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타후치 강 래프팅

https://youtu.be/Xe73kvA3iog

자연의 산수(山水)즐기고 좋아한다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한계를 실감하다. 요산요수는 논어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문장에서 나온 말이다. 이 글 귀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지혜롭지 못한 자가 산과과 물을 좋아하면 어려움을 당하기 마련이다.

차타후치(Chattahoochee) 강에서의 3시간 동안 래프팅(rafting)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다. 오래전에 스모키 마운틴 어느 계곡에서 했던 래프팅을 생각하고 나섰던 것이 오산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다.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두 번, 세 번, 네 번 노 젓기, 뒤로 세 번 등 노를 저의면서, 그리고 배 안쪽으로 앉기, 몸을 왼쪽으로 기울기, 오른 쪽으로 기울기 등 지시에 따라 하면서 험한 급류를 향하여 내려간다. 가이드의 지시를 받으면서 고전 4;1에 나오는 일꾼이란 단어가 노 젓는 사람이라는 헬라어 휘페레타이(huperetai)이었던 점이 생각나다. “종들”, “시종들”, “교역자들로 번역되고 있으나 원래는 전함 안에서 노 젓는 사람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 노 젓는 자는 갑판 위에서 싸우는 병사들과는 구분된다. 후에 이 단어는 중노동에 종사하는 부하를 언급하거나 군사 용어로 사령관의 시중을 드는 전령을 가리킬 때 사용됐다. 군대에서 최고사령관이 명하는 대로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며 사명이었던 것이다. 우리 보트의 가이드가 우리에게 교습한 대로 따르면 안전할 줄로 여겼는데 막상 곤경에 빠지니 가이드의 지시가 들리지도 않고 급물살 아래에서는 가이드의 교습은 무용지물에 불과하였다.

레이지 리버(lazy river)라는 큰 주류에서 갈라진 샛강에서는 보트에서 내리라고 하여 믿고 내렸는데, 유유히 흐르는 강이 아닌 급류에 곧 휩쓸려 허우적거리다. 몸을 하늘로 향하고 발을 하류 쪽으로 두면서 떠내려가다. 소용돌이 여울에서 물속에 몇 차례 들락날락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을 마셔댔다. 그래서 제일차 패닉 상태에 빠졌다. 간신히 극복하고 다시 보트를 타고 여러 번 급류 속을 돌파하여 가다가 낙차가 큰 급류지대에서 배가 뒤집혀 물 속에 몇 차례 들락거리며 허우적거리다. 강변 쪽을 향하여 해염을 치다 보니 숨이 찬다. 그동안 수영을 해 본 일이 없어 곧 숨이 가빠진 것이다. 수현이를 돌볼 겨를도 없다. 몇 차례 급류 소용돌이 속으로 떠밀려 가다 뒤 돌아 보니 뒤집힌 보트는 아직 거리가 멀고 수심은 깊고 여기저기 바위들이 있는 험악한 급류 속에서 겁이 난다. 지옥 문턱에까지 간 느낌이다. 제이차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다. 내가 나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덤벼들었구나 하는 후회를 하기도... 혼자서 급류를 타고 해염을 치기도하고 떠밀려 내려가다. 놓친 노를 다른 사람이 주어서 받기도 하다. 드디어 다른 보트가 와서 노를 내밀어 붙잡고 보트 줄을 잡고 나니 가이드가 목 뒤에 나온 구명대를 붙잡아 끌어 올린다. 그리고 한 참 내려가다가 내 본래의 보트를 만나 옮겨 타다. 일행이 같이 탄 보트의 인도 사람들이 종착 부두가 어디냐고 아우성이다. 모두가 이 젠 그만하기를 바라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우리 일행은 보트 7대에 6명씩 분승하고 나선 것이다. 어느 보트이던지 간에 안 뒤집힌 보트가 없을 정도이었다. 전문 가이드의 한계를 넘어선 급물살에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https://youtu.be/Xe73kvA3iog

래프팅 후에 차타후치 강 래프팅을 찾아보고 놀라다. 조지아 콜럼버스와 앨라배마 피닉스 사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도시 인공 래프팅 코스란 소개에 접한 것이다. 차타후치 강 상류에 댐을 막아 놓고 상황에 따라 2-5등급으로 조절하는 난이도 코스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래프팅 코스 길이는 2.5마일이나 된다. 낮 동안에는 2-3급의 난이도의 물을 흘려보내지만, 오후 늦은 시간에는 10배 이상의 물을 방류하여 3-5급의 난이도 래프팅 유속 코스를 조성한다. USA Today 지는 이 코스를 세계 톱 12에 드는 인공 래프팅 코스로 소개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난 코스에 무모하게 도전을 한 것이다. 이런 도전은 요산요수와는 거리가 멀다.

인생을 살다보면 타의에 따라서, 또는 시류에 따라서 급물살을 탈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욥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악마의 결정적 타격을 받고 허우적거렸다. 이유도 모르고 뒤집혀지는 곤경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원인과 이유를 몰랐지만 믿음의 본심은 잃지 않았다. 욥은 빌닷의 주장을 수용하여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였다. 그는 眞實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人生이 어찌 하나님 앞에 로우랴”(9:1). 욥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했다. 그 공의는 자기에게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인간인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가를 알기 원한다. 그가 당한 인생의 급물살 환경에서도 자기의 죄 됨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몰려 온 파도에 무능력하지만 자기 양심은 자기의 무죄함을 증거하고자 한 것이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