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현장 조사 통보와 아브라함의 중보
하나님의 심판현장 조사 통보와 아브라함의 중보(보충)
창 18장 스케치
인간 법정의 현장검증
필자는 여러 해 전 형사법정에서 특별 변호인으로 활동한 일이 있었다. 일련의 공판이 진행되는 중 필자는 사건 관련 지역 이장을 증인으로 채택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현장검증을 신청하였다. 처음에 판사는 변호인의 요청에 대하여 네거티브 반응을 보였으나 드디어 특정 일시를 지정하여 현장 검증을 하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현장 검증을 마치고 찻집에 들려 시원한 얼음 음료로 목을 축이고 그 비용을 우리 측이 지출하려고 하니, 판사가 안 된다고 자기가 우리 비용까지 모두 지불하고 떠나버렸다. 이를 지켜 본 우리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해도 되겠다는 신뢰가 싹텄다. 그 판사의 고결한 모습 때문에 사법부에 대한 신뢰심이 우리 마음에 지금까지 고여 있다. 그가 공식적인 현장 검증 전 피고 측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미리 검증대상 지역을 둘러보았노라고 진술한 점에 비추어, 현장검증을 두 번씩이나 함 셈이 되었다.
형사법정에 이어지는 일련의 공판들은 재판관이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죄상 여부나 정도를 조사하는 심판에 해당한다. 정교한 법적 장치가 명문화된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따라 공판이 공명정대하게 진행되는 것은 필수적이다. 검사의 날카로운 주장에 대항하는 변호사의 충분한 변론권 부여와 여러 구체적인 일차 증거 및 증인들의 증언이 유죄판결의 선행 요건이 된다. 법관은 피고의 생사나 유무죄 판결이 좌우되는 일이기 때문에 가짜 증거나 주장들을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 열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죄한 자를 살려 내야 한다는 법언까지 이어 오고 있다. 이런 실정법의 정신을 살리면서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검사나 판사의 불가시적인 정황증거라는 것에 의한 판결이나, 심지어 피고인 자백만의 증거 능력 제한성을 유일한 유죄 근거로 보는 일을 피하는 것이 일반적인 자유민주 세계의 추세이다.
근래 우리 사회의 사법파동에 나타난 것처럼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권력 장악을 위하여 법관 개편을 전단적이거나 교묘한 인위적 방식으로 획책하는 일은 마땅히 재검토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이른바 <기레기>들의 날조된 기사들이 지금까지의 일련의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되었다는 비판들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 그 귀추가 주목된다.
하늘의 법정은 어떤가?
성경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일련의 재판이 세속 세계의 재판처럼 조사심판(사실심리) -> 언도심판 -> 집행심판으로 묘사되고 있다. 다니엘 7장이나 요한계시록 20장 및 22:11 및 기타 성구들은 이런 일련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그런 하늘의 재판들을 상술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내방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변호인으로 변호하도록 하는 조치가 나와 있는 창세기 제 18장의 기사를 살펴보면서 이어지는 제19장의 현장검증 내용은 인간 법정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환대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창 18:1).
하나님은 그동안 아브라함에게 적어도 네 번 나타났다(12:1, 7; 13:14; 15:1). 본문은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온 거룩한 방문자를 야훼(Yahweh)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야훼(Yahweh) 칭호는 13절, 14절, 17절, 19절, 20절, 22절 26절, 33절에 나오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분에게 “몸을 땅에 굽혀” 경배하는 태도를 취했다(2절) 그리고 항상 그분을 “나의 주님”, 곧 아도나이(’Adonai)라고 부르고 있다(3절). 구약성경에서 “아도나이”는 “여호와” 칭호 대신 사용하여 왔다(20:4; 출 15:17; 사 37:24; 시 35:2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례 길에 계속하여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거의 100세가 되어가는 99세 나이에 이르도록 수시로 하나님의 내방을 받은 아브라함은 100세 시대를 사는 오늘 노년들의 신앙 모델이 된다.
