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

 

본문: 왕상 18:1-15

Scott Peck <끝나지 않은 여행(아직도 가야할 길, Road Less Traveled)>” 이란 작품의 시작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것은 삶은 곤란하고 고통스럽다(Life is difficult") 라는 말이다. 삶의 현장은 싸움터이며 문제덩어리들로 차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탄식하거나 애통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곤고한 상황에서도 문제들을 풀어간다.

인생은 끝 날까지 선택이다. 선택의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어느 곳에든지 선택의 기회가 있다. 감사도 선택이다.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선택할 수 있다. 이제는 끝났다고 하지 말라. 역경은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불가피란 없다. 불행도 또 다른 축복이 될 수 있다. 역경을 기회로 선택하라. 행복이란 우연이 오는 것이 아니다.

난세나 험난한 시대에는 신앙을 지키기가 어렵다. 이럴 때 사람들은 새 시대를 열어 갈 새 인물을 기다린다. 비록 통치자가 악한 독재자라 할지라도 어려움을 한탄하고 신음하는 대신, 문제를 풀어나가 새 시대의 물꼬를 터주는 사람이 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그 이름은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을 지닌 오바댜이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에서 아합 왕 一人之下 萬人之上 지위에 있는 총리쯤 된다. 아합과 이세벨이라는 사악한 왕 부부의 휘하에서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넘보는 요직에 실력과 신망이 없는 사람이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내 이세벨에게 휘둘리는 아합은 악한 왕이었지만 아직은 휘하에 탁월한 인물을 두는 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폭 보스도 성실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을 제2인자에 앉히는 법이다.

사악한 자의 휘하에 들어가 일한다는 것은 그 사악한 자의 통치철학이나 정책 방향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니 타협하지 않고는 배겨날 도리가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빗나간 정권의 각료가 되어 권력에 동조하거나 아첨하는 것을 보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오바댜의 공직생활을 두고 상황 윤리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상황윤리란 무엇인가? 인간의 행위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만일 사랑이 동기가 된다면 그 모든 행위는 죄가 안 되고 용납될 수 있다는 윤리이다..

그러나 아합왕도 오바댜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돌이킬 수 없었다(PK 138). 그는 상황 윤리 같은 보호색을 입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시대에 여호와를 크게 경외하며 신실과 인내로 살아가면서 역경을 기회로 삼았다. 그에겐 절망은 없었다.

 

II. 시대 분위기

1. 가뭄의 원인--가뭄은 많은 사람들의 사악한 죄와 한 사람의 기도의 결과였다. 바알의 제사장들, 아합, 이세벨,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악행에서 원인을 찾지 않고 재앙 원인으로 오로지 엘리야를 지목하고 그를 비난하였다. 아합은 주변 각 왕국과 민족들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찾으러 보냈으며, 왕국들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그들이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다. 엘리야는 하늘을 잠그고 그 열쇠를 갖고 사라져 버려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숨긴 자를 인간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2. 선지자들 살해--이세벨은 제정신을 잃고 광기로 가득 차 엘리야를 찾아 죽일 수 없어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로 보복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공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시대로 진입하였다. 바알의 제사장들과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인다면 재난이 사라질 것이라는 거짓 선전에 기만을 당하였다.(3T 276).

 

3. 백성들의 마음에 이는 의혹 그리고 하나님 신앙의 준비엘리야는 그릿에서 6개월, 사르밧에서 3년 가까이 보냈다. 4년째 접어들면서 대중들이 뭔가 속고 있다는 점을 느끼기 시작할 때였다. 바알 사제들의 기도는 가뭄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굶주린 가난한 자들의 시신이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갔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등진 것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비록 느렸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설 준비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조건적이다(28: 15, 23, 24).

이 때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왕상 18:1). 엘리야는 주저 없이 단호한 심경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옮겨 사르밧 과부집을 떠났다.

 

4. 오바댜와 엘리야의 만남

지도층 양식은 애굽에서 차관으로나 또는 원조품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물이 문제였다. 아합 정권은 백성들보다도 왕궁의 짐승들을 위한 초장과 물을 찾는 일에 급급하였다. 왕과 총리는 각각 수원을 찾아 나섰다. 오바댜가 수원을 찾아가다가 엘리야를 만난다.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닌 섭리적인 그리고 필연적 만남이었다.

오바댜는 엘리야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오바댜는 약 3년 반 전 왕궁에 나타나 선언하고 떠나간 엘리야를 잊을 수 없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가서 아합에게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전하라고 한다. 오바댜는 그 동안 근본 문제는 엘리야가 다시 나타나 큰 판을 벌여 사태를 해결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두 사람은 조우하게 된다. 엘리야를 숨기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또 엘리야를 어디로인지 빼돌리면 자기만 죽게 된다는 참혹한 결과를 호소하면서 선지자를 확실하게 붙잡는 간청을 한다. 여기서 그는 엘리야에게 자기 신앙 고백을 한다. 그리고 엘리야의 확답을 얻어낸다.

