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고통당하는 인간 실존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욥 24:12).
욥은 인구 많은 성중에 고통당하는 자가 많다고 그리고 자신이 그 고통 속에 내 팽개쳐진 모습이라고 마음의 처연함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의 삶에는 고통이 늘 따라 다닌다. 인간의 삶에는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고통도 늘 엄습하여 온다. 광야에만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농촌에도, 산골짜기에도 고통의 가시덤불이 있고 도시에는 더 많은 고통이 에워싸고 있다.
악한 자들이 곧 징벌 받는 것도 아니다. 선한 자들이 곧 보상 받는 것도 아니다. 무서운 행악자들이 오래 동안 방치되거나 오히려 여유롭게 살아간다. 그런대 인간은 현재의 번영과 재난을 가지고 인간의 품성을 판단하다. 이것이 욥의 친구들이 빠진 사상적 함정이다. 욥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지만 의인이 역설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고통의 역설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고통과 시련을 거친다고 하고 있다.
고통은 고스란히 고통당하는 자의 몫이다. 교회에서 중병에 걸린 분들을 보면 어떻게 그들을 도울 것인지 생각한다. 밥맛이 없고 체중도 줄어들고 집 밖을 다니기도 어려울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일상생활을 계속 해나갈 수 없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통 받는다. 그러나 아무도 환자의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무력함에 절망한다. 이는 비극적이다.
자기 몸의 통증이 안겨다 주는 괴로움은 현재 내가 겪고 있는 통증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죽음에 대한 미래의 불안과 공포로 이어진다. 반복하여 괴롭히는 고통 속에서 환자는 철저한 외로움을 느낀다. 고통스런 과거와 현재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의 공포가 엄습하여 오는 때 환자는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현재의 나와도 적절히 거리 두고자 한다.
II. 조문 온 친구들의 논리
욥기에는 세 친구들과 욥 사이에 3라운드의 주고받는 대화가 전개된다. 욥의 친구들은 불행에 대한 피상적인 일반론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의인이라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의인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은 그런 불행을 당해 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이 당하는 고난을 죄의 결과로 보고 불행징계론, 고통징계론을 펼쳤다. 그들은 욥이 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불행을 당한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친구들의 시각은 의인이 고통당하는 것을 두고 보는 선입견에 포로가 된 시각이다. 이들의 시각은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눈도 된다.
엘리바스는 신학적, 철학적, 경험적 차원에서 고난의 벌을 통하여 더 완전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벌을 잘 받으면 하나님이 축복할 것이라는 것이다.
빌닷은 전통과 역사적 시각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인으로 의로울 수 없다는 일반론을 전개하였다.
소발은 도덕가적 시각에서 욥의 이야기를 헛소리로 몰아세운다. 더구나 그는 욥의 재물이 부당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젊은 엘리후는 고통연단론, 고통정화론을 전개하고 대속도 이야기하며 주께서는 불의를 행하시겠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의 기묘한 일을 궁구하라고 한다. 엘리후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근접하였지만, 그러나 사랑이 결여된 차디찬 권면이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먼저 내세운다고 공격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공의롭다. 의로우시므로 전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선악에 따라 벌주신다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하나님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인간 욥을 배려하지 않았다. 욥은 친구들의 신정론을 거부하고 불행은 죄인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전가시킨다고 주장한다. 욥은 이들 외에도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 때문에 크게 흔들린다.
과거에 욥의 은혜를 받은 비천한 젊은 자들이 욥을 천대하고 기롱하였다(욥 30:1). 그들은 가시나무 아래 모여 고난당하는 의인에게 가시고통을 안겨주는 자들이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욥 30:7). 뜻 밖에 모진 고난에 난도질 당한 욥은 위로자들의 가시나무 같은 채찍에 휘둘려 만신창이가 된다.
III. 고통을 나누는 중보기도
우리는 주변에서 암과의 싸움에 지친 영혼의 외로움과 처절함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특새에서 고통당하는 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러나 환자 체내에 도사란 암 세포는 전이까지 하며 자기 증식을 계속 진행하여 간다.
환자들은 인간 세계의 냉혹한 말들이 악랄하게 자기를 파고들어 모질게 고통당하기도 한다. 환자는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눈물을 적시며 희망이 무너지는 듯한 욥의 고통 같은 체험을 하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기도회에서 다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중보기도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약 5:14-16)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3-5).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9-20).
IV. 고통당하는 자 욥의 중보
욥은 고통 중에서 그리고 곡해의 화살 속에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내가 소망이 없노라(나는 그를 의뢰하리니)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욥 13:15)고 한다. 이 얼마나 큰 믿음인가! 그러나 아직도 그는 하나님께 맞선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여야 하느냐고...
그러면서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고 고백하고 있다. 병들고 썩어가는 육체가 아닌 건강하고 싱싱한 육체로 하나님을 볼 소망을 표명한 것이다.
A. 까닭 없이 수난당하는 의인--사단은 고통과 질고의 연출자이다. 그는 하나님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겠느냐 대든다. 하나님은 까닭 없이 믿는 신앙의 표본으로 욥이 고난당하는 것을 허용한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욥 2:7).
욥은 어느 한 날에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재벌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된 것이다. 그것도 온 몸에 악창까지 번져 기왓장으로 몸을 긁었다. 악창은 문둥병을 두고 사용된 용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것을 두고 상피병이라고 한다.
