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로이 (El-Roi) The God who sees
엘 로이 (El-Roi) The God who sees
창 16:1-16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한 방법으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제안하였다가 인정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15:2). 아브람의 회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아브람 나이 85세, 사라 나이 75세가 되었다. 약속이 주어진지 10년을 기다렸지만 이루어지지 않아 아브람은 다시금 회의심의 수렁에 빠진다(16:3). 그는 당대의 일반적 관행이었던 대리모 제도를 통하여 자기 몸에서 태어날 자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I. 본문 단락 구도
16장은 두 부분과 결론으로 구성되었다.
1-6절 평행 구조
A 사라의 제안(1-2a절)
B 아브라함의 동의(2b절)
C 사라의 행동(3절)
D 하갈의 반응(4절)
A' 사라의 제안(5절)
B'아브라함의 동의(6a절)
C' 사라의 행동(6b절)
D' 하갈의 반응(6c절)
7-14절의 평행구조
A 여호와의 사자가 샘 곁에서 하갈 발견(7절)
B 여호와의 사자와 하갈의 대화 (8-9절)
C 여호와의 사자의 첫 번째 예언 (10절)
C' 여호와의 사자의 두 번째 예언 (11-12절)
B‘ 하갈의 반응(13절)
A' 하갈이 샘을을 브엘라헤로이로 명명(14절)
결론: 하갈의 아들 탄생(15-16절)
II. 1-6절 사래와 아브람
1절- 하갈의 정체
사래는 아브람의 정처가 되고 하갈은 사래의 하녀이었다. 하갈은 애굽 출신 외국인이었다. 바로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하갈 Hagar은 애굽 이름이 아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하갈은 (hagger “외국인” 음성과 유사하다. 아랍어로 “도망”의 의미를 가진 하갈이라는 이름은 여주인으로부터 도망간 후에 주어진 이름일 것이다. 두칸 박사가 인용한 미드라쉬(Midrash)에는 하갈이 바로의 딸로 나온다. 그리고 바로가 자기 딸이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는 것보다 아브람 집에서 시녀가 되는 것이 더 좋다고 보았다(Gen Rab. 45:1).
사래는 애굽에서 거의 종처럼 비천하게 되어 수치를 당한 곳이다. 바로는 그 대가로 하갈을 주었다. 그래서 하갈은 장차 출애굽의 어둠침침한 전망과 연관되는 인상을 풍긴다.
2-4절 사래의 제안
하나님의 상속자 약속 실현을 10년 동안 기다려 왔던 아브람과 사래의 믿음이 이제 무너져버렸다. 그들은 상속자의 출생이 지체되는 것을 참지 못한 것이다. 아브람은 그 지체됨이 자기의 믿음을 시험하고 품성을 계발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래가 주도한 남편과 대화에서 자기의 상황을 설명하며 비 신앙적 대리모 제안을 정당화시키는 내용에는 하나님을 비난하는 어투가 묻어 있다. 사래는 자신이 아이를 가질 희망이 없다는 믿음 없는 결론을 내리고, 가족의 상속자를 얻기 위하여 당시 그 나라의 관습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법전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가 그 여종 중의 하나를 남편에게 주어 그를 통하여 아이를 얻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 제안의 특성은 먼저 일종의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이 성취시켜야 한다는 논리일 것이다. 이는 신앙이 결여된 제안이다. 그리고 “或 그로 말미암아 子女를 얻을까 하노라”(2절)에서 보듯이 자기 책략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 NKJV에서 한 번역 “아마도”는 되기를 바란다는 표현일 것이다. 인간의 무모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탄생을 두 언약으로 비유적 투시를 하여 그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갈 4:21-31). 여종 하갈을 통하여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이스마엘은 율법의 행위 아래 기속된 인간의 성취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하는 여자 사래를 통하여 태어난 이삭은 약속을 통하여 성령에 따라 난 자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자유하는 것을 대표한다.
