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호 14:1-9
들어가는 이야기
작년 5월 19일 전 세계 이목은 영국 왕가의 해리왕자와 마클 사이에 성대한 결혼식 행사에 집중되었다. 이날 3년 연상의 이혼녀가 영국 왕실의 며느리로 들어갔다. 그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붙들러 온 노예였다. 시카고 성공회 흑인 감독 마이클 커리가 결혼식에서 전한 메시지에서 샤르댕의 말을 인용, 인간이 사랑의 에너지로 장착된다면, 세계 역사에서 두 번째로 우리는 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Love is the very fire and energy of real life! 사랑의 권능을 강조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호세아의 결혼이 떠올랐다. 호세아서는 확고부동하며 불변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고통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인간의 사랑은 변덕적이고 일시적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불변적이고 확고부동한 사랑에는 더 큰 고통이 따른다고 한 점이다. 호세아는 구속적 사랑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I.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A. 왜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하였는가?
우리는 2000년 전의 예수를 만나거나 본 일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 나가는 자세가 무엇인가? 수송아지를 끌고나갈 것인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씀 속에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B. 돌아오라(shub)
14:1-9은 호세아서 전체를 리뷰한 메시지다. 이스라엘이 돌아오라는 것이다. 돌아오는 방법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에 있다. 말씀은 9절의 “여호와의 도”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법도, 의의 표준이다. 민족의 기회가 급속하게 지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 의의 표준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율법과 제사의 두 기둥으로 지어진 집과 같다. 선지자들은 율법 말씀을 등진 패역(back turning)한 백성들에게 구원의 제사를 통한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돌아오라” 이는 회개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곧, 잘못 살아온 삶과 행동을 슬퍼하고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는 구약 선지자들의 반복적인 호소의 메시지이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대하 30:6; 아 6:13; 사 44:22 등등). 돌아오라(슈브)는 메시지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메시지이다. 아모스도 요엘도 예레미야도 이 기별을 목이 쉬도록 외쳤다. 호세아 역시 이 기별로 그의 애절한 호소를 끝맺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 회복하는 길을 먼저 제시하고 있다. 호세아의 최후적 호소이며 오늘 우리에게 향한 호소이다.
신약성경은 돌아오라는 말을 구체화시켜 회개하라고 한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용서를 준비하여 놓고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탕자의 아버지가 문 어구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듯이 기다리는 아버지(The waiting Father)이다. 십계명은 기다리는 아버지가 사랑으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계명을 범한 인간에게 속죄의 길도 제시하셨다.
C. 깨닫게 하는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이스라엘은 말씀을 등진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말씀을 잊어버린 정도를 넘어서 짓밟기도 했다. 설사 말씀을 지녔다 해도 그 말씀이 죽은 말씀에 불과했다. 말씀이 살아 있지 못하면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다. 말씀이 생명으로 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말씀은 깨달음의 책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照明(illumination)이라고 한다. 아침에 말씀을 펼 때 다시금 하나님의 비취심을 받고 깨닫는다. 무엇을 깨닫는가? 사랑과 생명을 깨닫게 한다. 말씀에는 생명과가 들어 있다. 8만대장경, 사서삼경이 아무리 심오하다 해도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말씀에만 사랑과 생명이 들어 있다. 말씀은 사람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말씀이 생명으로 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성경은 생명을 깨닫게 하는 책이다. 말씀을 읽을 때 빛이 임하고 지난 말 자기의 무지함, 어리석음, 죄됨, 미쳐 생각 못한 것의 심오한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바람이 부는 대로 넘어지는 갈대 같은 세상인심이다. 그것을 흔히 여론이라고 한다. 말씀을 깨달으면 그 말씀이 혼탁한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준다.
