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순례 스케치 6

- 너무 아름다운 아내를 둔 남편 -

I. 아내의 순결을 희생시켜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 남편 이야기1 (12:10-20)

창세기 12장 후반부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 기근이 몰아쳐 왔다. 그는 권속이 굶어 죽는 것을 피하고자 이집트로 갔다. 아브라함의 여정에는 늘 하나님의 임재가 따랐는데 이집트 행 여정에는 하나님의 동행이 결여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아브라함이 자기 임의로 결정한 여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12:9)는 본문에 비추어 이집트 경계 근처까지 간 마당에 매력적인 땅을 향하여 조금 더 가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었지 않나 한다. 바로 얼마 전 하나님의 임재와 땅 약속을 들었던(12:7) 그가 또한 벧엘에서 제단을 쌓기까지 한 신앙적 헌신까지 한 그가 약속의 땅을 벗어나서 물질이 풍족한 곳을 장기간의 거류(gar)지로 택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기마련이다. 그러나 위험한 지역에서 조차 하나님의 큰 재앙 개입이 있었다(12:17). 문학적 교차 구조 본문(12:10~13;1)의 중심이 된 12:17은 위험지대에서도 연약하여 쉽게 무너지는 자기 백성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현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기 아내라는 사실을 숨기므로 고상한 신앙을 먹칠하는 인간적 연약성을 드러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불신을 나타냈다.

당시 사라는 65세이었다. 90세에 출산을 하였으며, 127세에 죽은 사실에 비추어 사라는 당시 중년의 미모 쯤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너무 아리따운여인을 아내로 두는 남편이 위험한 모험적 여행까지 감행하면 늘 이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정념의 눈으로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는 뭇 놈팡이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 세상(이집트)이다. 거무스레한 애급 사람들이 자기들 보다 흰 동방의 미모의 여인을 탐내어 남편인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탈취할 것이라는 공포감에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배다른 자기 아버지의 딸이었으므로, 그를 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두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관계를 은폐하는 것으로 일종의 기만이다.

남편의 믿음의 용기 부족 때문에 아내 사라는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자기를 지켜 줄 용기도 없으면서 미모의 여인을 아내로 삼고 있는 한심스런 남편이다.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아내의 순결을 던지는 남편이었던가. 이집트 사람들이 보고, 소문이 나서 고관들까지도 사라를 보고(14-15, 반복적으로 봄) 감탄하였다. 드디어 보고를 받은 바로 왕은 사라를 자기 후궁으로 취하였다. 권력의 정상에 있는 사람은 자기 나라 여인 중 마음에 든 여자들을 제 마음대로 강탈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양, , 노비, 나귀, 낙타를 결혼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아브라함의 기만은 자기를 옭아매는 동아줄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가에 재앙을 내려 사라를 보호하셨다. 사라의 고백 아니면 꿈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둘러댄 진상을 알게 된 왕은 노하여 선지자 아브라함(20:7)을 책망하고, 그의 아내를 돌려주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12:18, 19)고 책망하였다. 그의 책망은 흡사 하나님의 책망 같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신적 개입에는 두 손을 든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위기에 넘긴 대가인 부끄러운 선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선물에는 사라의 몸 종 하갈로 들어 있어 훗날 비극의 씨앗까지 들어 있는 셈이다. 예전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듯이 (shalakh, 추방하ek), 바로는 아브라함을 이집트에서 내보냈다(20, shalakh).

 

II. 아내의 순결을 희생시켜 자기 생명을 지키려던 남편 이야기2 (20:1-18)

거의 20여 년간 머물렀던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을 떠나 그랄 지방으로 향하였다. 옮긴 이유는 나와 있지 않으나 목초지를 찾아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은 20여 년 전에 바로를 기만한 실수를 이곳에서 반복하여 범한다. 그 사이에 신앙적 헌신 등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또 실수한 것이다. 그는 네게브(그랄)에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가 자기 아내라는 사실을 감추고 누이라고 둘러댔다. 그 결과 아내가 곤경, 위기에 빠진 것이다. 사라는 당시 90세 가까이 되었지만 미모는 아직도 출중하였다. 이 이야기는 12;10-20 에 나온 이야기와 그 동인이나 전개 과정, 신적 개입, 및 선물 등에 평행적 요소들이 많다. 본문의 교차구조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나온다(20:8).

