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여호와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출 33:12, 13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主께서 내게 이 百姓을 引導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者를 내게 指示하지 아니하시나이다 主께서 前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恩寵 חֵן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主의 目前에 恩寵חֵןfavor을 입었사오면 願하건대 主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主를 알리시고 나로 主의 目前에 恩寵 חֵן favor을 입게 하시며 이 族屬을 主의 百姓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親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츨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宣布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慈悲롭고וְחַנּוּן 恩惠롭고 חַנּוּן 怒하기를 더디하고 仁慈와 眞實이 많은 하나님이라.”
시내산 아래 사건의 줄거리
1980년 여름 이집트 성전을 둘러보다가 그 거대한 규모에 놀란 적이 있다. 사카라(The Serapeum at Saqqara) 사막 지하에서 성스러운 아피스 신(황소신)의 시신을 담은 거대한 대리석 관들을 보고(석관 하나 무게 평균 65톤, 총 25개 석관) 혀를 내두른 적도 있었다. 몇 백 년을 이런 이집트 우상 경배라는 종교적 문화 분위기에 젖어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성막계시와 십계명 두 돌판을 받고 있는 중에 시내산 아래에서 모세를 기다리다 빗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으로 된 아피스 신을 만들어 경배하였다. 아론은 금송아지 신을 두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구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켜 모세로 하여금 두 돌판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금 분자들을 물에 뿌려 모든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출 32:20).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 파기의 죄책을 져야 된다는 뜻이다. 반역 주동적 우상 숭배자 3,000여명이 도륙 당하였다(출 32:28). 하나님의 분노는 죄에 대한 거룩함의 반응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올렸다. 모세는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을 감수하겠다고 까지 하면서 하나님께 떼를 썼다(32:32). 그는 하나님께 한량없는 은혜를 자기 동족에게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죄에 대한 보응을 능가한다. 그리하여 다시금 언약 백성으로 인정해 주시는 허락을 받아냈다.
하나님 편에서 불쌍하게 여기신 일은 엄청난 희생을 요청하였다. 그 희생이 대속(代贖) 사건으로 나타났다. 대속은 죄가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형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이다(사 53:5, 6; 요 1:29; 고전 15:3; 히 9:28; 벧전 2:24).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대속적 중재자로 나서서 간청하였다. 그의 중재는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재를 예표한다. 모세는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범죄자의 허물을 모두 담당할 수는 없는 한계가 있었지만, 중보의 탄원을 올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동행을 거부하신다(출 33:2-3). 그들의 목숨이 부지되었다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만든 그 같은 정신이 그들 중에 증오와 분쟁을 일으켜 결국 그들은 서로 죽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지 않는 것이 최선의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다시 그의 언약을 어긴다면, 그의 직접적인 임재는 그들에게 완전한 멸망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떠날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부모 잃은 고아처럼 되는 것이다.
그들의 죄가 얼마나 흉악한지를 깨닫고, 온 진영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모든 범죄자들이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다. 그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측은하게 생각하여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한 번 더 호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출 33:7-13에는 모세의 간청이 나타난다. 백성들은 참회와 수치 가운데서 백성들은 그들의 “장식품”을 “제거”했다. 장식품의 제거는 애도와 개혁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대표자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그의 은총에 대한 회복의 표를 허락할 것인지를 보기 위하여 회막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거둬들여진 것을 통렬하게 느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진실한 회개의 가망성을 나타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러운 모세를 보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의 중보의 탄원을 허락하신 것이다
출 33:12-13절은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한 친밀한 방법의 실례가 된다(민 12:8). 하나님과의 친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담대하게 그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참된 우정은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이다(히 4:15, 16; 요일 4:18). 모세는 여호와가 그의 백성에게 어떤 일을 행할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누가 그들을 인도하도록 임명될 것인지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얻기를 열렬히 소망하였다. 모세는 만약 여호와가 말한 것처럼 그가 여호와의 목전에 지금 “은총을 입었”다면 여호와가 분명히 자신이 나갈 길을 제시하여 주시기를 간청했다. 그는 하나님이 이것을 드러내리라고 느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나타냈다. 실패한 아론 때문에 “나와 함께 보낼 자” 여호수아를 동역자로 세워 주실 것도 함축적으로 간청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동행이라는 (14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기사로 이어진다.
"성막은 진 밖에 세워졌고 모세는 그것을 “회막(會幕)”이라고 불렀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가기를 바라는 자들은 모두 그리로 나아가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그분의 긍휼을 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백성들이 그들의 장막으로 돌아갔을 때에 모세는 성막으로 들어갔다. 백성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한 모세의 중보가 가납되었다는 증거를 보고자 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기 위하여 하감하신다면, 그들은 완전히 소멸당하지는 않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구름기둥이 내려와 회막 문에 머물렀을 때에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들은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였다.
