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LA삼육 가을학기 강의 자료)
I. ‘은혜’ 용어와 은혜신학 발전
A. 용어들
은혜는 구속의 경륜 전체에서 중심적인 단어가 된다. 히브리어 ḥēn, 헬라어 charis가 은혜(grace)로 번역되고 있다. 이 성서의 표현에는 영어의 ‘grace’에서와 같이 개인이 갖춘 덕목 같은 의미는 안 들어 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나 가치, 또는 노력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축복, 호의(favor) 또는 친절(kindness)을 의미한다.
B. 은혜신학 발전
2세기 초엽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행위에 선행하는 은혜의 우선권이 모호하여지고 성령교리가 등한시 되었다. 이는 인간의 자기 결정적 행위에 역점을 두거나 인간 사제를 은혜의 통로로 보거나 또는 성례가 강조된 탓일 것이다.
펠라기우스(Pelagius)는 자유의지에 역점을 둔 은혜론, 즉 낙관론적인 도덕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은 은혜신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모든 저술의 중심 주제는 은혜의 주권적 하나님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였다. 그는 서방의 은혜론에 있어서 가장 정교한 해석자였다. 라틴 교회는 그를 ‘교회 박사,“ 및 ’은혜의 박사‘라고 불렀다. 인간의 죄를 심각하게 의식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역사하여 인간의 회심을 준비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은혜를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로 보았다. 이 은혜가 인간의 가장 내밀한 마음과 의지를 감동시킨다. 은혜는 신실한 자자들의 순례 길을 인도하고 재촉한다. 은혜는 우리들을 회개, 신앙, 그리고 찬양에 이르도록 고무한다.
아르미니우스에 의하여 강조된 은혜를 후에 웨슬리(John Wesley)는 선행은혜(preveient grace)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은혜를 인간이 이룬 내적 특성이나 덕목으로 본 중세 신학에서 마르틴 루터는 인간을 죄악의 세력에서 해방시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신학을 부활 발전시켰다. 아르미니우스 신학자들은 일반은혜와 구원하는 은혜를 구분하는 이분법을 배척하고 하나의 은혜를 강조하고 그 은혜가 구원의 필수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특별은혜를 이중예정론과 연계시킨 칼뱅주의를 의식한 소치일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 신학은 성례전이 은혜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점을 발전시켰다. 개신교 신학에서는 은혜와 율법의 관계가 논쟁점이 되었다. Karl Barth와 Karl Rahner는 각기 자기 방식대로 20세기에 은혜신학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 안에서 본질적으로 자기를 주었다고 하였다.
II. 은혜의 종류
은혜는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로 대분된다.
A. 일반 은혜
1. 개념
일반 은혜(common grace)는 죄인을 구원하는 은혜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죄인에게 주시는 축복들이다. 일반은혜는 신자 와 불신자,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창조질서에 나타난 축복들이다. 일반은혜는 영적인 변화를 주지는 못하지만 이성적, 도덕적 방법으로 호소한다.
2. 목적
하나님께서는 이 일반은혜를 통하여서 인간을 돌보고 계신다. 그러면서 이 일반은혜를 통하여 구원 받을 자들을 위한 간접적 예비 역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일,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등을 하신다. 일반은혜는 인간의 삶 전체가 은혜의 공기로 에워 쌓여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3. 사례들
(1) 신체적, 물질적 영역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히 1:3)고 계신다. 창조세계를 유지하고 돌보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질세계의 여러 법칙들은 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유지시키는 방편들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생명들을 붙들고 계신 힘의 원천이 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쟁투, 678)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행 14:17).
(2) 지적 영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3) 도덕적 영역--한 인간의 내부에서 정사선악을 판별하고 정의와 선을 지향하도록 하는 장치이다.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로 서야 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 6:33)
(4) 창조적 영역
기술 창조와 예술 세계의 창조적 작품들은 일반 은혜의 정수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5) 사회적 영역--인간사회에 대한 신적 통치 또는 제어를 위한 장치들이다. 이런 제어 장치는 인간사회의 파멸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노아 홍수 후 인간 통치 제도를 두라는 명을 내렸다 (창 9:6).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
인류 파멸을 초래하는 파괴적 무기나 폭탄을 무분별하게 제조, 유통하는 것을 막는 국제적 제어장치는 오늘날 특히 중요성을 더하여 가고 있다.
(6) 종교적 영역
“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2-23)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요컨대, 일반은혜 없이는 죄의 영향권 아래에서 인간은 삶을 지속하기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붙들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반은혜로 개인과 사회에 파고드는 죄의 파멸을 막는 제갈 역할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일반은혜는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을 알 수 있도록 역할도 하게 한다. 비록 타락 시 인간에게 품부된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고 부셔졌을지라도, 전면적으로 망가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홍수 후에 사람을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기도 하고(창 9:6), 가정에서 남편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이 되며(고전 11:7), 혀를 함부로 놀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저주하지 말아야 하는(약 3:9) 말씀에서 엿 볼 수 있다. 일반 은혜가 하나님의 형상의 전면적 파멸을 막아주는 잠재적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타락 후의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의 찌꺼기가 이어지고 있는 것(book 2, chap. 2:12)으로 보았을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는 천연 세계에 나타난 일반은혜의 역할과 청지기적 돌봄을 강조하여 불신세계의 파멸을 막는 일이 중요하다.
