심정이란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하늘 아버지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런 심정을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恨嘆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말씀에서 읽어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참고서:

Jacques B. Doukhan. Genesis, Seventh-day Adventist International Commentary. Pacific Press Assn., 2016,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