모세는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의 완고함과 무지 몽매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싸워야 할 어려움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을 설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내시도록 그리고 그분의 임재에 대한 보증을 주시도록 탄원하였다.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그 대답에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아직도 만족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고하고 회개하지 않은 그대로 놓아두시면 무서운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영혼을 억눌렀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동포들의 생명과 분리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하나님의 은총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다시 회복되도록, 그리고 그분의 임재의 표적이 계속 그들의 여행을 지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는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예언자는 탄원을 그치지 않았다.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되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더 큰 증거들을 갈망했다. 그는 이제 지금까지 어떤 인간도 해본 일이 없는 요구 곧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요구했다. ”(부조, 327-328)
은총(favor)를 구한 사람들
1. 구약 시대 의례적 인사 언어 - 상대방 은혜가 생존의 조건
아브라함 - Gen 18:3 내 主여 내가 主께 恩惠חֵן 를 입었사오면 願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라반이 야곱에게(30:27),
야곱이 에서에게(32:5, 33:8, 10, 15).
세겜이 야곱에게(34:11).
애굽인들이 요셉에게(47:25),
야곱이 요셉에게(47:29)
2. 하나님의 특별 은총(페이버)를 받은 사람 조건:
1) 하나님의 눈에 좋게 보이는 사람- 창 1장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는 특별 선물
2)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모세는 만약 여호와가 말한 것처럼 그가 여호와의 목전에 지금 “은총을 입었”다면 여호와가 분명히 이것을 드러내리라고 느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나타냈다. ‘너 역시 내 눈에서 은혜를 찾았다’로, 여기서 ‘눈’을 뜻하는 ‘아인(ayin)’에는 ‘샘,’ ‘만족하다’, ‘기쁘게 하다’, ‘좋게 생각하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틀 나누며 또한 그분에게서 이러한 ‘은혜’까지 발견했다는 것은 매우 큰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모세는 하나님이 그를 향해 노를 발하셨으면서도(출 4:14), 친구처럼 대면해서 이야기할 만큼(출 4:11) 큰 은혜를 입었다.
은총, 인자 및 자비의 의미
위에서 간추린 줄거리에 나타난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은총, 인자 및 자비 개념이 그 바탕이 되었다. 하형록의 <페이버(favor)>에서 지적했듯이, 히브리어 중요 어휘들이 지닌 다채로운 의미가 영어나 한국어 단어들로 완벽하게 표현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情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표현할 적합한 단어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히브리어 헨 חֵן (chen)이나 헤세드 חֶסֶד 번역할 적의한 단어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1. 은총 חֵן (chen)의 의미
חֵן (chen)은 '호의, 은혜, 은총, 매력,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헨(chen, 명남)은 하난(chanan)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다. chanan은 호의나 은혜를 베풀다, 자비하다의 뜻이다.
신학적 용법에서, 노아와 모세는 여호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언급된다(창 6:8, 출 33:12). 노아의 경우 그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S: “found favor in the eyes” KJV: “found grace in the eyes” INT: “Noah found favor the eyes of the LORD.”
요셉으로 전옥에서 은혜를 받게 하시고(창 39:21) 또 이스라엘인들로 애굽인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출 3:21, 출 11:3, 출 12:36) 이는 여호와이셨다.
출 33:13의 번역
NAS: I have found favor in Your sight, KJV: Now therefore, I pray thee, if I have found grace in thy sight, INT: pray have found favor your sight know
노아에게 하신 “여호와께 恩惠(chen)를 입었더라”는 표현은 구약에 자주 나온다(룻 2:2, 10, 13; 에스더 2:15). 하나님이 상심하신 중에 노아를 통하여 은혜를 준비해 두셨다. 본문은 노아가 새 시대의 아버지로 은혜를 입을 만한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1) 노아는 의로웠다(tsaddiq). 이 자질은 하나님 또는 율법을 특징짓는 표준이 된다. 그는 썩 어 문드러져 가는 시대에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2) 노아는 완전하였다(tam). 여기 완전은 노아가 무죄하다는 것이 아니라, 검소하고 simple하 고 순진하였다는 것이다naive. 그는 조작하고 둘러대는 그런 품성이 아니었다.
3)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는 날마다 하나님과의 친교 가운데 에녹처럼 살았다는 것 이다.