본문은 과거의 교훈을 망각한 부조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핍으로 인한 기만행각이 또 나오고 있다. 이 것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후사 약속의 말씀에 대하여 엘리에셀을 내세우기도하고(15:2), 이스마엘을 염두에 둔 제안을 하므로(17:17-18) 자기 안의 회의적 시각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윤리 강의까지 하였다(18:22-32).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결코 순진하지 않았다.

바로 왕이 사라를 취하였을 때 그녀의 나이는 65세이었다. 그 때부터 거의 25년이나 흘렀는데도 그랄의 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후궁으로 취한 것이다. 그만큼 사라의 미모가 출중하였던 것이다. 그 예로 탈무드의 한 라삐는 고령의 여인을 아내로 취한 이 황당한 이야기를 그가 곧 임신할 기적을 보이리만큼 매혹적이었다는 점에서 풀고 있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아비멜렉이 강고한 아브라함 부족과 동맹관계를 맺으므로 오는 이점 때문으로 이 사건을 풀고자 한다(21:22-34). 그러나 이 둘째 견해를 배제할 수 없더라도, 사라가 40년을 더 생존한 점에 비추어 그 첫째 이유인 사라의 출중한 미모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성적으로 가까이 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취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시어 왜 남의 부인을 취하였느냐? 그 일로 인하여 너는 죽으리라(20:3-7)고 강력한 책망을 하셨다.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신 이유는 사라를 통하여 언약의 약속이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온 세상에 복을 가져다 줄 하나님의 약속의 씨앗인 이삭을 낳는 어미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때에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항변한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4). 불의한 자는 죽인다고 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백성도 죽이십니까? 내게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더러 그 여인이 자기 누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그 여인도 내 오라비이다고 말하였습니다(5). 그러면서 당당하게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개역성경)고 자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NIV"I have done this with a clear conscience and clean hands."(깨끗한 양심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행하였나이다)고 번역하고 있다.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도 안다. 그래서 너로 그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하려고 이렇게 막는 것이다. 그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6-7).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만으로 무지한 중에 사라를 취한 것을 두고 자기를 합리화시켜 의로운 백성으로 자처하였다(4). 그의 주장은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중에 죄를 범하는 것 역시 죄가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장차 약속의 아들을 탄생시킬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도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브라함을선지자(nabi)”가 된다고 하고 그의 중보기도를 받으라고 한다(7). 구약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이 선지자(나비)”가 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만국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중보자 택함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부끄러운 아브라함을 일으켜 세워 세상의 이른바 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언하고 그들의 죄 용서를 위한 기도를 올려야 하는 선지자로 서도록 하셨다.

 

III. 헝클어진 군상들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비멜렉은 가나안의 통치자, 가나안의 왕이었다. 그리스도교 밖의 세계에서도 그 나름대로 시비곡직을 가리고, 선악을 분별하며 공의-정의가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외곽지대에 사는 이방인들에게도 나타나시어 중죄를 범하는 것을 막으신다. 이방 권력자가 권력을 악용하여 여자들을 마음대로 첩으로 삼을 수 있었겠지만, 최소한도 남의 아내를 탈취하여 범하는 것을 중죄로 판단하고 있었다.

선민이 아닐지라도 일반계시를 통하여 상당 수준의 정의와 진리 의식을 지니고 그 구현에 온 힘을 경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가나안 주민들의 도덕의식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은 단계였다. 십계명이라는 성문법을 갖지 않았어도 가슴에 새겨진 불문법의 빛을 따르는 이교도들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을 자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을 종종 신문지상에 나온 미담의 주인공들을 통하여 현대판 아비멜렉들을 본다. 불의와 불법을 칼날같이 지적하면서 정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는 현대판 아비멜렉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그래도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은혜로운 천연계시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박수를 보낸다. 반면에 하나님 백성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은 이어지고 있다. 창세기 26장에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인지 모르겠지만, 이삭이 아버지의 실족한 사건을 반복하고 있는 점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지토판에서 보여주듯 아내와 누이를 녹피(鹿皮)에 가로 왈()처럼 사용하는 당대의 관행의 그물에 걸린 하나님 백성보다 더 돋보이는 이교도들이 있다. 특별계시가 일반계시 앞에서 힘을 못 쓴 것은 계시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 때문이다.