 

III. 오바댜의 신앙 인품 평가 척도 세 가지

1. 어려서부터 섬긴 하나님-“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왕상 18:12).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왕상 18:3).

그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이다. 본문은 이 오바댜를 두고 지극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왕상 18:3)라고 하고 있다. 이는 오바댜의 고백이 아니고 성경 기자의 평가이니만큼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지극히 (meod)있는 힘을 다하여라는 의미이다(왕하 23:25 ‘힘을 다하여’). ‘극진히“(대상 16:25)의 뜻도 들어 있다. “경외(yare)”는 두려워하는 태도, 곧 거룩한 두려움을 뜻한다. 곧 자신의 무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인간이 사랑과 두려움, 및 감사로 엉켜진 거룩한 두려움이다.

오바댜는 신앙의 기본기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1:7; 9:10)라하고 한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성경 한 구절은 일천 마디의 인간적 관념이나 변론보다도 더 큰 가치가 있다. 경외함으로 심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는 오바댜의 전신에 활력과 힘이 될 것이다”(참고, 3보감, 110-111). 어떤 면에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공부하는 것이 더 쉽다. 또한 학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어렵다. 성경연구도 경외를 위한 수단이다. 오늘날 이 수단만 강조하는 일이 너무 많지 않나 한다. 성경연구를 강조하는 시대는 그만큼 경외가 없다는 뜻도 된다. 어떻게 이런 평가가 가능하였을까? 아무리 사악한 구조악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신심이 돈독한 자를 내세우시며 일하신다. 아합 궁에서 성도는 그 어느 곳에서든지 성도가 될 수 있다. 오바댜는 다니엘이나 요셉과도 같은 신앙의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KJV에는 “from my youth”라고 번역하고 있다. youth는 십대에서 20대 초반을 두고 사용하는 어구이다. 즉 청소년 때부터 하나님을 신실하게 경외하였다고 고백한 것이다. 너희는 나의 말을...자녀에게 가르치며 (11:18, 19). 물론 유년기도 뜻한 말이다(삼상 1:24).

궁 밖에는 엘리야가 거대한 개혁의 횃불을 들고 있었고 궁 안에서는 오바댜가 온갖 악정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어 있었다. 아합왕도 오바댜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돌이킬 수 없었다.(PK 138).

2. 신앙인들 네트워크 구축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 인을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왕상 18:13)

위험한 일을 장기적으로 혼자서 하는 것은 어렵다. 소수 믿음의 근육이 튼튼한 동지들의 협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관이 직접 하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산안의식이 투철하여 영성이 강하고 경건한 친구들이 있어서 물과 밥을 날려 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고지에서 혼자 승리하며 살 수 없다. 화려한 싱글은 없다. 신앙인들의 네트워크 울타리가 있어야 칠흑같이 어둔 시대의 파고를 넘을 수 있다. 엘리야는 자기만 남았다고 성급하게 판단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바댜를 통해 비밀 네트워크를 통하여 선지자 생도들을 양육하고 있었으며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과도 연결된 체인망을 두었다. 교회를 해산시킨 일제 말엽 오바댜 같은 이들을 통하여 적목리, 지리산, 태백산에는 재림신도들을 키우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4:8-12).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안 된다. 화련한 싱글들(singles)의 화려는 화()()가 되기 쉽다. 멋있는 화려도 있지만, 그러나 혼자서 사는 일은 어렵고 외로우며 위태롭다. 가장 타락한 권력의 본거지에서 오바댜는 이 참 신앙의 남은 무리의 지원을 받아 100명을 살려 내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3. 하나님의 소명을 지켜 내는 일

(1) 소명(calling)이란 무엇인가? 성직자만 소명 받는가? 엘리야만 소명 받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바댜의 모델을 역사적으로 사용해 오셨다. 세상에 일터를 두고 있는 평신도, 또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22:14). 엘리야와 오바댜는 부름에 응하여 택함을 받았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은 성직에만 국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직과 세속적 직업에 종사하는 모두를 부르시고 택하시어 일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소명)과 직업은 모두 calling이라는 같은 단어로 표현한다. 직업은 소명이다. 그래서 천직이라고 한다. 이런 소명 바탕에는 참 신앙이 깔려 있다. 소명이란 하늘이 열리고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1:51). 진리에 나를 옭아매고 이 토대 위에서 삶을 사는 것, 여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 소명이다. 엘리야도 이 소명을 따라 움직였고, 오바댜가 국사를 통할할 때도 이 소명에 따라 섬김으로 택함을 받았다.