온 세상에 말씀이 널려 있는 듯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찾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말씀을 들어도 생명을 울리는 감동도 없고 감격도 없게 되어 버린 오늘 우리 시대에 오늘 나도 그런 한 사람에 불과할까 하여 두렵기만 하다. 말씀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자기 삶의 거울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말씀은 삶의 나침판이 되는데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기 십상이다. 참된 회개의 고백이 없는 말씀의 휴대는 말씀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II. 생명을 주는 말씀을 붙잡으라.
아버지께서는 비전을 주시고 계시를 보여주신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다. 따라서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내야 한다. 성령의 감동 역사가 있다면 말씀은 생명을 준다. 예수께서는 말씀이 되신다. 성령께서 영감을 주고 읽는 자에게 빛을 비쳐 주신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 역사를 통하여 말씀이 나온 것이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성경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구원론이다. 그리스도교는 참 생명을 찾는 구원의 종교이다.
유교경전이나 불교경전 등 타 종교의 경전들은 다 훌륭하다. 그러나 참생명을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생명을 말하는 책이며 생명을 얻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마귀도 신학을 이용하고 성경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 잘못된 신학은 독약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펼쳐지고 있는 책이다. 무궁한 하나님의 사랑이 엉켜 있는 메시지를 붙잡고 생명의 길로 돌아서라.
A.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함께 한다.
말씀에는 새 생명으로의 창조력이 있다. 반역과 불의를 제거하는 치유력이 있다. 수송아지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것은 회개의 기도, 입술의 열매를 가지고 돌아오라는 뜻이다.
“살리는 것은 靈πνεῦμα 이니 肉σάρξ 은 無益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靈이요 生命ζωή 이라”(요 6:63, 68-“영생의 말씀 ρηματα ζωης αιωνιου ”). 그리스도가 주신 진리 말씀들은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 말씀들을 믿음으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영적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요17:3). 요한은 고대 유대인의 주석이 지적한 대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준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묘사한(Midrash Rabbah, on Ex. 20:2, Soncino ed., 343) 맥락에서 예수께서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 “생명의 말씀”(행5:20)(τα ρηματα της ζωης)을 전했다. 생명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일컫는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1) 말씀은 온 세상과 내 인생길을 밝히는 구원의 등불(Lamp)이다(시 119:105). 구원의 등불은 성령의 기름을 통하여 타오른다. 성령과 말씀은 함께 간다.
(2) 말씀은 죄인의 영혼을 해부하고 병소를 도려내는 하나님의 외과 수술 칼이 된다(엡 6:17; 히 4:12). (3) 우리 옛 사람을 때려 부수는 망치가 된다(렘 23:29). 말씀은 부흥과 회개의 놀라운 일을 일으킨다.
(4) 말씀은 새 생명을 싹트게 하는 씨앗이 된다. 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은 집나간 아들이 집에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어온 편지에 대하여 어서 오라고 내건 노랑수건 표시와도 같다. 호세아 14장은 이 애절하게 펄럭이는 하나님의 노란 손수건을 말하고 있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동방정교회는 성령 중심의 신앙에 역점을 두고, 서방교회는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 신앙 체계를 선호한다. 우리는 말씀, 성령, 예수 아버지 이런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먼저 말씀은 성령과 함께 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다. 말씀을 성령께서 비쳐주실 때 생명의 양식이 된다.
말씀을 제켜 둔 성령운동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신비주의자들은 체험을 강조한다. 그들은 체험 없는 신앙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과연 그럴까?
요 10:35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elohim)이라 하였거늘->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요 1:1-3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수준으로 끌어 올려가는 맥락에 있다. 인간을 엘로힘이라고 할 때 시편 82:6 문맥상 중하나님의 뜻을 전하거나 그 뜻대로 일해야 하는 특별한 책무를 지닌 지도자들이나 대언자, 선지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티를 잡고 흠을 찾는 유대인들에게 당신 자신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것이다. 말씀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다. 우리는 과연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신으로 살아가는가?