3절에서 사래가 “그 女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男便 아브람에게 妾으로 준” 본문에서 드러난 것은 사래가 하갈을 아브람의 아내라는 신분으로 격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첩”은 잇샤(ishah)로 ‘아내,’ ‘부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래는 이후 하갈을 몸종의 신분에서 부인 또는 첩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 선물, 그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임시 대리모 정도로 국한시켜 버린 것이다. 사래는 당대의 사회적 관행을 따른 것뿐이었다.
아브람은 하갈을 취하였다. 그 이후 일은 사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갈은 잉태를 하자마자 사래를 멸시하였다. 즉, 하갈은 사래를 보잘것없는 여자로 경멸하였다. 하갈은 자신을 사래와 동격의 부인으로 여김에 따라 사래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는 하갈이 당대에 여자가 잉태 못하면 치욕이 되고 다산을 신의 은총으로 보았던 시대 분위기에 편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5-6절 사래와 아브람의 둘째 대화
사래는 자기가 당한 모욕(khamas)을 남편이 받아 마땅하다고 분노를 표출하였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기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이 부당한 불법에 대한 책임이 남편에게 있으며 이런 불법을 시정하는 것도 그의 남편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나의 부당함은 당신에게 이른다(혹은 올라간다)'로 번역할 수 있다. NIV는 '당신이 내가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한 책임이 있다'로 번역했다."女종을 當身의 품에 두었거늘" 에서 아브람이 하갈을 껴안는 행위를 두고 무죄 사건 이상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사래가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하는 이유가 된다.
“여호와께서 내 出産을 許諾하지 아니하셨으니”(16:2)에서 사래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하나님이 사래에게 이야기 한 일이 안 나온다. 이는 사래의 삶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재하다는 뜻이 된다. 아브람은 자기의 죄책을 덮고자 “當身의 女종은 當身의 手中에 있으니 當身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行하라”(6절)고 한다. 하나님과과의 관계가 결여되는 때 폭력이나 압제가 파생하기 마련이다.
하갈은 자기변명이나 방어를 취하지 않고 대결을 회피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래서 “사래 앞에서 逃亡(hadjara)하였다”(6절). 이 행위에서 앞에서 지적했듯이 하갈 이름에 “도망,” 또는 “이주”라는 의미가 부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학자들은 아라비아어 "Hejira"가 이 본문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III. 16:7-16 여호와의 사자의 내방
16:7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사자(Mal'akh YHWH, the Angel of the LORD)"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 58회 나온다. 그 중 창세기에서는 6회 나온다. 이 독특한 칭호는 성경에서 여호와를 두고 사용되고 있다(18:1, 13, 22; 삿 6:11-22; 13:3-22; 출 3;2, 4, 6-7). 스데반은 그 천사를 하나님으로 단정 짓는 해석을 하였다(행 7:30-34, 38.) 이 여호와의 사자는 구속자로(창 48:16), 구주로(창 22:11; 시 34:7-8), 그리고 중재자로(슥 1:11-12; 3:1-5) 나온다.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이 여호와의 사자를 로고스,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로 보았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났다. 이 등장은 16장 본문의 전환점이 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부재한 상황이 전개되다가 이제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개입하신 것이다. 하갈은 오로지 수동적으로 만난 것이다. 만난 장소는 광야의 샘물 곁 술(Shur)이었다. 술은 애굽 국경선 근처에 있었다(출 15:22). 이 길은 고대 카라반의 길로 통한다. 이 점에 비추어 하갈의 행선지가 자기 고향 애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16:8 여호와의 사자와 하갈 사이의 대화
“이르되 사래의 女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女主人인 사래를 避하여 逃亡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하와에게, 그리고 가인에게 질문하신 것처럼 질문했다. 하갈은 아담과 가인이 했던 것처럼 대답했다. 그는 어디서 왔느냐는 첫 질문에 대하여는 대답하였지만, 어디로 가느냐는 둘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피했다. 그는 아마도 애굽의 우상숭배라는 숨은 비밀을 감추었을 것이다.
