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성경으로부터 풀어내기 : 2018. 12. 14. 10:50

웃음

아브라함의 순례 스케치4

 

아브라함의 웃음, 사라의 웃음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百 歲 된 사람이 어찌 子息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 이니 어찌 출산하리요”(17:17).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엎드렸다. 17:3에도 나온 이 엎드리는 행위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배하는 자세이다. 이 엎드림은 존경과 경외의 경건한 자세인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엎드림에서는 그런 경배에 더하여 웃음이 수반되었다. 이 웃음은 성경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인간의 웃음이다.

웃음은 차하크(tsachaq)”로 기뻐서 웃는 경우도 회의감에서 웃는 비웃음도 모두 뜻하는 동사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온다.아브라함의 웃음이 기쁨의 표현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이런 시각은 그가 百 歲나 되어 自己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하여지지 아니하고”(4:19)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미 아브라함은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15:4)는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롭게 여기셨다(15:6). 하나님께서는 노인들을 놀래게 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신다. 그러나 혹자는 로마서에 나온 바울의 진술을 약속의 실현을 확신한 이후에 이르러 온 아브라함의 마음 상태에 적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냐고 한다.

아브라함의 웃음이 하나님 약속에 대한 회의심의 발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브라함은 상대방이 들을 수 없도록 마음속으로 말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이중 의문문을 결합시킨 그의 마음속에서의 질문은 아무래도 기쁨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의심의 발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웃음에는 의심이 깃들어 있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위대한 믿음의 영웅 아브라함의 심중에 의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자연스럽게 볼 필요는 없다. 그는 이미 아내를 누이라고 하므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한 전력도 있었고(12:11~13), 아내의 제안에 따라 하갈을 대리모로 수용하기도 했다(16:2~4).

3의 시각에서는 아브라함이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으로 인하여 이스마엘을 향한 자기의 계획이 무산된 것을 감지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바란다고 하는 말을 근거로 자기의 당혹스러움을 웃음으로 반영시켰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17:18).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老衰하였고 내 主人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 15 사라가 두려워서 否認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8:12-15)

여호와께서 다른 두 수행 천사들과 함께 소돔성 현장검증 차 가는 중 아브라함 장막에 들렸다. 하나님께서 소돔성의 죄악적 부르짖음 소리를 확인하러 가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통보하실 때, 사라가 장막 문 뒤에서 자기에게 내년 이맘 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음성을 듣고 웃었다(차하크).

앞에서는 아브라함이 웃었다(17:17). 그런데 이번에는 사라가 웃은 것이다. 사라는 아마도 자기의 무자한 고통스런 운명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웃음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하크가 지닌 두 가지 의미가 뒤섞인 즉, 의심과 희망이 뒤섞인 웃음으로 이건 사실일 리가 없어!”하는 심정의 발로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마음속으로 웃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가 속으로 웃었을 때 심령까지 꿰뚫어 보시는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아셨다. 그의 외로움 그리고 살아져 버린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간 그에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期限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3-14).

 

노인은 웃음을 잃어간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체 여러 부분에 이상이 와서 병원 신세를 자주 져야 하는 노인의 심정은 비통해하기 일쑤다.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올 때 어느 노인이 어린이처럼 환한 웃음을 웃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노인들을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노인의 남은 여정을 아름다운 낙조로 만들어서 그의 삶을 찬란하게 끝마치기를 원하신다.

인간은 자기의 한계능력, 도는 무능력을 두고 자학하며 포기하기 쉽다. “그건 안 돼하는 장벽들을 무수하게 경험해 온 노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 내외에게처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들려오지만,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극한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인간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 창조와 재창조의 하나님만이 참된 웃음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은 땅과 하늘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리고 유머 감각도 주셨다.

젊은 날 어느 훌륭한 인품을 지닌 분이 필자에게 하나님께서 큰일을 하게 할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한 여운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조그만 가능성을 크게 증폭시켜 희망의 미래를 북돋아 주는 말은 젊은이에게 희망을 살려낸다. 북돋게 하는 말은 늪 속에서 몸부림치는 젊은이를 살린다. 하나님은 젊은이에게 환상을 보게 하시고 늙은이에게 꿈을 꾸게 하신다(2:28).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거의 다 살아가면서 남긴 발자국마다 켜켜이 쌓여가는 죄스러움과 삶의 공허함의 거미줄에 걸리기 십상인 노인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켜 준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예고하시므로, 가슴 설레게 하고 미래를 희망찬 웃음으로 맞이하게 하신다. 재림신도는 소망을 품은 포로”(9:12)가 되어야 한다. 그 소망을 노인들에게도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삭 옥동자를 낳았을 때, 옛날의 그 너털웃음이 환희의 웃음으로 바뀌어 졌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百 歲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22:5-6). 모리아 산상에서 아버지 말에 순종하여 제물로 내 놓은 이삭은 갈보리 언덕 위에서 자기를 제물로 드리는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 된다.

