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주의 예언 해석의 浮沈
역사주의 예언 해석의 浮沈
I. 역사주의 해석 방법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묵시문학적 예언은 대부분 상징들로 묘사되어 있다. 이 점에서 구약의 대/소 선지서들에 나오는 고전적인 직설적 예언들과 구별이 된다.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 이 두 묵시문학은 이 지구를 진동시키는 도덕적/영적 대쟁투와 그리스도의 종국적 승리와 악의 세력의 최후적 파멸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재림교회는 그 역사의 초기부터 이 묵시문학서들의 예언을 역사적 해석 방법(역사주의 방법, 또는 연속적인 역사적 방법)에 따라 상징들과 그 의미를 탐구하여 왔다. 이 예언해석 방법은 두 책의 예언들과 그 성취는 다니엘과 요한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의 최후적 건설까지의 역사적 시간대에 관련되어 짜여 져 있다는 관점을 전재로 한다. 이 역사적 예언 해석 방법에서는 하루가 문자적인 1년이 된다는 연 ․ 일 원칙을 상징적 기간의 의미를 펼치는 기본 해법으로 보고 역사 진행과정에 따라 예언된 사건들을 자리매김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에는 이런 역사주의적 해석의 걸고리를 만들어 주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막1:15)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니엘서의 “때” 해석을 역사적 방식으로 해석하시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봉사의 시작점에서 메시야의 출현을 예고한 다니엘서의 70이레(단9:24-217)의 예언적 때가 차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지상 봉사의 종착점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또 이 때에 관한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단9:26-27)에 관련시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마24:15; 눅21:20 비교)이란 말씀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이 시작점에서의 선포는 그의 탄생과 수침사건에서 성취되었고 종착점에서의 예언적 사건들은 예수께 부활/승천하신 후에 일어날 사건으로 AD 70년의 예루살렘과 성전 파멸 시 역사적으로 한 차례 성취되었다.
재림교회의 뿌리가 되는 16세기 Luther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도 이 역사적 해석 방법을 채택하여 교황권을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상의 예언의 초점으로 부각시켰다. 재림교회의 초기 선구자들은 이들 개혁자들의 전례를 따라 역사적 해석 방법에 토대를 둔 예언을 해석하였으며 마지막 시대에 대한 의식,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 봉사, 재림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립하였다. 요컨대 역사적 해석 방법은 예수님과 종교개혁자들이 취한 해석 방법이었다.
이 역사주의 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A. 직선형(Stright-line Theory)--요한계시록은 사건이 요한 시대로부터 일직선적 연대순으로 전개되어 간다는 주장이다. 각 장에서 선행 예언적 사건이 성취되고 후행 사건이 계속된다는 시각이다. 예컨대, Albert Barens가 요한계시록 주석서(1852)에서 제6-8장의 일곱인과 일곱 나팔을 매우 주관적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순서를 이어 가는 사건으로 해석했다.
B. 평행 반복 확장형(Recapitualationists)--한편의 예언이 기본적으로 다른 편의 예언과 같은 시간대의 사건들로 후의 것은 이전 예언을 다른 차원에서 또는 그 종말 부분을 더 확장시켜 묘사하고 있다. 다니엘서에서 2장, 7장, 8장 11장의 예언들을 평행 반복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유형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에 관한 예언을 초기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그리스도의 교회와 관련된 사건들로 푸는 방법도 이에 속한다. 요컨대, 역사주의 해석 방법이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묵시 문학에 나오는 예언들을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에서 성취되어 가는 시각으로 풀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II. 안교교과의 7 나팔 해설과 역사주의 적용 문제
A. 2019년 제1기 안식일학교 교과책 <요한계시록>의 역사주의 해석의 문제점
랑코 스테파노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묵시문학적 예언에 관한 역사주의 해석의 적용을 하고 있으면서도 역점을 거기에 두고 있지 않는 느낌을 받게 하고 있다. 예컨대, 셋째 나팔 시대를 중세 암흑시대로 풀고 있다. 넷째 나팔 시대를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로 보면서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던 것을 끝나게 하였다고 본다. 그러면서 넷째 나팔 시대를 17-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 이성의 시대, 세속주의 시대까지 그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다. 다섯째 나팔의 시대를 계몽주의 시대 여파로 등장한 합리주의, 회의주의, 인도주의, 상대주의, 자유주의, 무신론 철학 시대로 본다. 여섯째 나팔의 시대를 마지막 시대로 본다.
