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낭떠러지에서 기회를 붙잡은 사람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기회를 붙잡은 사람
예수님의 십자가의 옆에 달린 두 강도중 하나가 소리 질러 말하기를 “여보게, 자네는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아닌가? 자네도 살고 우리도 살려 보게.” 성경은 이 비아냥거림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 지어다” (막15:32). “함께 十字架에 못 박힌 强盜들도 이와 같이 辱하더라”(마 27:44).
그러나 그 옆에 있는 다른 강도는 저주하던 태도를 뉘우쳤다. 그리고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같은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대로 거두어 들여 이렇게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 사람이 살아오고 행하여 온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는 줄을 모르느냐?”
이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아기예수가 애굽으로 피난 갈 때 강도를 만났다. 강도 일당의 대장의 아들이 아기예수를 보고 감동을 받아 놓아주면서 ”때가되면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젊은 강도가 갈보리에서 예수를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한 평생 강도 짓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소망의 길이 열린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는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기회를 잡았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악당이라 할지라도 불쌍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주하던 자가 회개하고 돌아설 때 곧 받아 주신다. 그는 행악을 자행하였던 자이었다. 그는 예수를 조롱하고 비방하다가 그 분을 만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대인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회당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 회당 예배에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예배 참석하는 일에 취미를 잃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취미를 찾았다. 좀 도둑질하다가 소도둑이 되었고 드디어 강도 행각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를 보았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중에 예수의 기도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중에 자기가 범하여 온 죄를 해결하여주는 용서의 길을 찾았다. 그는 십자가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았다.
한 짧은 순간의 결단이 운명을 좌우한다. 이제까지 그가 추구했던 것은 억압자를 폭력으로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래야 민족의 자유해방이 온다는 열심 당원 혁명 논리를 받아들이고 정치혁명을 통한 구원을 추구하여 왔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길은 허상일 뿐이며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동안 열심 혁명 당원들과 한 통속이 되었던 삶이 무참하게 깨졌다. 오늘도 이 땅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논리를 내세워 허상을 찾겠다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기류가 꿈틀거리고 있다.
일생 걸어왔던 길에서 방향 전환을 한 회개한 강도는 천길 벼랑 끝에 매달린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시선을 예수께 향하고 호소할 기회를 붙잡았다. 자기의 죄책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마지막 절박한 순간에 그는 참 구원의 길에 서서 예수님을 향하여 호소하였다.
“당신의 나라가 올 때 나를 생각하여 주시기 원하나이다”(눅23:44).
이 호소에 구원의 메아리가 즉각적으로 들려 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眞實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樂園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속죄함을 입은 자들 중에 더러는 생애의 마지막 몇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를 붙잡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하늘에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죽을 때에 구원의 계획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Letter 23, 1905)
그는 최후의 순간을 잘 포착하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나가버린 삶이 아무리 희망 없게 보인다 할지라도 바로 그때야 말로 카이로스(kairos) 시간대이다. 이 카이로스 시간대는 마치 석양녘 황홀한 광경처럼 다가 왔다가 곧 사라진다.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하데스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련한 심령들에게 그 너머에 있는 찬란한 구원이 영롱하게 보일 수 있도록 선처하신다. 죄책으로 파멸된 인간이라도 아직 소망의 문이 열려 있음을 잊지 말라. 때가 이미 지나갔다고 포기하지 말라.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 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어느 시점에 다가오는 영존할 메시아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지식의 결여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천국생활을 할 만큼 적합성을 갖추는 성화를 추구하는 삶의 단계를 거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이 강도의 경우처럼 이 세상에는 생애의 막바지에서 그리스도를 붙잡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들을 위한 모델로 그리스도의 낙원 약속을 붙잡은 회개한 강도 사건이 기사화 되었으리라. 마지막 숨결에 이 크고도 귀한 소망의 메시지를 갈망하면 생명의 길이 열린다. 이런 점에서 엘렌 화잇 여사가 생애의 막바지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에서 특별 보충 교육을 받는 프로그램이 개설될 것이라고 한 시사는 복음의 메시지이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특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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