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와 죄의 특성
바이러스와 죄의 특성
바이러스란?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들의 화두는 온통 바이러스라는 단어에 집중되어오지 않았나 싶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안 들리는데 그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들쑤시고, 사람들을 들볶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 병원 발인예배 참석 시 중국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 가정을 방문하고 돌본 분을 승용차에 픽업한 후 우리 부부는 자가 격리하면서 조마조마하며 지낸지 2주를 넘겼습니다. 그 사이 종로 의료기기 상점들을 돌며 체온기를 구입하고자 했지만 헛수고이었습니다. 지난 안식일 텅 빈 교회당에서 홀로 하나님 품에 안기는 기도를 올리며 기도와 말씀으로 지내는 황홀함도 체험했습니다. 어제는 그 환자 가정을 돌본 다른 분이 도망치듯이 미국에 들어가 그의 가족이 교우들과 교제하며 장례식에도 참여하는 일로 미국에서는 몇 째 안 되는 큰 한인 재림교회가 지난 안식일 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하였다는 말도 전해 들었습니다.) 중국 우한 폐렴 바이러스가 온 세상에 확산되어가는 것을 인지하면서 바이러스와 죄는 상당히 공통되는 특징을 가졌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도대체 이 바이러스는 무슨 특징을 지녔는가? 생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생물도 아니고 무생물도 아닌 중간형이라고 하여오다가 현재는 생명체로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바이러스는 숙주에 기생하여 독립적 주체가 되지 못한다. 숙주 밖에서는 물질대사를 못한다. 바이러스는 생명체의 특징인 먹이 섭취와 생리 대사 작용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무생물처럼 지낸다. 바이러스는 다른 살아있는 생명체의 세포를 숙주로 삼아 그 안에서 기생(寄生)하여 물질대사 즉 자가 증식을 한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과거에는 바이러스가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중국 제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사람들은 무증상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을 시키는 그 활동 범위가 전 세계적이다. 이번 폐렴 바이러스는 RNA이어서 환경에 곧 적응하는 변이를 자주해서 다루기가 쉽지 않다. 바이러스는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박테리아와 달리 그것은 단백질과 핵산으로 이루어진 유전물질 DNA 또는 RNA이라는 핵산을 지닌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바이러스는 세포로 되어있지 않아, 세포막도 없고 효소도 없는 무생물적 특성도 지녔다. 대부분 생물의 유전자는 DNA이지만, 바이러스 유전자는 RNA 형태가 훨씬 더 많다. 그 크기는 세균보다 50배 이상 작기 때문에 세균여과기를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광학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고, 전자현미경으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아주 미세한 바이러스의 감염 속도가 엄청나고 파멸적 세력으로 활동하는 힘을 지녔다. 인체 내에 들어가 온 몸의 기능을 약화 내지 무력화시키면서 안식을 강탈하고 고통을 주다가 급기야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죄 바이러스
죄는 영적으로 바이러스와도 같다. 그것은 한 인간의 몸, 마음, 정서,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죄는 인간의 도덕성과 영성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약화 내지 병들게 한다. 죄는 가정과 사회를 멍들게 하고 파괴한다. 죄는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張本)이고, 고통과 슬픔의 뿌리가 된다. 죄는 인간의 영혼을 불의와 불신으로 몰고, 선과는 담을 쌓게 하고 불법을 자행케 한다. 죄는 급기야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인간은 이 죄의 권세를 자기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죄는 생물학적인 바이러스와 상당한 유사성을 지녔다. 사람 안에 잠입하여 들어온 죄라는 바이러스는 외적인 증상을 보이기까지 더러는 오랜 시간 잠복해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다. 이 죄의 바이러스는 하나님의 전자현미경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지, 사람들 눈에서는 증상 발현으로 나타난다. 죄가 독립된 존재가 아닌 기생하는, 부정적, 파멸적 세력인 점에서 바이러스와 닮았다.
신학 거장들의 죄의 원천 추측
현대 신학자들은 죄를 성경 본문에서보다는 어떤 철학적 가설을 도입하여 죄의 본성과 원천을 밝히고자 시도하여 왔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은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는 악을 자연적인 악과 사회적인 악으로 분류하여 죄의 사회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는 심지어 felix culpa (the blessed sin) 개념을 내걸면서 하나님을 죄악의 고안자(contriver)로 보았다. 그는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인과율(causality)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죄의 창시자를 하나님으로 본 것과 죄를 하나님 의식에 대한 혼란 또는 방해물로 간주함으로써 단지 심리적인 것으로 이해한 점은 아리 숭한 시각에 불과하다.
칼 바르트는 마귀, 악, 죄의 기원 및 본질을 무적(無的)인 것에서 찾았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지배에 반대와 항거가 존재한다고 보고 그것을 무로 규정했다. 그의 이런 시각은 창 1:2의 혼돈, 공허, 흑암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혼돈과 무적인 것(nothingness)을 의미하는 카오스(chaos)를 악으로 보았다. 카오스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비존재나 완전한 무(nothing)가 아니라, 무의 권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항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의학 3권 3부 창조론). 바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음으로써 죄의 기원을 아담의 타락에서 추적하지 않고 혼돈과 무에서 찾는 주관적 자기 해석을 한 것이다.