스테파노비치는 성경 본문에 관한 성서적 풀이를 비교적으로 상세하게 하면서도 그 묘사된 특징들을 역사적 적용의 시대와 연관성을 간과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서 독자들을 당황케 한다. 더구나 넷째 나팔에 나오는 “다섯 달”과 다섯째 나팔에 나오는 “연 월 일 시”의 예언적 기간에 대한 역사적 적용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셋째와 넷째 나팔의 해설의 연속성으로 인해 이것이 과연 그가 펼치고 있는 틀이 역사주의에 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어떤 영문인지 몰라도 저자는 안식일 학교 교과 제7과 제목을 “일곱 나팔”로 내 걸고 있으면서도 월요일에 국한시킨 간단한 설명을 하고 그 자세한 해설을 건너 띄고 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10-11장 해설에 관한 분량이 훨씬 더 많아 제목에 걸맞지 않다. 또한 스테파노비치는 요한계시록 13:8에 나오는 666이라는 상징적 수의 실체가 교황권임을 흐리고 있다.
B. DARCOM Report의 해석 원칙 제안
다니엘-요한계시록 연구위원회(DARCOM)은 Symposium on Revelation, bk.1에서 7나팔 해석 기준을 제시하였다(180-181). 먼저 7나팔의 묵시적 예언이 요한계시록에서 역사적 부분에 속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전개과정이 하나의 나팔 다음에 다른 나팔이 나오고 있는 순서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 예언 해석 원칙은 역사주의 예언해석 원칙과 묵시문학적 예언해석은 초기교회 때부터 마지막 때까지 전개되는 전체적 흐름을 유지해야 하고 타 예언들과 반복적 평행성을 띄어야 한다. 또한 각각 하나의 역사적 성취이기 때문에 다중 성취 해석을 피하여야 한다. 7나팔은 회개치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종말론적인 심판 및 7재앙과는 구별하여야 한다. 그리고 특정의 예언적 기간이 나오는 경우 1일=1년의 일-연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엘렌 화잇이 조슈아 리치가 5달과 년월일시에 관한 예언 기간 풀이를 수용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팔 그 자체의 용도가 경고나 곤경적인 사건의 박두 선언을 하고 있다(민 10:1-10). 개별적 나팔이 전개되고 있는 기간은 광범위하다. 그리고 요한계시록10:1-11:14 본문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이 사이에 오는 막간의 간주곡과도 같으면서도 1260년 기간(계 11:3)을 회상시키는 여섯째 나팔에 속한다.
III. 역사주의 해석의 발전과 쇠퇴
A. 역사주의 예언 해석의 흥기
역사주의 해석은 그리스도교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다. 그리고 교황권은 역사주의 예언 해석을 하는 일에 있어서 키워드가 되어 왔다. 다니엘 제7장의 열 뿔을 가진 넷째 짐승(표범 같은데 네 날개와 네 머리를 지닌) 다음에 나오는 작은 뿔이 있는데 그 뿔이 크게 자라고 그 뿔에는 눈과 입이 있어 큰 말을 하며 때와 법을 변경한다. 이 작은 뿔의 정체를 어떻게 보느냐가 역사주의와 미래주의 해석의 갈림길이 되는 키가 된다.
역사주의 해석 기류가 그리스도교 시대 첫 3세기동안을 지배하였다. 고대 로마에서 24km 상거한 Portus Romanus의 감독 Hippolitus(c. 170-235)는 Treatise on Christ and Antichrist에서 이 작은 뿔을 교황권 상징으로 보았다. 이것은 1800여 년 전에 주장한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역사주의 해석 물줄기를 LeRoy Froom은 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Prophetic Interpretation에서 잘 펼치고 있다. 그는 묵시문학의 바벨론을 로마로 보았다.
작은 뿔이 하는 “큰 말”이란 참람된 말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시한다는 뜻이다(막 2:7; 요 8:56-59; 10:33). 교황은 자주 "거룩한 아버지"로, 때로는 "지극히 거룩한 아버지(the Most Holy Father)," "우리들의 지극히 거룩한 주님“으로 칭하여져 왔다. Lucio Ferraris(1748-1763 경)은 1746년 교황을 ”지상의 하나님“ ”왕들 중 최고 왕“으로 묘사했다.
역사주의 예언해석은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도 지배적이었다.
B. 첫 번째 역사주의 해석 쇠퇴
대부분의 개신교 주경가들이 이 역사주의를 제 4세기 이후 그리고 19세기 이래 포기했다. 그 대신 역사주의 자리를 과거주의, 미래주의, 또는 이상주의 해석 방법이 침투하여 장악해 갔다.
