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철수 예고와 하나님의 근심
성령 철수 예고와 하나님의 근심
“나의 靈이 永遠히 사람과 함께 하지(통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肉身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百二十 年이 되리라 하시니라”(6:3).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 하리니(shall not strive)"는 '그가 사람들과 다투거나 설득하지 아니할 것이다'를 뜻한다. “함께 하다”(NKJV에는 “애쓰다<strive>”로 번역)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다스리다”, “심판하다”의 뜻으로, 통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당대의 인간들은 정욕의 포로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배척하여 성령께서 비집고 들어가 권고할 없어져 버렸다. 성스러워야 할 혼인제도가 무너져 내렸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포악스런 자들인 네필림들은 성령이 더 이상 역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성령께서는 집요하게 회개를 거절하는 인류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도 곧 끝나야만 했다. 베드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사단에 포로된 이들(베드로는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함)에게 전파했다고 말한다(벧전 3:18~20). 이 세상은 창조 시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아름답고 선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그들이 肉身(basar)이 됨이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면서 죄된 욕망에 포로가 되어 버린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굴복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더 이상 성령이 계실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들이 거룩한 감화에 완전히 무감각해져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은 떠나게 된다. 그들을 제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없게 된다. 홍수 전 사람들로부터 성령께서 철수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날”에 관한 예언을 하시므로 아직도 인내하시는 유예의 시간대를 주셨다. 홍수 때 까지 120년간은 자비의 시간대, 은혜의 시간대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罪惡이 世上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計劃이 恒常 惡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恨嘆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본문은 인간의 마음, 곧 “계획” 혹은 생각과 행위 가운데 악이 극도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거의 예외 없이 사악하였다.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고 몇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사회가 전면적으로 사악했다. 이런 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러 잊으려”(벧후 3:5)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한탄(nakham)”했다는 말은 이어져 나오는 그분의 마음이 “근심했다(‘astab)”는 해설에서 그 진의를 엿볼 수 있다. “한탄”은 기쁨의 반대어이다(느 8:10). 하나님의 한탄은 그분의 예지력의 부족이나 그분의 본질 또는 목적의 가변성을 전제하는 표현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결코 무엇을 후회하지 않는 분이시다(삼상 15:29). 하나님의 “한탄”은 인간의 죄악으로 야기된, 거룩한 사랑의 고통을 나타내는 은총과 위로의 표현이다. 이 nakham의 어근의 기원은 '깊이 숨 쉼' 따라서 사람의 감정, 주로 슬픔, 동정, 위로의 육체적 표출이라는 개념을 반영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불변성을 유지하시면서도 멸망해가는 변화된 환경과 관계에 적음, 대처하시는 은혜로운 자비와 위로, 및 구원의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진리를 이렇게 나타내신 것이다. 인간의 타락상으로 인한 하나님의 비탄에 관한 언급은 하나님이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감동적인 암시도 된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은 슬픔과 연민으로 채운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죄짓는 인간들에게 따르는 보응을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연민의 바다를 온통 끓어오르게 한다(렘 18:6~10; PP 630).
근심하는 아버지 이야기
<예언의 소리> 부장인 분스트라 목사의 딸이 외과수술 날짜를 잡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의젓하고 활달하던 아이가 달력에 표시된 수술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의기소침하여 지며 풀이 죽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인 나는 딸이 갈수록 침울해져 가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딸은 수술 받았을 어땠느냐고 여러 번 물어 왔다. 아버지인 나도 지나간 삶을 통하여 여러 번 수술을 받았던 일을 상기시키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아무도 수술 결과를 예단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이 수술실에 실려 갈 때, 이야기를 하였지만, 딸의 수술을 앞 둔 아버지의 길을 처음 당하고 있어서 나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였다.
사실상 나는 딸이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딸을 마취과 의사에게 인계한 다음 100%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모란 없다. 수술 날짜가 드디어 이르렀다. 나는 근심 걱정으로 위통을 앓아 딸을 배웅할 수조차도 없었다. 인간 아버지도 이럴 진대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철수시키며 홍수를 예고하였을 때 그 심정이란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하늘 아버지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런 심정을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恨嘆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말씀에서 읽어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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