실존주의에서는 만남을 강조한다. 만남을 추구하는 철학사상이나, 성령운동이나 신비주의 운동은 말씀을 하위에 둔다. 그러나 말씀 중심의 신앙--이것이야 말로 성경 신앙의 핵심이 된다. 20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성경을 통하여서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강조한다. 거기에 생명이 담겨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B. 온 성경은 우리를 찾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오실 그리스도를 표상으로 증거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복음서는 오신 그리스도의 행적과 교훈을 설명하고 여러 서신들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설명하는 설명 계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온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 분을 확인하고 보고, 느끼고, 알게 되어 감격한다.
C. 중세가 암흑시대인 이유
1260년 간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지만, 뛰어난 지성들의 활동도 있었으며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꽃 피웠다. 찬란한 문명도 있었다. 그런데 왜 암흑시대라고 하는가?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설교하고 기도하고 찬양하여 말씀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져 복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여 어둔 암흑시대가 되어버렸다.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이 가려졌다. 말씀을 등진 문화와 문명, 종교와 교회는 어둠에 빠지게 된다.
중세는 RC가 권력을 장악한 시대이다. 중세는 참 교회에게 피와 눈물과 고뇌를 요구하는 혹독한 시대였다. 하나님의 교회가 포로로 잡혀 있던 시대였다. 중세는 무지와 미신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 왈덴스족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중세교회는 성례전 중심의 교회였다. Vatican II 이후 각 나라의 RC는 자국어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도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성경연구도 하락하였다. 그러나 그 성경연구는 진리를 왜곡시키거나 짓밟는 것으로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예컨대, 2009년 2월 초순 가톨릭 인기 스타인 가톨릭대 교수 차동협 신부와 문리학계의 거두 서울대 장희익 교수의 대화(진화론)>에서 성경의 창조기사를 피카소의 그림에 비유하고, 문자적 창조론 신봉자를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하며, 교황이 진화론을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직도 RC는 성례전 중심의 교회이다. 중세는 교권이 말씀을 짓누른 시대이었고 이것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교회의 권위가 말씀의 권위를 압도하는 체제가 아직도 세상을 휘여 감아 가고 있다.
III. 본문의 역사적 배경
A. 번영의 시대--아모스는 정의의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세아는 하나님의 확고하고도 무한하신 사랑의 고통을 25년간 전하였다. 호세아가 말씀을 선포하였던 BC 8세기는 여로보암 II 세가 41년간 나라를 통치하면서 북방 이스라엘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번영 중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갔다. 우상 숭배가 만연하였다.
B. 우상숭배 만연의 시대
1. 경제적 풍요 속에서 백성들은 우상 숭배로 빠져들어 다가오는 위기를 간파하지 못하였다. 잘 산다는 것과 우상숭배 한다는 것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2.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다 우상이 된다. 인간 이성, 과학, 이데올로기, 물질--이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패역한 중에 죄악적 생활을 계속하였다.
“우리 시대에 성행하는 정신은 불성실과 배도의 정신이다. 곧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졌으므로 스스로 빛을 발하노라고 공언하나 실제로는 가장 참람되게 행하는 정신이다. 인간의 이론은 높임을 받아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진다. 사단은 남녀들로 하여금 불순종하도록 유혹하는데, 그는 그들이 불순종한다면 그들을 신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반대되는 정신 곧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지혜를 우상처럼 높이는 정신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세상 풍습과 감화에 순응함으로 말미암아 저희 마음이 어두워지고 혼란해져서 빛과 어두움과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의의 길에서 매우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소위 철학자라고 부르는 몇몇 사람의 의견을 성경의 진리보다 더욱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의 탄원과 약속,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등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마음을 녹이기에 무력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이 행사한 신앙을 현대 사상가들의 지식에 비해 구식이요 신비스럽고 쓸모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선지, 178)
3. 정치적, 군사적 동맹에 혈안이 된 시대
14:3 아시리아가 어찌 우리를 구하겠습니까? 우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아니하고(전쟁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손으로 만든 것 보고 우리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우상 포기). 하느님 외에 누가 고아 같은 우리에게 어버이의 정을 베풀겠습니까?"