교황권 시대로 진입하는 4세기 이래와 중세 시대는 로마가톨릭 시대에는 베드로 반석설이 지배하였다. 마태복음 16:18의 ‘반석’을 베드로로 보았다. 소위 사도적 계승론에 따라 각각의 교화은 베드로의 재 성육(reincarnation)으로 보았다. 다니엘 2장의 신상의 금 머리는 바빌로니아를, 은 가슴과 팔은 메디아 제국, 놋 배와 넓적다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철 다리는 헬라 왕국들을, 철과 진흙의 발가락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그리고 신상을 친 돌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리하여 로마 교회는 구약시대에 예고 된 셈이다.
C. 역사주의 부침의 역사적 전개 과정
유럽 중세시대에 신학자들은 진리를 떠나 오류를 수용하므로 성령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예언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적 어둠 시대에 경건한 무리들을 일으켜 역사주의 참 빛을 따라 성경을 풀어가게 하였다. 발도파들은 교황권이야 말로 짐승이며 로마를 바벨론으로 보았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도 중에도 남부 이탈리아 시토수도회의 수도원장이었던 Joachim of Fiore(c.1135-1202)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장악한 시대를 탈피하여 1260일을 연일원칙에 의한 예언해석을 하였다. 그는 발도파의 성서해석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1260일과 42달 및 3년 반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연일원칙 근거가 되는 민 14:34과 에스겔 4:6을 활용하여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의 끝을 자기 시대에 끝나는 1260년으로 본 문제성을 띄었다.
요아킴 이후에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의 홍수 문이 열렸다. 이는 당대의 그레고리 9세(c. 1170-1241)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Frederick 2세(1194-1250)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투쟁과 맞물려 있었다. 그들은 상대방을 서로 적그리스도로 몰았다. 프룸에 따르면 잘스브르크 추기경 Everhardt 2세는 바티칸과 거리를 두고 교황권을 작은 뿔로 치 받았다. 이로 인해 프레더릭과 에버하르트는 파문당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 권 안에서 교황권 적그리스도론 및 작은 뿔 시각이 대두된 것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성직 매매, 물질 사랑, 사악함 등을 이유로 당대의 몇 교황들을 요한계시록의 음녀로 보고 지옥으로 보내 버리기까지 하였다.
13-14세기 역사주의 자들은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을 교황권으로 보았다. Girolamo Savonarola(1452-1498)은 다음 9개의 교리를 선포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인한 값없는 칭의
2. 두 종류의 성찬
3. 교황의 용서와 면죄부 효력 부정
4. 사악한 추기경들 반대 설교
5. 교황의 수장권론 배격
6.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가 아닌 우주적 교회에 주심
7. 교황=적그리스도
8. 교황 파문 무효
9. 고해성사 불필요
사보나롤라는 1498년 5월 23일에 이단으로 정죄, 파문, 황형 당하였다. 로마 교황권의 사악함을 신랄하게 비평하는 자들은 백성들에게 성경연구를 권고하면서 믿음으로 대처해 나갈 것을 권고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95개조의 선언을 하였다. 그는 교황권의 사악함을 선포하고 다니엘 2장의 신상의 머리부터 순차적으로 바벨론-메데 파사- 알렉산더와 헬라왕국- 로마제국-열국 분열 시대- 예수의 왕국으로 보는 역사주의 해석 방법을 활용했다. 그는 교황권을 두고 둘째 바벨론으로 풀어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다니엘 7장의 작은 뿔의 정체를 투르크로 보는 한계성도 드러냈다.
1993년 Michael de Semlyen은 All Roads Leads to Rome?에서 중세 후반부로부터 19세기까지 특히 프로테스탄트계에서 600년 동안 역사주의가 팽배하였다고 갈파했다. 그는 역사주의 계열에 속한 자들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종교개혁의 새벽별인 위클립, 종교개혁자들 틴데일, 루터, 칼뱅, 크랜머(Cranmer), 17세기에는 번얀, KJV 역자들, 웨스트민스터 및 침례교 신앙고백을 출판한 계열에 속한 자들, 아이삭 뉴턴 경, 웨슬리,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드, 근래의 스펄전, J.C. Ryle 감독, Martyn Lloyd-Jones 등등이 역사주의 해석 방법을 사용한 선구자들이다. 이들 모두는 교황권을 적 그리스도로 보았다. 적 그리스도란 그리스도를 대체한 것으로 옛 이교주의가 새 얼굴로 분장하고 나타난 것들이다.