무더운 여름 한 낮 - “날이 뜨거울 때에” 곧 낮잠시간, 곧 시에스타 시간대에 천상의 방문단이 아브라함을 찾은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곳인데,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내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 방문단이 무엇인가 의논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가가려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호의를 구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그들에게 가서 쉬어가도록 간청하였다.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번 내방에는 다른 천사 두 분도 동행케 하였다.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 지라”(2절). “셋”을 두고 삼위 하나님의 내방이라고 풀이하는 분들도 있지만, 3절 "주께(ayin, 눈 eye) 은혜를 입었사오면“에서 ”주께‘를 NKJV이 "in Your sight"으로 번역한 것에서 보여주듯이 남성, 단수 2인층 문법 구조에 비추어 삼위를 두고 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에서 “그가 말하다”는 “amar”가 3인층 단수인 점이 증거하고 있는 문맥 흐름으로 보아서 그리스도와 두 천사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참고 PP 139). 아브라함은 “달려 나가”(18:2) 여호와를 영접하였다. 아브라함은 천상의 내방객들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18:6-7).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여 내방한 하늘 방문객들은 아브라함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발을 씻게 하고, 떡을 만들게 하고 달려가 선택한 송아지를 한 젊은이(7절의 “naar”를 ’하인“보다는 " 아이," "소년," "젊은이" 뜻에 비추어 이스마엘로 보아야 할 것이다)에게 주어 잡아서 만든 요리와 엉긴 젖(치즈)과 우유를 준비하였다. 하늘 내방자들은 아브라함이 준비한 음식을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먹었다(8절). 이것은 여행객들의 마음을 상쾌하게(saad, 힘을 돋우게) 한 일이다(5절).
사라의 잉태, 출산 예고(18:9-15)
천사들의 질문 -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18:9).
주님(3인층 단수 인격체)의 예고 - “내년 이맘 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0).
사라의 내심 회의적, 불신의 웃음 반응 -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老衰하였고 내 主人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8:12).
주님의 재 확인 - “여호와께 能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期限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4). “능하지 못한”은 “pala”로 ‘뛰어나다,’ ‘비범하다,’‘기이하다’는 뜻으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구원의 비범한 이적에 사용된 단어이다. 두려움에 쌓인 사라가 웃지 않았다고 부인하였으나 결국은 웃게 될 것을 예고하셨다(18:15).
하나님의 현장 검증 통보
“진노의 사자들”(PP 139)이었지만 멸망시키는 일은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께는 생소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의 융숭한 환대를 받은 “셋” 중 둘이 소돔성을 향하여 떠난 후(18:16, 22; 참고 19:1) 아브라함에게 남아 계신 다른 한 분이신 “여호와”께서(17절 22절) 의로운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의 죄악에 대한 자기의 심판의 비밀을 통보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암 3:7). 여호와로부터 장차 일어날 일을 통보 받은 아브라함은 선지자와 의인의 랭킹에 속한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신다. 그리고 “공도와 의의 통로로 삼은 미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미래를 축복”(18:18-19)하고자 한다고 공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선택 받은 자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맡기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罪惡이 甚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行한 것이 果然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18:20-21).