폴 탈리히는 인간 존재의 근거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 다른 존재로부터 소외,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죄의 근원을 찾았다. 그는 인간의 본질과 실존을 구분하고 이를 죄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창조된 것의 본질은 선하나, 피조물들은 항상 자유를 이용하여 소외의 상태에 빠진다. 신생아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자마자 실존적인 소외 상태에 빠진다. 인간은 매순간 타락과 타락 이전의 상태를 경험한다.
현대신학의 거장들이 간추린 추측들은 천상의 반역 사건과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을 도외시하거나 전설 같은 것으로 격하시킨 것에 불과하다.
한 때 풍미한 마르크스주의에 영향 받은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은 죄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억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시각은 죄를 한 개인의 내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을 전통적 입장을 경시하거나 배척하고 외적 제도에서 찾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이란 프레임에 따라 악이 물질의 사적인 소유권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악이 인간 소유욕에서 기원한다고 보는 마르크스는 악을 인간 생활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이해하였다. 악의 원인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착취하는데 있다. 공산화라는 사회 변혁은 악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러나 누가 구조악적 문제가 되는 그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었느냐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었어야 한다. 인간 외적인 요인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책임의식의 약화를 초래하며 무서운 투쟁으로 몰아넣는 것이 되어 문제 해결의 진정한 길이 되지 않는다.
엘렌 화잇은 죄의 시작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설명을 하면서도 현대신학의 거장들처럼 억측을 하지 않고 유보해 두는 진술하고 있다.
“죄의 시작과 그 존재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수수께끼가 되어 있다. 그들은 악의 소위(所爲)와 그 무서운 결과로 생기는 불행과 파멸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통치아래 이런 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의심한다. 여기에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불신과 의심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고 구원에 필수적인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 죄의 존재에 관하여 질문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코 계시하지 않으신 것까지 알아내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가진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의심하고 트집잡기를 좋아하는 기질에 의하여 행동하는 자들은 그것을 구실로 성경의 말씀을 거절해 버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유전과 그릇된 해석이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정부의 성격과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는 원칙 등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 까닭에 악에 관한 큰 문제에 대하여 만족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죄악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죄의 시작과 죄의 최종적인 처분, 악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무엇보다 분명히 알려져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온 것에 대하여 전혀 책임이 없으시다는 것, 하나님의 정부에는 반역을 일으킬 조건이 될 만한 아무런 결함이 없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강제적으로 거두어 버린 일이 없다는 것 등이다. 죄는 하나의 무단 침입자이다. 그것이 나타나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죄는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만일 죄의 원인과 그 존재 이유를 밝힐 수 있으면 죄는 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의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이다.”(GC 492-493).
죄의 본질적인 특성
(1) 죄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죄에는 바이러스처럼 독립성이 없다. 죄는 존재가 아니다(Sin is not "is."). 죄는 존재의 반대이다(Sin is opposite of "is."). 죄가 독립성의 결핍이라는 점은 실재(reality)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된다.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는 루터파 신학자 Matthias I. Flacius(1520-1575)가 죄를 분리된 독립적인 본체라는 주장을 배척하였다.
(2) 죄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뜻이 나타난 율법에 관계되어 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일을 참회하는 고백을 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인간에게 한 범죄를 곧 하나님께 행한 범죄라고 인식하였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그 뜻을 밝힌 율법에 대한 관계에서 일탈하는 것이 된다. 즉, 죄에는 관계적 특성이 있다. 키트가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체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명료하게 나타난 율법은 죄의 바이러스를 진찰하는 하늘의 키트가 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죄는 도덕률과 연관 되어 있어 절대적 특징을 지녔다. 죄가 되던지 안 되던지 둘 중 하나이지 중립지대는 없다.
(3) 죄는 마음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마음은 인격체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는 중심부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반이 된다.
아우구투스는 죄는 인간의 의지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의지 그 자체가 죄가 감염되는 첫 원인이 된다.
(4) 죄는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상태, 생각까지 포함하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죄” 용어들을 일별하면, 표적에서 빗나간 것, 불신과 불경건, 범죄, 정직성의 결여, 불법, 반역, 변절, 왜곡, 가증한 것, 무지 등을 죄라고 부르고 있다. 이를 축약한다면, 죄라는 용어가 대체로 외적 행위, 내적 상태, 관계의 파기를 나타내는 세 범주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갖가지 죄악들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는 지적은(히 8:10; 10:16) 마음에 이는 생각을 경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는 행위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포함한다. 자주 죄는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범법 행위에 국한해서만 거론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이를 향하여 분내는 사람은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 즉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음욕적인 욕구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는 명령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죄는 분명한 불순종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욕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갈 5:16-17).