정치적, 군사적 동맹이 우상시 되어 오로지 그것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 시대의 화두를 버리라는 것이다. 대통령도 민중들도 레밍 쥐들처럼 촛불을 찬양하고 낭떠러지로 달리는 시대에 살면서 국가 체제 자체를 전복시켜 무신론 체제 국가들과 결탁하고자 하는 시대이다.
B. 호세아의 비극적인 결혼
이런 비극적 시대상을 호세아의 결혼 이야기가 보여 주고 있다. 호세아의 결혼을 꿈이나 환상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혹자는 문자적 이해가 하나님의 품성과 맞지 않아 알레고리나 비유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적, 자서전적인 줄거리로 본다. 제사장은 창녀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레 21장 기사 때문에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할 때는 아직 창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한 시대, 한 나라가 파탄의 낭떠러지로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에스겔에게는 아내가 죽는 쓰라림을 보게 했다. 호세아에게는 배신 때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고통스런 극약처방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호세아의 결혼 배우자를 행실이 부정한 고멜로 지정한 일에는 하나님의 고통이 있고 눈물이 있다. 첫 아들 이름을 ‘이즈르엘’이라고 한 것에서처럼 “하나님이 흩어 버려야” 마땅한 존재들이다. 둘째 딸 이름을 로루하마(긍휼을 얻지 못한다)는 존재들이다. 셋째 아들 로루하마(내 백성이 아니다)로 명명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호세아 선지자가 창녀와 결혼하여 다른 사람의 씨를 탄생시킨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신부가 되어야 하는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 신을 섬기며 낳은 자식들을 빗댄 것이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이 비극적 결혼 이유는 배도한 이스라엘에 향한 구속의 메시지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진실된 남편의 사랑에 배신을 때리며 다른 남자 품으로, 그리고 남의 씨까지 낳는 아내 고멜이다. 예언자에게 쓰라린 고통을 체험케 한 하나님은 사랑을 등진 이스라엘 이야기는 오늘 우리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오늘 이 나라의 모습을 비춰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점을 다 이해할 수 없다.
C. 호세아의 애소의 메시지 --돌아오라,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호세아는 말씀을 등진 이 패역한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기별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결여 탓이라고 한다(4:6). 그 결과 온갖 부도덕과 죄악이 난무한다(4:1-2).
비록 백성들의 범죄로 인하여 징계할지라도 끝내는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전한다. 선지자 호세아에게 고멜에게 결혼하라고 한 것처럼 음란하고 추악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차마있을 수 없는 일들을 일삼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당신의 신부로 맞이하시고자하는 기별이 사랑의 책, 생명의 책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한다.
IV. 말씀을 가지고 돌아 온 사례들
성령의 강한 역사는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하여 온다. 그래서 호세아는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한다. 은혜의 방편들에는 말씀, 성례전, 기도, 찬양 등이 있지만 확실하게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은, 회개하는 일은 구원 받는 길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다.
A. 가이사랴의 고넬료
행 10:1, 22 로마 장교 고넬료는 경건하게 하나님 경외하고, 온 가정이 신앙하며, 구제하는 일에 열심 있는 의인이었다, 그는 환상을 보고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았다. 지도력과 학식이 많은 고넬료가 어부출신이고 학식도 신통치 않은 베드로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넬료: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말씀을 듣고자 베드로를 초청한 결과 성령께서 강림하셨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 말씀으로 봉사할 때 성령이 강림하신다. 말씀은 성령강림의 방편이 되신다.
