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한 분들

단상 : 2019. 10. 14. 11:45

하나님과 동행한 분들

<3650 걷기대회>를 참가하면서

 

20191013일은 재림신도들의 삶에 새로운 장이 펼쳐진 날이다천 여 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삼육대학교가 커뮤니티 건강 증진을 위한 제1<3650 걷기대회> 행사를 진행한 것은 뜻 깊은 행사이었다. 대학 운동장을 시발점으로 하여 5 km, 또는 10 km 걷기 코스가 있었다. 나는 10 km 거리를 택하였다.

 

걷기 대회 코스는 변화성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환상적인 가을 하늘 아래 여기 저기 야생화들이 보이고 숲속들을 많아 거리에 질주하는 차량들의 배기가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걸을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다소 속도를 내서 걸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더 걷고도 싶은 날이었다.

평소에 스쳐 지나가거나 쳐다보기만 하는 조선 11대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康陵) 내부를 돌았다. 강릉과 태릉을 거치면서 통치자들의 행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종 시대는 외척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하여 사회가 불안하였으며, 거듭되는 기근으로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이 발호하던 시대에 자기 정치적 경륜도 없었던 임금은 34세 나이로 죽었다. 그를 이어 즉위한 선조는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선수촌 내부 넓은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금메달 기적의 산실이라는 건물도 지나쳤다. 사실상 그 건물은 선수들의 땀이 몇 번씩이나 강처럼 흘러 내렸을 것이다.

 

태릉 길로 다시 나와 한참 걷다가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 씨의 능인 태릉 안으로 들어섰다. 이 시대는 을사사화 등 권력 투쟁의 피바람이 부는 시대이었다. 어린 왕을 수렴 정청한 문정왕후의 정치는 실패작이었다. 이 여인은 강릉에 묻힌 아들과 함께 측근들의 국정농단에 파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육사 정문에서 교정으로 그리고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진 돌비 옆 연병장을 끼고 돌아 자기 생명을 바쳐 부하들을 살린 강재구 소령 동상 옆을 지났다. 우리는 그를 기념하는 재구로를 걸으면서 그의 숭고한 자기희생적 군인정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사 후문을 나와 태릉 길로, 그리고 선수촌 앞에서 옛 경춘선 철로 길을 따라 걷다가 샛말 정보부 전파연구소를 거쳐 대학 정문 그리고 운동장으로 진입하였다.

 

<3650 걷기대회>의 백미는 너무 많은 시간을 배정한 경품행사에 있지 않았다. 이 날 가장 뜻 깊은 일은 신앙하는 무리들과 동행한 사실에 있다. “동행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아름다운 단어로 다가온다. 이른바 혼밥시대 외톨이 같이 살아가는 시대에 신앙 동지들과 함께 걷는 일이 얼마나 아답고 정겨운가! 믿음을 같이 하는 남녀노소 남은 무리가 사랑의 친교를 나누며 소망을 향하여 함께 걸어간 것이다. 태릉 길에 끝 자락이 안보이게 이어지는 분들의 모습은 가나안으로 향한 옛 이스라에 백성들 모습과 오버랩 되기도 했다.

 

엘렌 화잇 여사가 처음 보았던 환상은 좁고 곧은길을 걸어가는 재림신도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다시 보라. 좀더 높이 보라는 이 음성을 듣고 나는 눈을 들어 세상위에 높이 뻗어 있는 곧고 좁은 길을 보았다. 이 길 위로 재림신도들이 그 길 끝에 있는 까마득한 도성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었다. 그 길이 시작되는 곳에 빛이 있어서 그 빛이 그들의 뒤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초기 14).

 

지난 96일 금요일 저녁 전국 걷기 연맹 회장 이강옥 박사의 삼육대학교회에서의 두 다리가 의사입니다주제로 한 강론 내용 중 하이라이트는 걸으면서 나의 자존심과 욕망 등 모든 것을 것을 내려놓고, 겸허한 바른 마음을 갖고 걷는 체험이라는 것으로 들려 왔다. 걸으면 체내에서 발생하는 나쁜 균을 박멸하는 미토콘드리아가 증가하여 기적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와 대화하면서 걷는 것을 개발하는(2SM 316) 분들은 천국을 향하여 걷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분들이다.