불행하게도 16-17세기에 로마가톨릭은 제수이트들이 주도한 반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역사주의 예언해석을 타도하고자 하는 이론을 마련해 냈다. 그 중 한 사람인 스페인 출시 제수이트 신부 Luis del Alcazar(1554-1613)가 요한계시록 모든 사건들을 이교 로마시대 및 첫 6세기 동안 적용한 과거주의적 해석 방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40년에 걸친 연구 끝에 9백 페이지 분량의 요한계시록 주석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계시록의 전반부는 유대인의 메시아 거절과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것으로, 후반부는 이교 로마의 멸망과 기독교로의 개종에 관한 것으로 돌리면서 적그리스도는 ‘네로 황제’라고 못을 박아 중세 로마 교회와는 상관없는 예언으로 만들었다.
다른 제수이트 사제인 Francisco Ribera(1537-1591)는 1585년에 저술을 시작하여 그의 사후 1590년에 출판된 500쪽 짜리 요한계시록에서 교황권이 적그리스도임을 배제하였다. 그는 요한계시록 첫 몇 장을 고대 이교 로마에 적용하고 나머지를 마지막 때부터 재림직전까지 문자적 3년 반 기간 동안에 일어날 미래 사건으로 적용했다. 그는 미래주의 해석을 기조로 하고 있다. 이 기간 중 특정 개인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서도를 박해 훼방한다고 서술하였다. 이 때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축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이 개인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하나님으로 자처하며, 하나님의 두 증인을 살해하고 세상을 정복한다. 1260일, 42달, 3년 반은 1260년이 아닌 문자적 기간이다. 이 모든 전개과정을 통하여서 볼 때 요한계시록은 중세기간이나 교황권에 적용될 수가 없다.
리베라의 1260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는 이론에는 다니엘 제9장의 70번째 주일을 절반으로 나누어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긴 간격을 두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후반부인 두 번째 부분을 재림직전 기간에 일어날 기간으로 설정하는 이른바 현대 세대주의적 미래주의의 원조격 이론을 창도한 것이다.
추기경 Robert Bellamine은 제수이트 변증가로 1581과 1593년 사이에 출판한 책에서 연일 원칙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1260일을 1260년으로 푸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 이유는 그 누구도 그토록 긴 기간을 살 수 없다고 한 점에 두었다.
예언 해석에 있어서 과거주의, 미래주의, 및 이상주의 해석 방법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교황권을 배제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Emmanuel Swedenborg는 1766년에 발행한 Apocalypsis Revelata에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요한계시록 책의 신비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고 하면서, 상징으로 나온 내용을 문자적으로 풀면 안 된다고 보았다. 요한계시록 13;18에 나오는 666이라는 숫자의 상징을 교황권으로 보는 것을 배척하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에 이런 일련의 빗나간 해석들에 대하여 냉소적이거나 무시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들의 기류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역사주의적 해석을 방기하고 로마가톨릭교도들의 반 종교 개혁적 주장에 동조하는 태세로 나갔다. 혹자는 스웨덴보르그의 기만적 주장에 동조하기도 했다.
이 반종교개혁적 예언 해석이 오늘날 개신교도들의 미래주의의 종말론 해석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영국이 그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 영국국교도인 Samuel Roffey Maitland (1792-1866)은 캔터베리 대승정의 학자와 사서로 재임하면서 1826년에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적 기간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학문적 연구가 영국에서 미래주의 해석을 북돋아 정착시키는 일에 기여를 한 것이다. 그는 로마가톨릭의 반종교개혁자들처럼 한 때 두 때 반 때와 42달 및 1260일 기간을 문자적 기간으로 풀었다. 그는 리베라 식의 문자적 해석의 치명적 결함을 피하면서 오늘날 세대주의적 해석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러면서 영국교회와 로마가톨릭의 신학적 간극을 좁히는 일을 도모한 것이다.