B. 요시아의 부흥운동의 기초는 말씀의 발견과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에서 나왔다(대하 34장).
C. 에스라 느헤미야의 운동은 말씀에 토대를 둔 운동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 8:8-9).
E. 오순절 운동은 말씀 운동이다. 사도행전 2장 다락방에서 말씀을 연구하고 감동 받았을 때 성령의 감동이 있었다. 성령 강림 시 말씀 선포가 일어난다.
F. 바울의 최후 당부
바울은 자기의 마지막 순간을 생명과 사랑의 메시지를 붙잡는 일로 마무리 하고 싶었다.
그래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성경)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LXX)을 가져오라”(딤후 4:9-13)고 했다.
추운 겨울 토굴에서 떨면서 입었던 가죽 옷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마지막을 하나님 말씀의 약속에 자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두고 말씀의 진리에 담긴 생명을 확인하고 감격하기 위하여 성경을 가져오라고 당부하였다. 사랑과 생명의 말씀에 생명을 건 바울의 이 말씀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모본이 된다.
G. 재림교회는 책의 백성들이다. 재림교회 탄생은 말씀 연구에서 나왔다. 모든 교리는 말씀 연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재림교회 초창기 결성 시 같지 않는 여러 교단으로부터 나온 분들이 밤낮없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기도로 그 터전을 놓았다. 한국 개신교는 1907년 부흥운동이 1904년 원산에서의 선교사들의 말씀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낮 사경회와 밤 부흥회로 이어진 사건이 토양이 되어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고 하며 그 때 그 부흥운동으로 돌아가자고 강조하여 왔다.
V. 결론 - 말씀을 가지고 돌아 온 자에게 주시는 축복
A. 패역(반역)을 고침 받는다(4절).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 죄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인간의 지성, 개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 세대의 삶의 원리란 패역이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고치다”는 치료 받는 것, 용서받는 것, 소성함을 받는 것이다. 환난, 질고, 고통은 인간의 패역을 고쳐주는 하나님의 허용적 방편들이 된다.
공동번역--14:2-3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 야훼께 돌아오너라. 모두 야훼께 돌아와 이렇게 빌어라. 못된 짓을 하다가 쓰러졌지만, 모두 야훼께 돌아 와 이렇게 빌어라. ‘비롯 못된 짓을 하였지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이 입술로 하느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애원하면 하나님은 은혜스러워서 자기 백성이 한 번도 결코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보신다. 그리고 자기 외 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v. 2)-- 심령의 회개하는 입술을 제물 중에서 가장 큰 수송아지 보다 더 중요한 제물로 보신다. 이스라엘은 나를 배신하였다가 병들었으나, 나는 그 병든 마음을 고쳐주고 사랑하여 주리라. 이제 내 노여움은 다 풀렸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의로 입히시고 우리가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를 받으신다(SC 67). 그리하여 죄인은 새 생명으로 탄생한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1-62).
신자의 이력서가 아무리 찬란하여도 한 순간에 베드로처럼 모든 것이 무너진 경험을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키셔서 초기 교회의 찬란한 지도자로 삼으셨다.
B. 성령의 풍성한 축복이 따라온다.
말슴을 가지고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생기를 주는 하늘 이슬로 다가오신다. 성령의 “이슬”로 임하시어 아름답고 청청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로 성장하고 열매가 맺히게 하신다. 아름다움과 순결로 짙은 향을 토하는 백합화 같은 축복을 주신다. 성전 및 다른 건축에 유용한 견고한 재목이 되도록 성장케 하는 레바논의 백향목이 되게 하신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과일의 면류관으로 알려진 감람나무처럼 식용 열매를 제공하고, 빛을 내게 하는 기름을 내는 존재가 되게 한다. 인간에게 최고의 식품 잣나무 열매같이 되게 하신다. 이렇게 풍성한 축복으로 넘친다. 메시야 왕국의 백성으로 새 생명의 기쁨이 넘치고, 마음에 하늘 사랑이 용솟음친다.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갔다. 이젠 무섭지 않다. 단잠이 온다. 영광의 그 나라를 기다리면서 은혜의 나라 시민답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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