노인은 보통 떠들썩하게 웃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될 것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소리 내어 불신하는 웃음을 날리지 않는다. 아브라함처럼, 사라처럼 속으로 웃는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웃는 자기 백성에게 다가오셔서 비록 의심이 담겼더라도 그것을 희망의 웃음으로 바꾸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노인의 마음에 예수께서 탄생케 하시므로 노인을 참 웃음으로 승화시키신다. 나이든 노부부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웃으면서 살아가는 노인

보통 어린이들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200여회 웃는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보통 성인은 하루 14-17회 밖에 안 웃는다. 살아가는 삶의 압박, 스트레스와 연륜이 지나가면서 무거워져 가는 책무의 짐들 등등 때문일 것이다. 사실상 이런 것들에게 기쁨을 빼앗김을 당하면서 우리는 늙어간다. 그리하여 많은 성인들은 대부분 저기압의 변경지대에서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다. 그러나 건강한 성인들은 어린이들이 지닌 내적 특성을 살려가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지녔다.

90세가 되도록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날마다의 삶을 즐기며 살아간다는 점에 있다. 103세 되는 한 할머니는 유머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100세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의 친구가 방문해서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의 대답은 글쎄. 저들이 이제 날 임신할 수 없도록 절제해버렸단 말이야.”라는 유머를 던졌다. 병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몇 해 전 교회 내방객 중 90세 노인이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건강하고 얼굴도 팽팽하고 피부도 고왔다. 더 놀라운 것은 행복해 보였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그 노인에게는 낯선 이들이 없었다. 그의 주위에는 모두가 그의 친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허그를 한다. 그는 항상 밝고 환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목사가 말하기를 자기도 90세가 될 때 할머니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가 목사의 귀에 속사기를 드레스를 벗고 살라고 했다. 유머를 구사하는 그의 젊음이 돋보였다고 한다.

웃음이 사람을 젊게 만든다. 유머는 늙은이를 젊게 하는 신비의 명약이다. 건강한 노인은 어떻게 해야 웃을 수 있는지를 잘 안다. 유머는 치료하는 빛이 온 몸을 관통케 한다. 빈정대고 늘 우울해 하는 탈을 벗어 보라. 그리고 마음으로 웃어라.

웃으면 스트레스 호르몬을 감소시키고, 성장 호르몬, 즉 젊음의 호르몬을 증대시킨다. 웃으면 70대가 70대로 보이지 않게 한다.

탈무드에 나오는 라삐 베로카와 예언자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한번은 베로카가 예언자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장차 올 나라의 분깃을 차지할 자가 있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없다.” 그들이 이야기 하는 도중에 두 사람이 지나갔다. 예언자(엘리야)가 말했다. “저 두 사람이 장차 올 나라의 분깃을 차지할 것이다.” 라삐 라베카가 그 두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물어보았다. “당신들 직업은 무엇이요?”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광대요. 사람들이 낙심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을 기운나게 해 주지요...”

 

코미디언 그리말디

그리말디(Joey Grimaldi) 1800년대의 영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웃게 하는 코미디언이었다. 분노에 찬 사람들도 그의 코미디를 보면 박수갈채를 보내는 무리로 바꾸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정작 자신의 마음에는 기쁨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을 그토록 잘 웃겼지만 자기 자신은 치명적인 멍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되었다. 그는 늘 더욱 더 재미있게 코미디언 노릇을 해야 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이다. 그는 완벽주의자로 자기가 늘 하던 방식을 만족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큰 병에 빠져들었다. 그렇지만 계속하여 공연을 해야 하였다. 몸이 말을 잘 안 듣자 할 수 없이 그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계속된 과로 스트레스 부하로 인하여 그는 늙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의사는 그가 유명세를 타고 있는 코미디언인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의사는 그를 정밀 진찰을 한 후에 그의 병에 대한 의학적 처방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의사는 그에게 과로와 우울증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길을 이렇게 제안하였다.

나는 당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을 벗어나 편하고 느슨한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주말에는 코미디언 그리말디 쇼에 가서 재미있게 보면서 웃으세요. 가 당신을 웃겨 줄 겁니다. 그게 다른 어떤 약보다 당신에게 더 좋을 겁니다.”

그 때 그리말디는 낙담한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보며 슬픈 대답을 했다. “의사 선생님, 제가 바로 그 그리말디입니다.”

몇 주 후 18233월에 그리말디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죽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웃게 할 수는 있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웃음을 잃어버린 인간의 이 슬픈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良藥이라도 心靈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17:22).

어려울 때나 병들었을 때나 계속 주 안에서 기뻐하면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튼튼하게 하는 힘을 얻게 된다(치료봉사, 241). 웃음은 고통스런 인생길에 희망의 무지개가 된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