여기서 “육체의 욕심”은 금지된 것들에 대한 욕구 즉, “죄된 본성의 욕망들(epithumian sarkos)"이다.
이 내적 상태에는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전적인 뿌리도 포함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5) 죄는 죄책(guilt)와 오염(pollution)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에게 죄책을 물어 유죄가 된다. 즉, 율법을 범하면 죄책이 성립되어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유전 받은 잠재적 죄책(potential guilt)과 죄된 행위를 한 결과인 실제로 범한 죄책(자범죄, actual guilt)으로 나누지만 이에는 문제가 많아 별도로 다룰 것이다. 죄책을 짊어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롬 1:18).
죄는 죄책을 가져온다. 성경적 관점에서 죄책은 죄를 지은 사람이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 "(롬 3:19, 난외주) 아래 놓여 있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에 죄책감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기능들을 고갈시킨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궁극적으로는 사망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오염은 인간 본성의 타락성, 도덕적 성질의 부패를 지칭한다. 인간은 이 타락성을 지닌 채 탄생한다(시 51:5; 욥 14:4; 엡 2:3).
(6) 죄의 뿌리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
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막고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게 한다. 자기중심 또는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그 자체는 교만의 터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루스벨이 범한 길을 따른는 것이 된다(딤전 3:6).
(7) 죄는 일반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다.
죄는 그럴듯한 이유로 저지른다. 그리고 자기 죄는 숨기고 남의 죄를 극대화시킨다.
(8) 죄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을 지녔다.
죄는 그 자체의 독특한 종류에 속한다. 이른바 그래서 죄를 두고 "sui generis"라는 말이 생겼다. (Sin is "of its kind," "one of its kind,' or "unique type of its kind.")
(9) 죄는 세력(power)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이지만 (존재론적 의미), 죄는 존재(being) 가 아닌 세력이다. 이런 특성은 바르트가 마귀 악 죄의 기원 및 본질을 무적(無的) 세력에서 찾은 것과 유사하다.
a. 부정적인 세력이다. 죄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역사하는 힘이 된다(negative power).
b. 죄는 자멸적 세력이 된다(suicidal power). 죄는 항상 자기 파멸적 힘이 된다. 이는 마치 어떤 수를 곱하면 것을 제로로 만드는“제로(O)"와도 같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21).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사 64:7).
c. 죄는 기생적 세력이다(parasitic power). 죄는 인격적 존재라는 생명체를 숙주로 하여 기생하며 활동하는 세력이다.이런 죄의 본성의 철리는 숙주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특성과 닮은꼴이다. 바이러스가 부정적 세력이고 자멸적 세력이며 기생적 세력인 점과 죄의 본성은 상통한다. 바이러스의 부단한 변이 때문에 치유하거나 예방할 의학적 대책은 늘 새롭게 개발되어야 한다.
죄 바이러스 치유의 길
오늘날 우한 폐렴 바이러스 감염자를 격리시킨다. 감염으로부터 예방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잘 씻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라는 조언이 고작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천사들을 격리 조치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들을 격리시킨다고 해서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시험이 천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났다. 존재의 내부에서 의혹과 교만의 파문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적 존재들의 세계에서 격리 수용한다고 해서 예방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루스벨은 불신과 의혹의 씨를 퍼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격리보다는 피조 지성들이 죄악 세계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므로 죄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면역체계 강화로 대응케 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에 의한 구속과 최후적 회복이라는 원대한 경륜에 따라 어떤 죄의 바이러스가 침투하더라도 이에 능히 이길 수 있는 영적 면역을 완성시켜나가는 긴 여정을 택하신 것이다. 또한 죄악의 정체를 충분히 들어 나게 하시므로 죄악을 공의롭게 근절하시는 방책이 우주를 영원히 안정되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죄에 대한 치유는 오로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늘 성소에서의 중보는 죄의 바이러스의 백신이 되고 정결케 하는 치유책이 된다(요일 1:7). 그리스도야 말로 죄의 권세를 물리치는 권세를 가지셨다. 그는 우리에게 죄의 권세에서 돌아설 수 있는 은혜의 권능을 주신다. 이런 준비를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의 표상을 통하여 가르쳐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십자가에서 대속적, 대리적 희생이라는 죽음을 통하여 마련되었다.
“하나님께 感謝하리로다 너희가 本來 罪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傳하여 준 바 敎訓의 本을 마음으로 順從하여 罪로부터 解放되어 義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 18 ).
신자는 죄라는 폭군에게 종살이하다가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다. 그러나 의에게 종노릇하는 것은 실제로는 참된 자유이다. “하나님께 순종함은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요, 인간의 정욕과 충동으로부터의 구원이다”(치료봉사, 131).
우리가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선행은총을 베푸시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어 죄의 바이러스를 저항할 수 있도록 면역 주사를 주입하신다. 그리하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승리하게 하신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者마다 罪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居함이요 그도 犯罪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리고 마침내 “能히 너희를 保護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榮光 앞에 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유 24) 앞에 서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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