조윤경 강사와 이강욱 박사의 두 차례 걷기 강습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운동기능저하 증후군(locomotive syndrome)에 걸리기 쉬운지를 알게 되었다. “일어나 걸으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걷지 않으면 갖가지 질병이 찾아온다. 뛰면 인생도 빨리 간다. 걸으면서 삶을 관조하는 일은 강인한 신체 활력과 하늘 영성을 회복시킨다. 천국은 믿고 걸어서 가는 곳이다. ‘그 어떤 운동도 걷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CH 200).

 

이번 걷기 대회에서 본 아름다운 모습들은 허리가 굽은 90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안간 힘을 다하여 걷는 모습이었으며, 체형이 다소 불균형인 분이 열심히 걷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믿음직한 대학생들이 사이 좋게 걸어가고, 어머니와 함께 한 어린 아이들이 활력 넘치게 뛰다시피 걷는 모습들이었다. 또한 함께 한 교우들이 10km 완보증들을 들고 환한 미소로 자기 교회가 이런 걷는 일을 지속적으로 가지면 좋겠다고 제안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지난해까지는 주로 등산을 하는 일이었는데 산행하다가 관절에 이상신호가 와서 걷는 것으로 방향선회를 하여야 했다. 이 때 내 마음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아 우울하기도 했다. 뛰다시피 산행했던 체험이 자꾸 떠올라 그러하였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보다 더 좋은, ‘의사들이 처방하는 모든 약보다 더 좋은 걷기’(CH 52)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과 동행한 구약 모델들

 

홍수 전 세상에는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하고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도 한탄하시던 시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에는 의인들이 있었다. 즉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이었다. 이들은 흙탕물 속에 핀 한 송이 연꽃과 같은 삶을 이어갔다.

 

그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었다. 영어 표현은 “Walking with God" 이다. 하나님 백성의 삶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걷는데 승리의 비결이 있다.

 

에녹은 六十五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三百 年을 하나님과 同行하며 子女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三百六十五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同行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世上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1-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실이 두 번 나온다. 이 표현은 노아에게도 사용되고 있으며(6:9), 다른 구절들에서도 유사한 말로써 발견된다(참조 창 17:1; 13:4; 116:9; 6:8; 5:1, 2).

이 하나님과의 동행은 뛰어나게 높은 경건의 생애, 곧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끊임없는 인식 혹은 거룩한 순종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묘사한다. 에녹의 생애는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과 완전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성경은 노아의 인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세기 69).

 

이 구절에서 의인(saddiq)의 개념과 완전한 자(tamim)의 개념은 평행법적으로 동의어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행()인 하나님과의 동행이 앞의 의인, 또는 완전한 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의인은 완전한 자이며 완전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halak 가다, 오다, 걷다) 자라는 것이다. ‘할라크의 문자적 뜻은 걷다’(11:42), ‘산책하다’(삼하 11:2)이다. 여기 에녹이나 노아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은 매일 걷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의미로 발전한 것이다(6:8). 이처럼 죄악이 관영한 가운데에서 내 마음에 스며드는 그 죄악을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의 뜻을 따라 걷는 자들인 것이다.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한 자들이다. <3650 걷기대회>의 진정한 목표는 바로 이런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에 있다.

 

우리는 길을 걸어갈 때에도 예수님과 이야기할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우편에 있노라”(16:8)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벗 삼아 길을 걸을 수도 있다”(2기별, 316).

 

따라서 창세기에 나오는 의나 완전은 에녹이나 노아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친교와 의존 관계에서의 동행하는 의인이며 완전인 것이다. 에녹이나 노아는 불법의 늪지대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 안에서 경건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관계인 신앙을 가졌기에 의인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천지 격변의 대홍수에서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재림성도들의 성공적인 천국 순례 길을 위하여 몇 자 써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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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