Maitland는 처음에 트리니티 대학을 거점으로, 그 다음에는 더블린대학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저명 학자들의 동조 연구를 이끌어 냈다. 그 중에 더블린대학의 히브리어 교수인 James Henthron Todd(1805-1869) 같은 학자가 미트란드의 추종자로 나서서 강의 및 저술활동을 통하여 미래주의 해석을 확산시켜 나갔다. 토드는 적그리스도가 교황권이 아닌 개인으로 보았다. 유대인 배경을 지닌 이 적그리스도 개인은 재림 직전에 나타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가 짐승, 음녀, 사단의 회 같은 상징들을 교황권으로 해석한 그 기원을 요아킴, 발도파와 알비젠파 탓으로 돌렸다. 토드는 가톨리교회는 배도한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비록 과오가 있긴 하지만 로마교회가 참 그리스도교회라고 강변했다. 이 시기에 옥스퍼드 운동의 챔피언 John Henry Newman(1801-1890)은 옥스퍼드 운동의 목적을 영국 여러 종파들을 로마교회로 흡수시키는 일에 두었다. 그는 1845년에 로마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이렇게 영국교회에서 반프로테스탄트 분위기 속에서 예언연구파의 주장에 동조하고 미국까지 확장시킨 사람이 John Nelson Darby(1800-1882) 이었다. 많은 저술활동을 한 그는 플리머스 형제단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831년 레이디 파워스코트(Lady Powerscourt) 예언연구 집회에서 부유한 이 부인의 환대 가운데 종말론 체계를 굳혀갔다. (Robert Daly가 편집한 Letters and Papers of the Late Theodosia A. Viscountes Powerscourt (London: A. S. Rouse, 1895) 에는 다비와 파워스코트 사이의 로맨틱한 관계가 언급되어 있는데 아마도 다비는 자기의 신앙적 선교 활동 때문에 이 관계를 청산한 듯하다.). 여기 이 집회에서 비밀 휴거 개념도 정립되었다는 설이 있다. (환난전 휴거설은 Edward Irving으로부터 나왔다고 보는 입장도 있고, 후에 다비가 배척한 어빙파의 Margaret MacDonald의 예언적 은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비는 영국 형제단과의 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미틀란드, 토드, 벨라민, 리베라를 따라 미래주의 가르침을 자기의 신학 속으로 통합시켰다. 형제단 운동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발전으로 다비의 활동 범위도 넓어졌다. 1833년부터 그는 고아원 아버지라고 일컬어 진 Bristol의 George Müller과 각별한 교분을 쌓았다. 이 때 그는 삼촌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아 자기의 종교운동에 자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837년부터는 다비는 강의하기 위해서 여러 곳을 여행했는데 프랑스와 스위스, 독일, 캐나다, 그리고 미국과 뉴질랜드에서도 설교를 했다. 특별히 그는 1859~1874년 사이에 미국을 주요 도시에서 설교했다. 이 기간 동안 행해진 그의 일곱 개의 강의는 미국 근본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근본주의는 형제단 운동의 신학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다비는 성경과 교회 역사 분야에서 그의 지식의 깊이를 보여주는 여러 권의 논쟁서들과 교리서들, 영감적인 저서들을 기록했다.
다비는 1864-65년 2회에 걸쳐 미국 선교를 하던 중 한 장로교회 목사 James H. Brookes를 만났다. 이 Brookes 목사와 그 교회는 미국에서의 세대주의 운동의 보루가 되었다. 완고한 그의 성격과 대인관계에도 불구하고 교리적, 변증적, 주석적, 신앙적 제 영역에서의 많은 작품들을 쏟아 내 놓은 것에 대중들의 반응이 좋았으며, 독어, 불어,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리만큼 학문적 업적도 뛰어났고, 지칠 줄 모르고 서 유럽, 북미주, 서인도, 뉴질랜드 등을 선교적 여행하면서 자기 사상을 전파하였다. 1882년 그의 장례식에는 8,000-10,000명이 모일만큼 한 시대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의 사후 유럽의 형제단 운동은 분열과 대립의 양상을 면치 못하였다.
다비가 부르크스(James H. Brookes, 1830-97)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부르크스는 오하이오 연합장로교 세미나리와 프린스톤 세미나리를 졸업하고 목회에 투신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테네시 출신인 그가 남북전쟁 당시 이념적으로 남부군대의 승전을 위하여 동조하거나 기도할 수 없었던 일로 회중의 분노를 사게 되어 구 식민지에 있는 교회(Walnut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목회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다비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통달한 학자적 능력으로 성경연구와 신앙에 관한 많은 서적을 출판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다음에 다룰 스코필드를 비롯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또한 나이아가라 성경연구회를 주도하여 당대 거국적으로 성경 연구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같이 출판물, 영재 교육, 학술적 성경 연구 활동 등을 통하여 다비의 신학적 체계를 효과적으로 유포시켰다.