 

(2) 현대판 오바댜들--현재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일이며, 소명이다. 세상 직장을 다니는 분들은 현대판 오바댜들이 되어야 한다. 불신 상사나 사악한 윗사람 아래서 일하는 것은 괴롭기 마련이다. 직장에서 회식 때 나쁜 상사가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떤 분은 술잔을 거절하자 따귀를 10여 차례 맞고 며칠 동안 집에서 곱씹으면서 괴로워하다가 하나님이 파송한 자리라는 성령의 깨우침을 받고 다시 출근했다는 사람도 있다. 불의한 상사가 불의를 요구할 때를 이겨내야 하는 상황은 오바댜만 당한 것이 아니다. 아합 왕이 오바댜를 어쩌지 못하였듯이 세상 직장 상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어쩌지 못한다. 다니엘과 그의 3친구들이 돼지고기 식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식단을 취하였을 때, 그들이 10배나 뛰어난 것은 지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감싸주어서였다. 위험하고 곤혹스런 시대에 하나님이 개입하시어 자기 백성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아합과 이세벨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주변 나라 족속들에 이르기 까지 엘리야를 찾았다. 무당들을 불러 우상 건립운동을 하면서 계속 탐색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더러운 세상에서 버텨 내기는 쉽지 않다.

 

(3) 엘리야와 오바댜 비교--엘리야는 설교 한번 하고 그릿 시냇가로 도망하여 안전하게 살면서 고기도 떡도 들었으며 사르밧 과부 집에 안전하게 은거하였다. 오바댜는 날마다 악한 왕으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어느 쪽이 버텨나기가 쉬웠을까? 국정의 실제 책임을 지고 있는 오바댜이지만, 악한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가 국정 통할자가 된 것은 권력에 탐이 나서였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냈다는 확신, 즉 소명 때문이었다.

 

(4) 성경에는 두 그룹의 하나님 백성들이 나온다. 한 그룹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불러 일을 시키는 선지자 그룹이다. 다른 그룹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은 없지만, 일반적인 부르심에 따라 믿음대로 근실하게 살아가는 그룹이다. 이 두 번째 그룹에 속한 자들이 7000명이나 된다(왕상 19:18). 그 중에 오바댜도 들어간다. 그들은 계시도 영감도 받지 않은 평범한 신자 군에 속한다. 그들 중에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 않을까? 오바댜는 엘리야 보다 더 고생스러운 자리에서 믿음대로 돌파해 나갔다. 아합 권력이 하나님 사람들을 색출 작업하여 나갈 때 오바댜는 고위직 자리를 내 던지고 싶었을 내면적 갈등을 겪으면서 버텨 냈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에 타들어가는 대지만큼 오바댜 마음도 타들어갔고, 고통스런 밤을 수없이 보냈을 것이다. 어렵지 않은 직장이 없을 것이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직장이라도 속에는 문제투성이들뿐이다. 그러면서도 월요일에는 일요일 또는 월요일에 출근하는 일에는 복음 선교사 직분도 들어 있다. 하나님이 계획이 있어서 파송한 자리를 지켜내며 하나님 뜻을 구현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소명에 속한다. 아합을 바라보고 각료 생활을 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것이다.

100명의 선지자들을 살려 내는 일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잠시 동안은 가능한 일이었다 해도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발각될 일이었고 그 일로 파직은 물론이고 생명을 바쳐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라고 파송한 것이다.

 

(5) 대 쟁투--오바댜는 문제 해결의 실 머리를 엘리야와 아합을 대결 시켜 영적 대 전쟁을 하는 것에서 찾았다. 그는 내 주여(adonai)”(18:7)의 표현에서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자로 인정하였다, 온 나라의 운명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고백한 표현이다. 싸움의 본질은 자기와의 싸움이나 아합과의 싸움이 아닌 영적 전쟁으로 보았다. 왕과 엘리야를 그 방향으로 유도 하여 갈멜산 대결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여긴 오바댜는 이 대결을 계획한 장본인이었음직하다. 그는 싸움의 본질은 아합과의 대결이 아니라, 악령들과 흑암의 세력들과의 전쟁으로 보았다. 그의 마음에는 대쟁투적 사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불의한 세력과의 최후적 영적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비를 전망한 것이다.

 

IV. 호소

하나님은 위험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오바댜를 살려 내고, 엘리야로 아합을 만나게 하는 일을 주선케 하였다. 결국 그는 갈멜산 대결로 이끌어 내는 정지작업을 다했다. 그는 엘리야에게 새 역사의 개혁의 지평을 열게 하는 길을 예비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십자가에서 살려내시고 참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육과정을 거쳐 사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 백성들은 오늘도 선과 악의 대결 속에 서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호와를 크게 경외하는 평범한 신자들을 부르고 계신다. 악의 물결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며 100명을 살려내는 시대의 남은 무리 네트워크와 함께, 신앙을 지켜 내고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해 나가야 한다. 어려서부터 믿음과 기도의 동료들과 더불어 새 시대를 열어가는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을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악한 상사의 잔혹한 신앙 말살정책을 돌파하는 이 시대의 오바댜 종들을 찾고 계신다. 재림신도들은 새 시대를 여는 오바댜처럼 여호와의 종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 글은 어제 4월 6일 안식일 남양교회 봉헌예배에 참석한 후 올린 글입니다.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퇴직금을 바쳐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거기에 아담한 교회당을 건축하는 일에 신명을 바친 홍 장로 내외분의 교회 건축 역사에 얽힌 신앙간증을 감동 깊게 듣고 홍 장로야 말로 이 시대에 오바댜의 모델에 비견할 수 있는 분이라고 보아 오바댜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게재한 것입니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