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 손에 붙이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대하 24:24).
위 본문에 “이는”에 해당하는 yKi(ki) 는 ~때문에, ~일 때, 비록 ~이지만, ~처럼, 그러나, 그때에, 확실히, 제외하고는, 이므로 등의 의미를 지녔다. 접촉사와 부사로 사용되는 “키”는 자주 첨가된 다른 불변사에 의해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한글 개역판 번역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나 NIV가 “because”로 번역하고 있는 것은 같은 의미로 이유를 말하고 있다.
이 이유를 함축하는 뜻으로 번역하는 때, 선인에게는 선한 일이, 악인에게는 나쁜 일이 야기될 것이라는 추론이 당연하다. 반대로 어느 누구가 고난이나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따라서 이 논리를 따른다면 어느 분이 잘 살고 있다는 귀결은 그 사람이 유덕한 자일 수밖에 없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역추리는 인생살이를 보는 시각을 너무 단순화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샬롬(shalom, 평화, 행복)과 삶의 현장에 일어나는 기복(起伏) 사이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느냐 하는 이슈가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선하게 살고 신심이 돈독한 분이 갑자기 암으로 쓰러져 고통당하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이 주제가 고통스럽게 마음을 후빈다.
그 상관관계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의 되어 온 접근 방식들을 크게 세 가지로 가능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재난, 질병, 죽음과 인간의 도덕성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접근방식이다. 사람이 죄를 범하고 있거나 범한 적이 있는 경우 고통스런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 발생적이다. 한 소년이 저녁 때 귀가 중 운반하고 있는 장작으로 전신주를 내리쳤다고 치자. 이 때 그 인근 지역에 전기가 나가 캄캄해졌다. 이 경우 장작으로 전신주를 내리친 결과로 전기가 나갔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욥은 친구들이 길게 몇 번씩이나 정죄하는 원인결과론을 부당하다고 거부하고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재난, 질병, 및 죽음과 인간의 도덕성 사이에는 느슨한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접근방식이다. 이 상관관계는 원인-결과 관계보다는 좀 약하다. 예컨대, 파란 눈과 금발 머리털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나타날 수 있지만,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세 번째 가능성은 인간의 나쁜 도덕성이 재난, 질병, 및 죽음을 일으킨다는 접근방식이다. 이 접근방식은 욥의 친구들이 그렇게 몰인정하게 물고 늘어진 시각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원인과 결과 사이의 불변적 관계를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원인이나 결과 어느 쪽을 숨겨버릴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변형, 왜곡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원인이 있다 해도 결과와 상관없는 원인이 끼어들 수도 있어 인간의 단순한 이른바 과학적 지식으로 다 밝힐 수도 없다. 더구나 무고한 자들이 고난, 고통당하는 사례가 너무 많아 그 고통이나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언하는 일이 위험천만하기도 하다. 또한 악한 자들이 곧 징벌 받는 것도 아니다. 선한 자들이 곧 보상 받는 것도 아니다. 무서운 행악자들이 오래 동안 방치되거나 오히려 여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따라서 현재의 번영과 재난을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판단한다는 것은 피상적인 것이다.
여러 접근 가능성들에는 약점들이 있다. 전혀 관계가 없는 동시 발생적 현상도 많다. 원인-결과 관계가 뚜렷하게 감지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원인-결과 관계 심증이 뚜렷하게 감지될 수도 있다.
어느 접근 기능성 이론에 따라 어느 인간의 불행한 고통문제를 판단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윤리와 종교의 세계에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영감에 따라 메신저 역대기 기자가 요아스에게 하듯 예언적 권위로 분명하게 지적하지 아니하는 한 보통 인간들은 그 판단을 유보하여야 한다.
설사 원인 결과의 관계로 고통당하는 분이 있더라도,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원인 결과를 느슨하게 처리하여 기회를 주실 수도 있고, 코나 입술이 꿰어 끌려간 므낫세처럼 마음을 낮추고 돌아서면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이 있을 것이기도 하다(대하 33:12-13).
더 나아가서 크리스천은 주님을 위하여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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