B. 모진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의인은 깊은 신앙의 심성으로 돌아간다. 고난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남에게 모진 짓을 하지 못한다. 고난은 남을 돌보는 심성을 낳는다. 고난의 신비는 고난이라는 불행이 선이라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겪는 고통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 점에서 고난은 선일 수가 없다. 오히려 고난의 파괴적인 고통 한 가운데서 가장 건설적인 생명의 본질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C. 침묵을 깬 하나님의 음성
드디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인간의 언어는 언제부터인가 무지한 말이 되었다. 욥의 친구들은 경건한 믿음을 가졌지만 세상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모르면서 무지 하고 헛된 말로(38:2) 늘어놓았다. 인간은 참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말이 많아졌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알고 싶었는데, 고난의 부당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당함으로 보았는데, 하나님은 삶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이 자기에게 좋은지를 모른다고 ‘네가 아느냐?’고 반복하여 물으신다(38:4-7). 그리고 천연계 현상을 보라고 하신다(38-39장). 사람 사이를 떠나 천연계를 보면 은총의 세계를 안다. 그리고 천연계의 생명들을 보라고 하신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고 생명의 거룩함이 있다. 쓰러져 가는 생명이라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욥 42:2 -- 주께서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욥 42:3 잘 알지도 못하면서/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함부러 말을 하였습니다./제가 알기에는/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은 자기의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우주의 본질을 본 것이다.
욥은 죄의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고, 절망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본 것이다. 그리고 욥은 이제 듣는 경지로 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42:5).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은 희망을 기대한다.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희망을 가진다.
인간 편에 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 편에 서는 법을 배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으로서 욥을 본다.(42:6) 고통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자신이 당한 불행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회개의 핵심은 죄 보다는 죄스러움 또는 죄송함에 있다.
D. 중보기도의 권능--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 42:7)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는 자기의 고난이 부당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고난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욥기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견하는 책이다. 의인의 고난은 세상 사람들을 대속하는 일이다. 욥의 정체성은 의인이라는데 있다. 모든 의인의 대표자이다. 수난 받은 의인 덕택에 나머지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수난 당하는 의인은 이 원리를 잘 모르고 자기의 무죄함을 변호한다. 사단은 의인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불신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그 유혹의 지렛대로 불행을 사용한 것이다. 부자이기 때문에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부자와 의인이 한 사람에게 같이 갈 수 없다는 논리가 배어있다. 세인들의 시선도 불행한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욥의 친구들은 번제물을 바쳐야 했다. 욥은 중보자로 선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정의를 요구하던 욥이 용서의 주체가 되었다. 수난은 죄값을 대신 받는 것이다. 수난 받는 의인은 자기도 모르게 대속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 맞섰던 자가 이제는 용납하는 자가 된다. 그의 기도는 세상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정의가 없다면 강자들이 억압하는 혼란스런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용서가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태초에 중보자가 있느니라는 말은 이제 태초에 용서가 있느니라는 뜻을 안고 있다. 욥의 깊은 불행은 용서를 잉태하였다. 무심한 세상을 살리는 것은 수난 받는 의인의 마음 속에서 피어난 용서의 기도이다.
암 환자가 그러듯이 욥은 새벽에 문득 입에서 쓴맛을 느끼며 한 모금의 달콤한 음식을 그리워하고, 어느 순간엔 곁에 있는 옷가지 하나 집기 싫은 무력증에 빠지고, 주변의 한마디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고, 예측불허인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의기소침해지면서 우울증에 빠져 '암환자의 고통처럼 설명 불가능한' 고통 속에 지내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셨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천연계로 시선을 돌리도록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늘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현상과 일들을 기적처럼 놀라워하며 감탄하는 연습을 자주하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나 한다. 이런 자세는 일상의 삶이 매 순간마다 축제의 장으로 바꿔준다. 욥이 아침에 일어나 신발을 신는 것도,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보는 것도,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큰 감동으로 다가 온다. 만나는 사람마다 가족처럼 느껴지고 앙상한 나무도 껴안고 싶다. 이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오늘 이 시간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며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임을 새롭게 기억하면서 하루 하루를 감격적으로 산다.
전에는 내가 왜 고난을 당하여야 하느냐고 맞섰지만 이젠 감사로 찬 말을 한다. 무엇을 달라는 청원기도보다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더 많이 한다. 감사할 일들이 갈수록 더 많아지고 나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으로 괴로움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가끔은 위로의 편지를 쓰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방문한다. 환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렇게까지 큰 도움을 주진 못할지라도 마음을 읽어주는 작은 위로자가 되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눔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욥은 전에는 자기가 완전한 줄 알고 약점을 고백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한 마디 말에도 깊은 상처를 입으리만큼 연약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회개하였다.
욥은 자기를 몰아세우던 자들, 가시 고통을 안겨주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하나님처럼 완전해지는 완전에의 길은 용서의 길이고 중보의 길이다. 욥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대속적 기도의 구약적 모델이 된다. 그는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희생 예표가 된다. 고통당하는 자의 중보로 인간에게 소망의 문이 열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바로 이런 고통이다. 그 예수님의 고통의 중보에 동참하는 욥의 고통의 중보는 가장 고상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완전을 내 안에서 체험하는 길은 욥처럼 용서의 중보기도를 올리는 일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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