다비의 운동을 대중화시키는 일에 스코필드(Cyrus Ingerson Scofield, 1843-1921)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세대주의 사상을 널리 미국과 캐나다에 확산시킨 사람은 스코필드이었다. 그는 독창적인 주장을 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세대주의자들의 사상을 명확하게 하고 체계화시킨 인물이었다.
스코필드는 1843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났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사병으로 종군하다가 공을 세워 훈장을 타기도 하였다. 제대 후 그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정계에 투신하여 그랜트 대통령으로부터 캔사스주의 변호사로 임명되었다. 1879년 YMCA종사자인 그의 친구 McPheeters 의 집요한 전도로 회심하였으며 얼마 후 그 지방의 목회자인 세대주의자 부룩스(J. H. Brookes)를 알게 되었다. 부룩스는 그에게 성경 공부를 도왔으며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소개하였다. 아무런 정규적인 성경공부 또는 신학공부를 한 적이 없었지만 3년 후에 그는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받았다.
1882년 그는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작은 회중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 1895년 동북부의 메사츄세츠주에 갈 때까지 목회하였다. 1895년 이후 동북부에서 그는 Niagara 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s에서 교사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0-3년 사이에 Northfield Bible School의 교장으로 재직하고, 1903년 다시 달라스로 돌아와서 1902년부터 시작한 스코필드해설성경 작업을 하였다. 유명한 세대주의자 게블라인(Gaebelein)의 도움으로 그는 교회의 임무 중 일부를 면제받아가며 해설성경작업에 착수하여 1909년에 완성하였다. 이 스코필드해설성경 출판은 플리머드 형제단 이사들의 재정적 지원으로 가능하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누구나 세대주의적인 구분에 따라 성경을 공부하기만 한다면 쉽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너무나 명백하고 단순하게 배열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어떤 사람들이라도 다 성경을 이해할 수 있으며, 목사, 복음 전도자, 신학생들이 이를 통하여 성경의 더 깊은 지혜로 인도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 성경은 플리마스 형제단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스코필드와 게블라인은 다비와 다른 형제들 즉 William Kelly, McIntosh, F. W. Grant, Bellet등에게서 필요한 모든 영적 양식을 발견하였으며 그들을 사도들 다음가는 건전하고도 영적인 교훈의 소유자로 존경하였다. 리스(Reese)는 말하기를 스코필드는 한 세대동안 다비의 저서에 대해 부지런하고도 감탄하는 충실한 학생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스코필드의 해설성경은 역사적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유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성경을 믿는 보수적인 신자였다. 그래서 그의 충실한 제자들은 스코필드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생각하기까지 되었다. 이 해설성경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해설성경의 각주에 전부다 기록되어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당시에 소위 고등비평가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여러 면에서 공격할 때 성경의 주요 교리들을 변호하므로 성경연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의 추종자들도 역시 성경의 권위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스코필드 해설성경은 기독교의 역사적 교훈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들도 많이 내포하고 있다. 많은 지식을 가진 성경학도라면 이 해설성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잘못된 교리를 피할 수 있겠지만 초신자나 아직 신앙의 지식이 부족한 자들에게는 선입견부터 주입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세대주의의 아버지 격인 존 넬슨 다비와 미래주의의 아버지인 제수이트 프란시스코 리베라가 연계될 수 있었다. 다비는 1859~1874년 사이에 미국을 여섯 차례나 방문하여 주요 도시에서 설교했다. 이 운동에 1825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B.W. Newton이 가세하면서 힘을 더 해갔다. 다비는 1827년 성공회를 떠나 이른바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으로 알려진 작은 기독교인 집단의 지도자가 되어 개신교식 미래주의를 발전시켰다. 그 기간 동안에 미국 풍토에 ‘미래주의’의 씨앗을 확고히 뿌릴 수 있었다. 제수이트의 ‘어린 씨앗’은 복음주의 개신교회에서 성장하게 되었으며 프로테스탄 미래주의 기반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일을 해 나갔다. 이 영국에서의 일련의 미래주의 종말론 운동은 프로테스탄트의 역사주의 해석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재림교회를 불러 내시이어 허물어진 역사주의 예언 해석을 것을 보수, 재건하는 기수가 되게 하셨다. 오늘날 미래주의 해석이 풍미하여 적그리스도가 교황권이라는 주장을 포기하고 있는 중에 재림교회만이 개신교 교단 중 유일한 역사주의 해석에 충실한 입장에 서서 나가고 있다. 그런데 재림교회의 역사주의적 예언해석이 프로테스탄트의 큰 기류에 침식되어 가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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