"알려 하노라(yada)‘는 통보는 아브라함 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의 의(tsedaqah)의 통로가 되며, 부르짖음이(tse'aqah) 심히 큰 소돔 편에서는 중차대한 죄악에 대한 조사심판에 해당한다. 여기서 의와 부르짖음 히브리어의 극명한 비교가 돋보인다. 이 “부르짖음”은 아벨의 피(창 4:10)로부터, 그리고 노아의 시대에도(창 6:5) 들렸다. 소돔성에서 들린 부르짖음은 노아 시대처럼 컸다. 그러나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라는 표현 속에는 죄악의 도성 소돔에 대한 희망의 길을 터놓는 하나님의 사랑의 무지개를 엿보게 한다. 아브라함은 이 사랑을 위하여 선택 받은 자로 하나님의 조사심판에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조사심판에 대한 도전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일을 애타하시는 자비와 사랑을 읽어내 그 틈새를 파고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 윤리 강의를 한 아브라함
자기 조카가 소돔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 본적이 없었던 아브라함이었다. 어떤 주해자는 창세기 12 장 이하 여러 문맥에서 무자한 아브라함이 롯을 자기 후계자로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도 추리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동족도 심판으로 멸망당할 것이라는 급박한 메시지를 그대로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서(18:22) 탄원한다. 여호와 잎에 선다(‘amad lipney)는 것은 겸비와 섬김의 경건한 기도의 자세를 시사한다(참조, 렘52:12). 이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한 기도의 자세이다. 전에는 무력 동원하여 롯을 구한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기도로 구원하고자 한 것이다(PP13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主께서 義人을 惡人과 함께 滅하려 하시나이까”(18:23)로 시작하여 총 7 개의 질문을 한다. 그는 당당하게 하나님께 논리 싸움을 건 것처럼 보인다.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사용하였다고 하지만, 우리는 다음 본문에서 마치 윤리 강의실에서 학생이 교수에게 비위에 거슬리는 주장을 펼치듯이, 인간 아브라함은 절대자 하나님께 연이은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다.
“主께서 이같이 하사 義人을 惡人과 함께 죽이심은 不當하오며 義人과 惡人을 같이 하심도 不當하니이다 世上을 審判하시는 이가 正義를 行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5절).
인간은 흔히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는 흔히 사랑과 자비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평들이 있어 왔다. 이는 인간 역사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아브라함은 물썽하신 하나님을 파고들면서 50-45-30-20-10으로 의인의 수치를 낮추어가며 하나님과 협상하며 그의 양보를 얻어냈다. 놀랍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집요한 윤리 강의적 산파술에 감겨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가르친 것일까? 하나님은 피조물의 따지는 질문을 받아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한다.
시편에 나오는 저주시가 이상하게 들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앙갚음을 주장하는 한이 서린 기도도 들으신다. 동시에 의인의 중보적 탄원도 들으신다. 요한계시록 14:6 이하의 심판의 메시지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른바 재림 전 심판의 한 사례인 소돔성에 대한 급박한 심판을 앞두고 아브라함에게 탄원하는 중보기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드셨다. 창세기 제 18장의 후반부에는 사랑과 심판의 절묘한 조화가 배어 있는 셈이다.
아모스는 “100명이 남은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5:3)고 하였다. 100명이 한 성읍을 구성한 수치이다. 그렇다면 50명은 그 절반이 되는 수치이다. 의인 10명은 최소한도의 수치를 상징한다. 히브리어 알파벳 중 열 번째 문자는 요드( י )이다. 알파벳 중 가장 작은 크기의 문자가 이 요드이다. 이 요드는 마 5:18에 나오는 “일 점”에 해당되는 문자이다. 훗날 10명은 유대주의 예배공동체 구성의 최소 수치가 되었다. 의인 10명은 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공동체를 살리는 수치이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그 사회를 보존시켜 소생할 가능성이 있다.
아브라함의 탄원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간청하는 어린 아이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PP 140). 그는 소돔성 안에 롯 가족 외에도 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야 하나 죄인에 대해서는 동정과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소돔에 임했던 것과 같은 무섭고도 절망적인 파멸로 달려가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 날마다 누군가의 은혜의 시기는 끝나고 있다. 시간마다 누군가는 자비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 죄인으로 이 무서운 운명에서 피하도록 하는 경고와 간청의 음성은 어디에 있는가?”(PP 140).
아브라함과 순례 길에 나선 롯에게는 많은 재물을 돌보는 종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두 딸들을 두었다. 그 두 딸들에는 곧 결혼시킬 사위 후보자들이 있었다.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지낼 때 제단을 쌓는 일에 동참도 했다. 그는 소돔에서 아내와 두 딸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서 소돔을 제하여 버릴 수 없었다. 롯의 신앙은 생명력이 있는 신앙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10명 정도 의인 공동체 구성에 실패한 것이다. 이는 자비와 공의 기별을 전하도록 선택 받은 남은 백성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다. 남은 백성 모두가 의롭지 않아도 된다. 의인 10명이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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