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를 통한 회심 체험

구원 : 2019. 6. 17. 11:01

찬미를 통한 회심 체험

- 페니 크로스비(Fanny Crosby)의 경우 -

 

엘렌 화잇은 회심과 중생 두 사건을 하나로 묶어 묘사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사람이 회개한 과정(過程)에 대하여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나 지낸 경로(經路)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회개하지 아니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3:8)고 하셨다”(정로, 57).

회심은 지난날의 죄를 벗어나(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서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회개와 믿음을 선물로 제공한 것이다. 회심은 이 하나님의 구원 제공에 인간이 반응하는 행위이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이켜 바꾸는 회심은 생애의 전환점을 이룬다. 죄로 잃어버린 참된 자유와 자제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회복하여 내적 마음과 삶을 초자연적으로 변화시키는 이 큰 방향 전환적 회심은 이후에 일어나는 작은 회심과는 구별된다.

회심의 체험의 단초를 제공하는 일은 사람마다 다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성경연구 일수도 있고, 기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거룩한 음악을 통하여서도 이르러 올 수도 있다. 여러 해 전에 대총회 아침 예배에 참석하였을 때 한 여성의 찬양 지휘에 따라 마음으로 찬양을 할 때 성령의 역사가 수반되는 체험은 잊을 길이 없다. 1995년 위트레흐트 대총회 예배 때 수많은 큰 무리가 올리는 찬양으로부터 온 감격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기도 하다.

 

페니 크로스비(Fanny Crosby, 1820-1915)로 잘 알려진 크로스비 정식 이름은 Frances Jane van Alstyne이었다. 그는 시인, 작사가 및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크로스비는 본래 맹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 난지 6주가 되었을 때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로 평생을 맹인으로 살았다. 패니가 한 살 되었을 때 그를 극진히 돌보던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패니가 11살 되었을 때 패니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패니의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도 세상을 떠났다.

 

패니는 외적으로 보면 가난과 슬픔에 버려진 불행한 아이였다. 크로스비는 한 평생을 살면서 수많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경험했지만 그는 거의 한 번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증오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패니 크로스비는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까지 85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한 순간도 어느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를 품은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좋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를 믿어왔기 때문이다. 기도는 그의 영혼의 호흡이고 찬송은 그의 영혼의 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크로스비는 8세 때 내가 볼 수는 없다 할지라도, 내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시를 썼다. 그녀는 15세 되었을 때 뉴욕 맹인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 그 학교 선생이 되었다.

크로스비는 항상 신앙심이 깊었다. 12회 감리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 30세 한 죽어가던 친구가 하늘에서 만나자라는 말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영혼의 울림이 되었다. 친구의 이 말은 크로스비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는 영적 체험으로 이끌어 가는 메시지가 되었다.

 

크로스비는 부흥회에 참석, 강단으로 나오라는 당대의 회심호소에 응하였다. 처음에는 큰 체험이 없었다. 그러나 18501120일 또 다시 강단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상당히 오랜 시간 다른 이들처럼 기도하던 중 회중들이 웬 말인가 나를 위해 주 돌아가셨나찬미를 들으면서 그는 하늘의 빛이 자기 영혼을 감싸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깊은 감동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는 벌떡 일어나 할렐루야를 외쳤다. 후에 크로스비는 술회하기를 자기는 그동안 한 손으로 세상을 붙잡고 있으면서 다른 손으로 주님을 붙잡고 있으려고 애쓰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크로스비는 그 밤의 체험을 “11월의 체험이라고 명명했다. 11월의 밤의 체험은 23년 후에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고찬송으로 나탔다. 이 찬송은 그의 묘비에도 새겨졌다. 그가 다시 태어난 11월의 체험이 이 찬미에 엉키어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이 회심의 체험을 하는 계기는 다양하다. 크로스비의 찬송의 체험과는 달리 루터와 웨슬리는 성경연구 모델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의 회심은 비텐베르크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수도원에 딸린 방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기 영혼과 씨름을 하면서 고투하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수도원의 탑 속에 그의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에서 하나님의 의에 관한 새 빛의 광맥을 찾아낸 것이다. 이 그의 이 연구실의 이름을 따라 루터의 탑 체험 (tower experience)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탑에서 그는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았다. 그의 이 체험을 회심 체험을 탑 체험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적 해방이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교회사 학자들은 근본적이며 개혁적인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았던 탑 체험이 1513년에서 1515년 사이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사실상 1517년 이후에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이해를 하면서 그 매듭을 푼 장소는 강의 준비를 위해 제공된 수도원 내 탑 안에 있는 자신의 따뜻한 공부방이었다는 것이다.

 

존 웨슬리가 17385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인 작은 집회에서 사회자가 마틴 루터의 책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 가진 회심의 체험이 그를 생의 위기에서 건져내고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크로스비는 이 체험 후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어 갔다. 크로스비는 역사상 가장 많은 찬송가를 작사한 음악가중 한 명으로 8,000곡 이상의 찬송가와 복음 노래(복음성가)를 저술했다. 그 녀는 "찬송가의 여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복음 노래는 "모든 부흥 음악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아이라 생키(Ira Sankey)"무디(Moody)와 생키(Sankey)복음주의 캠페인"의 성공이 크로스비의 찬송가 때문이라고도 했다.

 

크로스비의 가장 잘 알려진 노래에는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 Jesus is mine)", 이 노래는 후에 그의 묘비에 새겨졌다. “예수 나를 위하여(Jesus shed His blood for me)”, “너희 죄 흉악하나(Tho' your sins be as scarlet)”, “예수께로 가면(If I come to Jesus)”, “인애하신 구세주여(Pass me not, O gentle Savior)”, “나의 갈길 다가도록(All the way my Savior leads me)”, “나의 영원하신 기업(Thou, my everlasting portion)"등으로 한국 찬미가에도 28곡이 수록되어 있다.

 

교회 예배에서 부르는 찬미가 내 영혼을 하늘로 이끄는 또 하나의 생애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크로스비의 체험은 아직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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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