여호와께서 노아의 이런 자질들에 기뻐하시고 은총(favor)을 베푸신 것이다. 거기에는 유형적인 죄 고백이나 어떤 간청이 없는 기뻐하시는 관계의 상태에서 호의를 베푸신 것이다.
구약 많은 구절들에서 헨은 '매력' (charm)이나 호의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인격'을 의미한다. 아히카르(Ahiqar)의 아람어 잠언에는 "사람의 매력은 그의 진실성에 있다"라는 어구가 나온다(ANET, no. 132, p. 429). 이런 호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혜의 배려이다( 잠 3:4; 13:15; 전 9:11; 10:12). 즉, 육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이런 은혜와 매력을 지닌 여자(잠 11:16, 22)는 존경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이 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총이다.
헨(chen) 개념에는 은혜 개념도 들어 있지만, 거기에는 다른 측면도 담겨 있다. chen은 하난(chanan)동사로부터 온 명사이다.
Skip Moen의 분석: 헨이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첫째로, 헨에는 누군가에게 호의 또는 은총(favor)을 나타내 보이는 사상이 들어 있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헨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향하여 자선(선행)을 행하는 사상이 담겨 있다. 이 점에서 헨은 무조건적이다. 헨과 마찬가지로 자비(라훔)는 무조건적이다.
둘째로, 제 2 자에게는 제 1 자의 선행 또는 선의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 기쁘게 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이 둘째 의미에서 헨은 조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명사 헨은 먼저 아름다움의 뜻을 지닌 용어가 된다. 헨을 보여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부드러움, 동정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 그 사람은 헨(은총)으로 행동한다. 마찬가지로 헤세드는 언약적 충성을 이행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조건적인 은혜이다
엘렌 화잇은 이 조건성을 분명히 밝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이 그분의 은총(favor)을 입는 유일한 길이다”(4T 28)고 하였다.
그러나 헨의 이 두 가지 의미가 별도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스러움에는 헨의 이 두 가지 의미가 하나로 엉켜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하난(chanan, favor)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무엇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시고 은총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이 망가진 인간이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시고 불쌍하게 여기신다. 이것은 부모가 빗나간 자녀에게 갖는 마음과 유사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적 존재인 인간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시어 은총(favor)을 베푸신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 하나님의 눈에 좋게 보이는 사람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어진다. 헨(favor)이라는 단어 속에 축복과 승리의 비결이 있다. 또한 성공과 행복의 비결이 있다. 인생을 올바르게 나아가게 하는 비결이 있다.
출 33:19에 나오는 “은혜(하난) 베풀 자에게 은혜(하난)를 베풀고”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은헤를 베풀다’(be gracious)로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동사 ‘하난’은 ‘호의를 베풀다’, ‘은혜롭게 대하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아무런 자비도 요구치 않는 아랫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베푸는 은혜’를 의미한다(Wycliffe). 따라서 은혜를 받는 사람보다는 은혜를 베푸는 측에 더 강조점이 주어지는데, 성경에서는 이 동사의 주어가 대부분 하나님으로 나와 있다.
그리하여 언약에 있어서 무조건성과 조건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2. 헤세드 חֶסֶד 의 의미
헤세드(chesed)는 언약에 기초한 은혜 covenant love이다. 헤세드가 주로 ‘인자(loving kindness), 자비로 번역되고 있지만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히브리어 단어이다. 수 세기 동안 헤세드란 단어는 자비 mercy, 친절 kindness, 사랑 love과 같은 단어들로 번역되었다. “자비”(mercy)나 “불쌍히 여김”(pity) 그리고 “친절”(kindness)이 그 의미의 각기 다른 측면들을 바르게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헤세드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를 묘사하는 용어로 쓰였을 경우에는 이 중 어떤 것도 그 전체적인 의미를 온전히 나타내지는 못한다. 시편 34편에서 히브리어 헤세드(chesed)가 5절에서는 “자비”로 번역되었다. 개역한글판에는 이 단어가 5절과 7절에서 모두 “인자하심”으로 번역되었지만, 제임스왕역(KJV)에는 5절은 “자비”(mercy)로 번역되고, 7절은 “인자하심”(lovingkindness)으로 번역되었다. 70인 역본은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엘레오스(자비 mercy)라는 말을 사용하며, 라틴어 역어는 미스에리코르디아(misericordia)이다. 신약 기자들이 구약의 헤세드, 헨을 카리스로 표현하기도 하나, 아가페(agape, 사랑)라고 묘사한 것을 구약 기자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헤세드로 일컬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림교회 성경주석 시편 36편 보충 설명의 결어에서 언급했듯이, 헤세드를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를 도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chesed는 ‘인자’ 나 ‘자비(긍휼)’와 꼭 일치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 이유는 헤세드에는 상호관계 설정에 따른 의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나오는 헤세드는 용서 또는 자비라는 개념보다는 신실한 충성(faithful loyalty)에 더 가까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세드는 하나님께 향한 순종 같은 적절한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개념이다. 토라는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이런 기대를 요청하는 調音으로 언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순종을 거절하는 것은 언약관계에서 하나님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라훔 רַחוּם (rachum)의 의미
라훔은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 자궁, 긍휼히 여기심,’( Mercy, compassion, womb)의 뜻을 지녔다. 라훔(형용사)은 라함(H7355)에서 유래했으며,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을 의미한다. 새 생명을 잉태시켜 열 달 동안 보호하는 자궁의 주체 여성의 생명 사랑과 불쌍히 여김이야말로 하나님의 심정이다.