B. 선행은혜와 특별은혜(구원하는 은혜)
은혜에 관한 히브리어 ḥēn, 헬라어 charis가 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낮은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나 친절을 의미한다는 점은 특별은혜 개념을 담고 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신 구원하시는 사랑이다.
ḥēn이 사용된 용례를 본다. “네가 나를 사랑(ḥēn)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창 30:27).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출 33:13).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께 또는 인간에게 예모있는 진술 형태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런 개념이 언약적 사랑인 ḥēsed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신 구원하시는 사랑의 개념은 신약성경에 와서 더 분명하게 나와 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롬 5:2).
2. 선행은혜(Prevenient grace)
(1) 개념
선행은혜는 인간의 노력과 결정에 선행하는 은혜이다. 죄인의 돌아섬에 앞서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이 죄를 깨닫게 하고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신다. ‘선행(prevenient)'란 말은 ’먼저 온다(to come before)'는 뜻이다. 따라서 선행은혜라는 말은 구원의 시작 상태 전에 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끄심이다(요 6:44; 참조 12:32). 그리하여 선행은혜는 거룩한 구조에 눈먼 상태를 경감시키고, 계시된 진리를 수용하도록 의지를 강화시키며, 회개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을 조성하는 은혜이다. 이 선행은혜는 이교도의 마음에 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롬 2:12-14).
이런 점은 다음 본문에도 배어있다.
“참 빛 곧 世上에 와서 各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2) 개념 이해의 역사적 지평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프로테스탄트의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론(the total depravity)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이중 예정론의 올무를 피하는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그는 전적 타락성이 첫 조상의 타락으로 인하여 온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의 권능의 도움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성화를 포함한 구원의 전 역사(役事)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런 주장은 영혼의 생명 없는 능력을 일깨우고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preventing' 또는 'prevenient' 은혜로 일컬어졌다.
회복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구원하는 은혜(salvific grace)를 거절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은혜를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주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사상을 배척한다. 더 나가서 아르미니우스는 프로테스탄트 세계에서 잉태 시 원죄 전가(轉嫁) 사상도 배척한다. 그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은혜 낙관론적 시각을 지녔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갓 태어나는 어린아이는 무죄하다고 보았다.
웨슬리(John Wesley)는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준 본성의 타락이란 원죄가 영아에게도 이어지는 점을 인정한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와 달리 영아도 중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칼뱅주의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그는 인간의 자연적 악한 상태(전적 타락)를 말하면서도 생명의 시발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또한 역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의 은혜 개념을 ‘선행 은혜(preventing grace, prevenient grace) 로 발전 시켜 나간 것이다. 이 은혜는 인간이 부르심의 기다림 없이 임하는 은혜이다. Olson은 이 선행 은혜를 “회심 전 회개와 믿음이 가능하도록 하는 깨우치고, 부르시고, 비쳐주시며 권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의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선행은혜로 온다. 칼뱅주의의 예정론은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론적 시각으로 발전하였지만,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행은혜에 입각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참된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의롭게 하시는 은혜를 거절하지 않게 고취하면서 의롭게 된 자를 성화의 삶으로 이끌게 한다고 보아 이중예정론이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선행 은혜는 보편적으로 인간을 회개로 인도하여 그리스도에게 나가도록 이끌어 구원에 향한 책임으로 응답케 한다.
이런 사상은 엘렌 화잇의 다음 메시지와도 조화된다.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이 힘으로 피해 나올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악한데 우리가 그것을 고칠 수 없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意志力)의 연단과 인간의 노력은 각각 상당한 분한(分限)을 가졌으나 이것들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한 것이다. 이것들이 혹 행위의 외모적 단정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動機)를 깨끗케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 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정로, 18).
(3) 선행은혜의 유익성
이 선행은혜의 유익한 점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① 선행은혜는 성경에 나오는 모순되어 보이거나 문제시 되는 본문들을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게 한다.
② 선행은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논리적 이해를 돕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피조 인간들에게 주어짐으로 인하여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을 바로 이해케 한다.
③ 선행은혜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책임성을 고양케 하며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거나 율법페기론을 배척케 한다.
(3) 선행은혜의 특징
① 선행은혜는 성령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랑과 동정을 베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삶을 복되게 하고 향상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곳마다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이교국(異敎國) 안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푼 예가 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증거한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덕성을 야만인의 마음속에 넣어 줌으로 저희의 본성과 교육에 반대되는 동정심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은 그들의 심령에 비치고 있다”(실물, 385)
② 인간이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선행은혜를 저항할 수 있겠지만, 그 역사 자체가 일어나는 것을 저항할 수 없으며 그 역사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따라서 선행은혜는 보편적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③ 선행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선택케 한다.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하는 의지를 북돋아 책임을 지게 하는 은혜이다. 은혜로 선택의 자유가 가능케 된다.