16:8은 회개 요청의 메시지도 담고 있다.
“네 女主人에게로 돌아가서(shub) 그 手下에 服從하라('anah).” 하갈이 잉태하였을 때 보여 준 교만을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했다. 과거의 잘못에서 돌아서서 미래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실 축복을 지향해야 했다.
16:10-11 여호와의 사자의 예언
(1) “네 씨를 크게 蕃盛하여 그 數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10절) - 아브라함에게 한 축복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15:1절).
(2) “네가 姙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苦痛을 들으셨음이니라”(11절). 하나님이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을 지닌 이스마엘 작명까지 하여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다. 그는 고통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북돋고 격려하신다. 이 같은 메시지로부터 인간과 교통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엿보게 한다.
(3) “그가 사람 中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兄弟와 對抗해서 살리라 하니라”(12절). 본문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인으로 광야에 떠돌아 살아가야 하는 이스마엘의 인생행로를 예고하신 메시지이다.
오늘날 아랍인들이나 무슬림들이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라는 시각은 무리하다. 그 이유는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이스마엘 인격을 두고 한 예언이 때문이다(21:20; 25:18). 또한 이스마엘 후손이 아닌 아랍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모든 무슬림들이 모두 아랍인들이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유목민들로서가 아니라 현대 문명을 향유하면서 도시 정착한 무슬림-아랍인들이 많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IV. 16:13-14 엘 로이 (El-Roi) The God who sees
여기 본문에 나오는 살피시는 하나님(El-Roi)은 시편 23:1에 나오는 Yahweh Roi와는 궤를 같이 하지만 문맥 배경의 색조에 차이가 있다.
"하갈이 自己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3절).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여인은 오로지 하갈뿐이다. 하갈은 낮아진 상태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교류하며 용감하게 하나님 작명까지 한 것이다. 이스마엘 이름 뜻인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는 단계로 진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욥기 42:5-6에 나오는 욥의 체험과 유사하다. 물론 하갈은 하나님께서 살펴보신다는 의미를 다 파악치 못하였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계신다는 점을 고백한 것이다.
하갈이 살펴보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갈을 살펴보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이 살펴보시는 것은 전지하신 직접적으로 완전하게 살펴보신다는 것이고, 하갈은 이 하나님의 살펴보심 뒷전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직접 대면하여 본 모세에게도 한계가 있었는데 하물며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하갈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살펴봄이란 유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극한은 하나님의 기회이다(AA 146). 인간이 자신이 택한 결과 삶의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옆구리를 낀채 수수방관하고만 계신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우리의 회한의 눈물을 보시고 찾아오시어 우리를 보살피시며 밝은 미래로 이끄신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 분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다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으신 것은 그들을 보살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방황하는 하갈을 먼저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동정하셨다. 그 분은 신적 현현으로 다가오신다. 그리고 인생행로의 바른길을 지시하신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살펴보심이 먼저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체험을 살려 그 곳 샘을 브엘라해로 불렀다. 브엘라해로는 “나를 살펴보시는 생존자의 우물”이라는 뜻을 지녔다. 아랍인들은 여러 세대를 통해서 하나님이 저들의 조상에게 나타나신 것을 상기시켜 주는 이 우물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16:15-16 이스마엘 탄생
하갈은 되돌아서 아브람 집으로 갔다. 이 결론 부분에는 본문 시작 때 나온 사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의 환영 기사도 안 나온다. 이스마엘 탄생 기사만 나온다. 물론 아브람은 광야에서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와의 만남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탄생한 아들을 자기 아들로 보았고 하나님이 작명한 이스마엘 이름도 인정하였다. 75세에 가나안에 도착한 이래 11년이 지난 86세에 아들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약속의 아들을 보기까지는 1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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