출 34:6의 “여호와라 여호와라 慈悲롭고 恩惠롭고 怒하기를 더디하고 仁慈와 眞實이 많은 하나님이라”에서 רַחוּם וְחַנּוּן (라쿰 한눈, 慈悲롭고 恩惠롭고)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라쿰은 “불쌍하게 여기는” 또는 “자궁”을 뜻한다. 하난(hanan) 또는 한눈(hannun)은 은혜(favor)를 뜻한다. 출 34:6의 순서 배열에서 라쿰이 은혜에 선행하여 나오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favor)에 앞선 그 분의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선행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은혜로 용서하시는 일에는 죄의 고백과 회개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님은 빗나간 자기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신 것이다. 이런 마음이 탕자의 비유에 고스라니 담겨 있다. 빗나갔다가 돌아온 탕자를 먼저 불쌍하게 보시고 부둥켜안고 새 옷을 입히시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연다.
인간이 텟첼의 면죄부를 구입해야 하는 이런 저런 요구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헨과 헤세드는 함께 간다, 그러나 헨의 불쌍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 선행된다. 시내산 아래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머리를 이런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이름 선포에 나타난 기본 사상이다.
하형록은 ‘페이버(favor)’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즉 자신의 것을 나누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로 규정한다.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베푸시는 은혜와는 달리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현하고 베푸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 선물이다.
“先生님 律法 中에서 어느 誡命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主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誡命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自身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誡命이 온 律法과 先知者의 綱領이니라“(마 22:36-40).
자신이 쓰다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단 하나의 것을 양보하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페이버를 받는 비결이다. 하형록은 그의 책에서 자기의 심장 이식의 기회를 이틀밖에 안 남은 심장을 지닌 여자에게 페이버를 넘긴다. 또 거대한 주차창을 발주한 사업 계약자의 부당하고 무리한 요구 때문에 다가온 큰 손실을 자기가 거액을 부담하겠다고 피이버를 베푼다. 생명을 걸거나 사업체의 존망을 걸고 먼저 페이버를 먼저 베푼 은총의 체험 열매들을 고백하여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헨이 베풀어지는 현상-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Skip Moen은 헨에 내포된 은총(favor)을 독수리가 상승기류를 타는 것과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https://www.skipmoen.com/author/skip/).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으며”(사 40:31 ). 이 본문에서 “날개치며” (soar on wings)는 ‘위로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독수리 날개는 2-3m, 큰 독수리는 어린 아이를 집어들 수 있을 만큼 힘이 세고 몸집도 크다. 그 시력은 인간의 10배 이상이 되고, 태양 직시도 가능하다. 그리고 1시간에 120km 거리를 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비행 비결은 날개 때문이다. 그러나 새의 힘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된다. 비행기나 갈매기는 수평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날라 간다. 그러나 독수리는 수직으로 부는 바람을 이용한다. 태양이 떠오르고 온도가 올라가면, 수평으로 바람이 불어 찬 기운이 몰려온다. 그리고 뜨거운 지열은 위로 올라간다. 이것이 상승기류이다. 상승기류는 낮에만 있다. 대낮에 비행하는 비행기도 상승기류가 없으면 고도가 뚝 떨어진다. 독수리는 상승기류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그곳에서 날개를 편다. 그 날개를 치는 것이 soar on wings이다 독수리는 상승기류가 있는 산봉우리, 계곡에 앉아 있다가 수직으로 바람이 불어오면 날개를 활짝 펼친다. 다른 새들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비상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치솟는 것과 같다. 희생을 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페이버)의 상승기류를 탄다. 노아도, 모세도, 하형록도 하나님의 이 은총의 상승기류를 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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