이교도들의 이런 도덕-윤리의식이 오히려 신앙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반면교사가 된다. 특별계시에 토대를 둔 신앙이 없이도, 하나님이 창조한 이 천연 세계에서 그리고 인간 사회와 역사에서 윤리적 선과 악을 구별하면서 이른바 자연법까지라도 탐구하여낸 엘리트층이 있다. 예수께서 백부장을 보시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이를 못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단적인 예증이 된다(8:10).

이교도들에는 천연계를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입력하여둔 자연법을 의식하면서 초월자의 존재를 깨달았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꿈이라는 계시를 통하여 결정적인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신적 개입 현상도 일어난다.

아비멜렉의 아브라함에 대한 책망의 음조는 정직에서 나온 용기가 있고 그 표현은 당당하며 그의 보상은 관대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지자가 되는 아브라함의 인품은 비겁하고 기만적이고 타산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한 대답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20:11)라고 한 변명은 별 호소력이 없는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향한 외경(畏敬)이 없는 것으로 보았던 그곳에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도시와 사람들이 다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다. 불신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사단의 자식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였다는 주장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아비멜렉의 너그러움은 더욱 빛난다. 그는 사라를 되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16). 은 천개는 은 1000세겔이다. 이 금전은 일종의 명예 복구대금이라고 볼 수 있다. 당대 바벨론에서 1세겔이 1인 노동자의 1개월분 노임에 해당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83년분의 노임금액과 맞먹는 액수이다(Andrews Study Bible 참고). 은 백 개는 거주할 땅을 구입할 수 있는 대금이었다(33:19). 사라가 자기 가족으로 복귀하여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옹호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이것은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라가 하나도 잘못한 일이 없고, 자기네 가족, 친족, 사회에서 예전의 존경을 그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과 소와 노비를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그리고 살아갈 땅도 주었다. 아브라함을 추방시킨 이집트 바로 보다 더 관대한 이방 왕이었다.

이런 해피 엔딩의 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있다. 본래 거부인 아브라함은 아내가 두 번 탈취당한 사건으로 인하여 엄청난 축재를 한 결과가 되었지만, 선지자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아브라함은 이교도에게 창피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선지자성 신원을 밝히고 그를 두둔한다.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아내가 이교도의 첩이 된 사건을 통하여 막대한 재물을 선물로 받는다. 하나님 백성은 잘못하고도 재물을 얻는 묘한 축복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속였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헝클어진 늪지대 인간들에게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시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용서하신 것은 아비멜렉의 아브라함에 대한 용서에 매여 있었고,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향한 용서는 아브라함의 아비멜렉의 용서와 중보기도에 매여 있었다. 놀라운 이적이란 용서하고 용서 받는 하나님의 은혜의 현현에서 온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실패로 파괴되지 않는다.

온전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에 그 원인이나 시작에서만 거리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처리에서도 거리낌이 없게 한다.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급급한 것이 나니라, 자기로 인하여 상처 받은 사람에게 치유를 베풀고 감싸주는 일을 한다. 이것은 이방인들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의 파편들이다.

 

IV. 이교도들의 구원을 선포하는 고라 자손의 노래

반역죄로 천벌을 받은 고라 일당은 250명과 함께 땅 속에 묻혔다(26:10).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반역 기치에 동조하지 않아 죽지 않았다(26:11). 조상의 반역 업보 때문에 그 자손들은 사람들의 싸늘한 눈초리에 많은 고통을 당하며 눈물 골짜기를 통행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면서 거기서 찬양하며 눈물 골짜기를 통행하였다. 그들은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고 찬양한다(84:5). 그들은 조상을 잘못 만나 고통당하고 있다는 원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 전에서 봉사하면서 주옥같은 12편의 고라 자손의 노래를 남겼다.

그 노래 중에 하나인 시편 87편에 나오는 한 대목에 우리 마음을 빼앗긴다.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5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6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87:4-6).

놀랍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 선택 받은 자를 등록하실 때, 거기에 이스라엘의 이웃 이교도들이 대거 그 이름들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싸늘한 멸시의 대상인 이교도들이 하나님 백성의 생명책 등록부에 등재될 수 있다는 이 시가 함축하는 것은 열방 선교 개념도 들어 있겠지만, 하나님 도성으로 이교도들로 모든 열방을 대표하는 라합(이집트), 바벨론, 불레셋, 두로, 구스(이디오피아)가 들어간다는 것에 초점이 있다.

멸시 받은 자들에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이들의 이름은 하늘 생명책에 등재된다!!!

(이 글은 2012.2. 25에 게시한 글을 수정 보완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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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