④ 선행은혜는 구원하는 특별은혜를 가져오는 돌쩌귀의 역할을 한다.
2. 특별 은혜
(1) 개념
특별은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성화시키며, 영광으로 인도하는 구원하는 은혜이다. 바울은 이 은혜가 자기의 삶에서 역동적 힘이 된 것을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을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하는 은혜는 역동적이다. 구원의 역동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그리스도교 구원론은 오직 은혜가 그 바탕이 되고 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통하여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오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이 은혜는 땅에 뻗히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이다. 이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펼친 믿음의 손이다.
(2) 특별은혜의 내용
① 칭의 - 구원하는 은혜는 먼저 십자가와 하늘성소에서 죄인에게 값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 즉 용서로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회개에 이르게 하고(딤후 2:25) 믿음을 넣어준다(롬 12:3; 히 12:2).
“오직 한 분만이 그 필요를 채우실 수 있다. 세상의 필요 곧 만국의 소망은 그리스도이다. 그분만이 나누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은혜는 생수와 같아서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소성시키며 활력을 준다.”(소망, 187).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는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다만 값없이 받는 선물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죄권을 사지 말고 믿음으로 십자가의 구주를 쳐다보라고 권면하였다 ”(쟁투, 129).
② 성화 - 구원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신자들을 강화시키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널리 용서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시면서, 마치 그 약속의 뜻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처럼 이렇게 부언하신다....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한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보훈, 114)
바울은 은혜를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만 순종의 축복이 유감없이 그들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능력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은혜가 사람으로 하여금 악습의 사슬을 깨뜨릴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바른 길에 굳게 서게 해 주고 그 길에서 그를 지켜 줄 수 있는 유일의 힘이다.”(치료, 115)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복음의 진리와 그것이 생애에 미치는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실물, 301).
“죄 때문에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는 능력은 초자연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시켜 주는 과업이 전혀 불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을 악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직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의 피를 통하여서만 죄에서 깨끗하게 된다. 그분의 은혜만이 우리에게 타락한 본성을 저항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치료, 428).
③ 봉사에의 부르심 -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사업에 봉사하도록 부르신다(갈 1:15, 16). 이 은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하도록 감동을 준다.
III. 은혜의 수단
성경은 기본적인 은혜의 매체가 된다. 설교, 기도, 개인전도, 교회출석과 예배 참여, 거룩한 교제, 침례식, 성찬예식 등이 모두 은혜의 수단이 된다.
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 의지
A. 상호관계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편에, 동방교회는 인간 의지 편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동방이나 서방교회가 은혜나 자유의지를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보다 더욱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관주의의적 견해를 강하게 의식하였었다. 529년 오랜지회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으로 야기된 쟁점을 매듭짓기 위한 회의였다. 이 논쟁의 주된 관심사는 구원에 있어서 개인이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느냐는 점과 동 구원을 위한 은혜의 역할 범주에 관한 것들이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할에 관하여 대립되는 견해와 이를 조화시켜 이해하려는 주장들이 네 가지 견해들로 나타났다. 4가지 견해는 아우구스투스주의 (Augustinianism),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및 반 아우구스투스 주의(Semi-Augustinianism)이다.
엘렌 화잇의 다음 진술들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의지가 그대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품성에 있어서 그처럼 요긴한 요소를 이루는 이 의지는 타락으로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사단은 언제나 그 자신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역사함으로 사람의 완전한 멸망과 불행을 도모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희생은,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셔서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그분의 정부의 원칙을 하나도 깨뜨리지 않고 그분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게 한다. “그대 자신을 나에게 바쳐라. 그 의지를 내게 달라. 나는 그것을 사단의 지배에서 빼앗아 내가 소유하겠다. 그렇게 될 때 나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그대 안에서 역사할 수 있다.” ”(5증언, 515).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먼저 바치고 새로운 의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의 활용을 통해서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보훈, 62).
B 은혜에 대한 저항 여부
개신교 사회에서 효험적 은혜론(efficacious grace)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론(irresistible grace)이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는 무흠하고 완전하지만, 이 하나님의 은혜는 수령하는 마음의 자세와 연관되어 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고전 15:10)라고 한 바울은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한 것은(고전 9:27)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고 하여 베푸신 은혜로부터 전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의가 없이는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원한다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을 … 알리라”(요 8:32, 7:17)는 그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된다. ”(소망, 258)
“각 사람은 어떤 권세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할 것인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소망, 258).
'구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0) | 2020.01.07 |
---|---|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기회를 붙잡은 사람 (0) | 2019.10.07 |
찬미를 통한 회심 체험 (0) | 2019.06.17 |
자유와 선택의 자유 (0) | 2019.04.15 |
<1888 Re-examined>의 문제점들 (0) | 2019.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